조선 왕조 최고의 꽃, 세종
1394년 (태조3)태종 이방원의 장남으로 태어난 양녕 제는 1404년 왕세자에 책봉 되었으나 자유분방한 성격 탓으로 궁중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그는 궁중을 몰래 빠져 나가는 일이 잦았고 사냥이나 풍류를 좋아해 자주 태종의 화를 돋우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1418년 세자에서 폐위되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그가 궁중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기 보다는 아버지 대의 비참한 형제간 살육전을 보고 정치에 대한 두려움과 염증을 느꼈을 것으로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여주의 외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민무구 무질 형제등 외삼촌들과 친하며 많은 영향도 받았다. 이것이 태종의 눈에는 더구다나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며 양녕에게 왕위가 넘어갔을 경우 그 외척들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태종은 판단 하지 않았을까. 왕권의 안정을 무엇보다도 최우선시 했던 태종은 그리하여 첫째 양녕과 둘째 효령을 배제하고 세째인 도, 충녕을 세자로 다시 책봉하였던 것이다. 이분이 바로 조선왕조를 최고로 꽃피운 4대 세종이다.
세종의 업적에 대해서는 너무나 많이 알려져 있으므로 여기에서 재론은 하지않으려 한다. 다만, 최근 모 드라마에서도 표현되다시피 그가 한글을 창제하였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위험과 모험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되는 프로젝트였음을 간과 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외부적으로는 대를 이어 조선을 지배하고 있는 중국의 세력을 벗어나려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으며 그 경우 일시에 왕위를 잃어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문자를 널리 반포 한다는 것은 백성의 의식을 깨우는 일로서 통치의 기반을 이루고 있는 사대부 세력의 반발을 일으켜 또한 왕권이 바뀔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 한글 문자의 연구는 얼마나 가슴을 졸이는 비밀 연구 였는지 모른다.
세종의 정력과 소헌왕후 심씨
세종은 조선의 역대 왕들 중에 아들을 가장 많이 둔 왕이었다. 총 18명의 아들 중 정비 심씨의 소생이 8명, 영빈 강씨의 소생이 화의 1명, 신빈 김씨의 소생이 계양, 의창, 밀성, 익현, 영해, 담양 등 6명, 혜빈 양씨의 소생이 한남, 수춘, 영풍 등 3명 이었다. 정실 소헌 왕후 청송 심씨는 문하시중 심덕부의 손녀이고 영의정 심온의 딸이다. 왕실에서는 왕비 간택령이 내려지면 전국의 민간은 결혼이 금지된다. 모든 결혼은 왕비가 먼저 간택된 후로 미뤄지는 것이다. 전국의 명문 대가로 부터 미모와 머리를 겸비한 천여명이 넘는 후보자가 천거되면 마지막에 남는 것은 3명이다. 그중에 단 한명이 왕비로서 간택되니 그분은 가히 전국의 최으뜸 규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에 떨어진 두명은 민간으로 출가 할 수는 이미 없다, 왕명으로 간택 되었으니 그분들은 후궁이 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니 장희빈 등 어찌 하다가 후궁이 된 경우도 있지만 후궁도 대단한 분 아니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왕비와 후궁간의 신분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크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종의 정실 소헌 욍후가 낳은 왕자중 문종, 세조 두분이 후에 왕위에 오르게 된다.
문종에 대한 새로운 생각
세종과 소헌 왕후의 장남 향은 1421년 8세때 세자로 책봉되었다. 세종은 각종 질병으로 시달리다가 1436년 세종 18년에 자리에 눕게되어 부왕은 그 이듬해에 세자에게 서무 결재권을 넘겨주니 향의 나이 24세였다. 요컨대 세종은 실질적으로는 상왕으로 물러나 앉고 섭정에 필요한 첨사원을 설치하여, 그곳에 첨사, 동첨사 등의 관원을 두었다. 첨사원은 고려때 동궁의 서무를 관장하는 기관 이었던 첨사부 제도를 본딴 것으로 이는 충렬왕 이후(1276년) 에 폐지된 제도였다. 그런데 세종이 이제도를 임시로 도입한 것은 세자가 섭정을 할 경우 승정원과 편전을 대신할 곳이 필요했기 때문 이었다.
세자 향은 1442년 부터 1450년까지 8년간의 섭정을 통해 정치 실무를 익혔고, 여러가지 치적들을 남기기도 했다. 때문에 세종 후반기의 정치적 치적은 세자 향의 업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지금까지 문종은 병약한 세자로서 세종 사후 왕위에 올랐다가 이름없이 힘없이 죽어간 사람으로 이해 하고 있었던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던것 같다.
그는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해 학자들을 가까이 했고, 측우기 제작에 직접 참여했을 정도로 천문, 역수 및 수학에 뛰어났으며 서예에도 능했다. 또한 성격이 유순하고 자상하여 누구 에게나 호평을 받았으며, 거동이 침착하고 판단이 신중하여 남에게 비난을 받는 일도 없었다. 물론 지나치게 착하고 어질어 문약한 측면은 있었던것 같다. 왕이 신하들의 말을 경청하는 것은 덕목이지만 지나치면 과유 불급이듯이 문종은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러나 문종은 이렇듯 관대한 속에서도 '동국병감', '고려사', '고려사절요', '대학연의주석' 등을 편찬했다. 또한 문종은 세자 시절부터 진법을 편찬 하는 등 군정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런 연장선상에서 보면 '동국병감'의 편찬은 병법의 정비와 군정의 안정을 위한 조치였다. 그는 즉위 초에 스스로 군제 개혁안을 마련해 총 12사로 분리돼 있던 군제를 5사로 집약 시키고, 군제상의 세세한 부분들을 개선, 보완하기도 했다. 문종은 이렇듯 유연함과 강함을 곁들인 정책을 실시 했으나, 과로에 의한 건강악화로 재위 2년 3개월 만에 3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야만 했다. 이때가 1452년 5월 이었다.
문종은 부왕 세종의 업적과 제왕으로서의 생활을 보며 자신은 몸을 바쳐 일하지 않으면 그 부왕의 그늘에서 헤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승지들이 보면 왕은 밤 12시까지 일하고 있는 것을 보았고 새벽 3시에 벌써 일어나 일하는 것을 보았다 한다. 그것이 그의 강박 관념이었을지 모르지만 그 성실성과 책임감만은 엄청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글, '조선 왕조 초기에 대한 소고'를 쓰게된 동기는 사실은 문종에 대하여 그간 너무나 단순했던 나의 관점에 가슴이 아파서이다. 후사의 준비도 아직 불비한 상황에서 과로로 쓰러져 숨을 거둘때 그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지 수 백년의 세월을 넘어 오늘 나의 가슴에 전해져 온다. <운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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