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4년 노론계의 김춘택과 소론계의 한중혁 등이 폐비 민씨 복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민암, 이의징 등은 페비 복원운동 관련자들을 모두 하옥시키고 심문한 다음 숙종에게 보고 하였다. 그러나 숙종은 투기가 극심한 중전 장씨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어 있었뿐아니라 김만중의 '사씨남정기'를 읽은후 인현왕후 민씨를 폐위시킨 것을 후회하고 있었던 중이라 민암 등 남인들을 축출해 버렸다. 그리고 중전 장씨를 다시 빈으로 강등하고 폐비 민씨를 복원시키고 노론계의 송시열, 민정준, 김익훈 등의 관직을 복구시키고 소론계의 인사를 등용시켰다. 그리하여 조정은 남구만 등 소론계열이 장악하게 되었다. 이 사건을 ‘갑술환국’이라한다.
갑술환국으로 빈으로 강등한 희빈 장씨는 중전으로 복위하기 위하여 안간 힘을 쓰게 되었다. 1701년 인현왕후 민씨가 죽은 뒤 희빈 장씨의 거처인 취선당 서쪽에서 신당이 발견 되었는데 이곳에 무당을 데려와 굿을 하며 민씨를 저주하며 죽기를 빌었고 이 사실을 숙종이 알고 분노하여 희빈 장씨를 자진케 하였으나 듣지 않아 사약을 내렸다. 그리고 장씨의 오빠 장희재와 궁녀 및 무속인을 국문토록 하였다. 이 때 소론 세력들은 세자를 위하여 용서해 줄 것을 간청하였으나 숙종은 듣지 않고 남구만, 유상운, 최석정 등 소론 세력을 귀양보내거나 파직시켜 조정에서 제거해 버렸다. 이로써 다시 노론계 인사들이 조정을 장악하였다. 이 사건을 무속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여 ‘무고의 옥’이라한다.
이렇게 숙종은 왕권 강화를 위하여 환국정치를 주도 하였지만 그 당쟁의 결과 수많은 정치인 명사들이 희생되었다. 그러나 숙종은 군왕의 고유 권한인 용사출척권을 행사하여 정치국면의 전환을 꾀함과 동시에 붕당의 대립을 촉발시켜 군주에 대한 절대 충성을 유도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숙종시대에는 대신들 간에 정쟁이 격했지만 왕권이 강화되어 사회전반이 안정된 시대를 열어가게 되었다. 영조 정조연간의 문예 부흥기는 숙종시대의 안정과 기초 작업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숙종은 농민의 부담을 감소해주고 지주의 세납을 증가시켰던 대동법의 전면실시, 전국 토지를 조사하였던 양전의 종결, 화폐주조 사업의 활성화, 상평통보의 통용, 수많은 서적발간 보급, 압록강 연변의 경계확정, 사육신과 단종의 복위 등 수많은 치적을 남겼다. 이렇게 환국정치로 왕권을 강화시키고 사회를 안정시켰던 숙종은 1720년 재위 46년10개월 만에 60세를 일기로 승하하니 인경왕후 김씨를 비롯한 9명의 부에게서 6남2녀의 자녀를 두었다. 그의 능은 명릉으로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의 서오릉에 있다.
숙종과 그를 사이에 두고 부침과 명멸을 거듭했던 인현 왕후와 장희빈은 치열했던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남여의 사랑과 애욕이 빚어낸 조선 왕조 비극의 인물들이었다. 애욕과 투기의 화신이었던 희빈 장옥정과 사대부의 딸로 태어나 중전이 되어 멀어져 가는 지아비의 사랑을 드러내 놓고 표현할 수도 없었던 인현 왕후의 이야기는 사실상 숙종이 만들었던 슬픈 사랑의 아픔들이다. 바리톤 김동규가 부르는 드라마 '장희빈'의 주제가 '그대 향한 사랑'은 개인적인 인간의 아픔을 겪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군왕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했던 숙종과 두여인, 특히 폐비되어 내쳐졌던 인현 왕후의 마음을 잘 나타내고 있는것으로 생각된다. <운향>
그대향한 사랑 - 김동규 출처 http://mmilk.tistory.com/2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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