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20일 아침. 스위스의 바슬로부터 20분 정도 떨어진 프랑스의 물 하우스 역이다.
국경지역이지만 바슬과 별차이는 느낄수 없다. 이제 07:40분 기차를 타면 5시간 정도 걸려 파리에
도착할 것이다. 아침 출근길은 여기서도 역시 분주하다.
프랑스 물 하우스 기차역의 플랫폼이다. 이 기차를 타고 파리로 이동한다. 파리 도착 시간은
12:15분으로 예정하고 있다.
프랑스는 농업이 주 산업인 나라이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산지가 적고 나즈막한 구릉이나
숲, 농지들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아무리 달려도 보이는 것은 드넓은 대 평원의 경치 뿐이다.
12:15분. 드디어 동 파리역에 도착 하였다. 동 파리역의 플랫폼 풍경이다. 오늘은 이곳 파리에서
점심을 먹은 후 베르사이유 궁으로 이동할 예정이다.
당통 광장 지역을 지나고 있다. 오른쪽에 보이는 호텔이 파리에서 가장 비싼 리치호텔이다.
영국의 다이애너 비가 바로 이 호텔에 투숙하고 있었으며 이 호텔의 오우너와 식사후에 동승한 승용차의
사고로 애석한게도 유명을 달리 하였던 것이다.
파리 시내의 모습이다. 점심 시간 이어서 거리로 나온 사람들이 많은듯하다.
파리는 숫자로만 비교하면 그다지 크지 않은 도시이다. 넓이는 서울의 7분의 1 크기이며 인구는
218만 명이나 파리지앵들은 도시의 수치적인 크기나 비교에는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들은
현대적 개발이나 변화도 원치 않는다. 그보다 그들은 수백년 동안 내려온 문화의 전통을 어떻게 보존
하고 미래에도 지켜나갈 것인가에 더 관심이 많다. 그점은 다른 유럽의 도시들과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 도시에서 피어나는 개성과 개발되는 색조, 패션의 물결은 세계를 주도하고 있다. 이것이
파리지앵들의 자존심이다.
개선문 앞의 샹제리제 거리를 지나고 있다.
나폴레옹 황제는 1807년 자신의 승전과 황제의 위엄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 개선문의 건축을 명하였다.
그는 첫째 세계 최대 규모로, 둘째 단순한 구조로, 셋째 신속하게 모든곳으로 부터 접근할 수 있도록
이라는 세가지의 관점을 충족하도록 명령하였으나 아무리 기다려도 이 승리의 개선문은 완공되지 않는 것이
었다. 34년후 이 거대한 승리의 문이 드디어 완공 되었을때 나폴레옹은 이미 그 나는 새도 떨어뜨리던
권좌에 더이상 있지 않았다. 자신이 명한 52m의 이 웅장한 승리의 문을 지나가 보지도 못하였던 것이다.
권세란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 그는 전 유럽을 통합하여 로마의 계승자가 되고싶은 욕망에 불탔으나 불가능은 없다던 그도 워터루의 전투에서 웰링턴의 유럽 연합군에게 마지막으로 패하였고, 대서양의 고도 센트 헬레나에서 쓸쓸히 죽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교각 왼쪽의 조각은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 광경이며 오른쪽은 프랑스 대혁명의 혁명군을 상징하고 있다.
내부에는 나폴레옹이 건설했던 전 유럽 제국에서 승리했던 전투와 주요 막료 장군들의 기록이 새겨져 있다.
이 개선 문에서 가장 각광을 받았던 사람은 정작 드골 장군이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귀국한
드골 장군은 이곳에서 200만 파리 시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후 그는 대통령에까지 올랐으며 그런 연유로 개선문 앞의 광장은 드골 광장으로 불리고 있다.
샹제리제는 본래 "천국으로 가는 넓은 길"이라는 의미이다. 유럽 제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셀수 없는 전투에서 나폴레옹 황제와 그의 군대는 승리하였다. 그러나 병사들의 소원은 어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승전한 병사들이 이 샹제리제 거리를 지날때 바로 그것은 천국으로 귀환하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이 빨간 차양의 레스토랑은 바로 레마르크의 소설 "개선문"에 나오는 레스토랑이다. 젊은 시절 읽었던 개선문의 벅찬 감동이 살아나는것만 같았다. 유태계 외과 의사 라비크. 비밀경찰 하아케에 대한 증오의 집념을 가슴에 새기며 라비크는 이곳에서 조앙 마두와 차를 마셨을까.. 지금은 아랑 드롱이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고 하며 그 유명세를 즐기기 위해 세계의 관광객이 이곳에 와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신다.
샹제리제 거리의 약국. 이곳에서는 약만 파는게 아니다. 간단한 음식이나, 빵, 음료, 와인 등 식료품도 다 팔고 있어 수퍼 마켓과도 비슷하다. 우리나라도 일반약품의 수퍼판매 여부가 논란이 되고 있는데, 반대로 언젠가는 약국도 이렇게 다른 생활 용품도 팔도록 개방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소비자가 원하는데 어떻게 특정 집단의 이익만 생각 할 수 있겠는가.
에펠탑이 가장 잘 보이는 광장이다. 에펠탑은 파리의 상징으로서 1889년 당시 파리의 세계 만국 박람회를 기념하기 위하여 건축하였다. 에펠 설계회사의 두 젊은 설계사가 설계 하였으며 5천 페이지에 달하는 설계도로 구성 되었고 각층과 전체의 역학이 공학적으로 상세히 계산 되어 있었다한다. 당시 우리나라는 갑오경장의 시기였다. 건축은 석조로 하는 것이 가장 발달된 시대 였는데 이곳 파리에서는 철골 구조로 조립하려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성공했다는 것은 얼마나 선각자적 발상이었던 것인가.
베르사이유 궁전에 도착하였다. 이 궁전은 루이 14세가 건축하였으며 루이 15세, 16세까지 3대에 걸친 주거와 정치의 공간이었다.
베르사이유 궁전은 3가지 관점에서 세계 최고를 자랑하였다. 첫째는 그 크기로 넓이는 230만평에 달하며 말을 타고 한바퀴 도는데 2시간이 걸린다. 둘째는 화려함이며 순금으로 장식된 곳이 많았다. 셋째는 섬세함이다. 장식품이나 커튼, 베드 등의 섬세한 조각과 아름다움은 그야 말로 대단 하였던 것이다.
순금으로 장식된 궁전의 정문. 궁전의 중앙 부분은 연회를 위한 대 홀이며 오른쪽은 왕, 왼쪽은 왕비의 공간이다. 이 엄청난 궁전이 백성의 혈세로 건축 되었으며, 노동력은 1일 15000명, 말 2000필이 매일 소요 되었고 49년 동안 공사가 진행 되었다. 루이 14세의 나이 77세에 완공 되었던 이 궁전은 가히 하나의 도시 규모였다. 루이 14세는 권위의식, 집념, 카리스마가 강하였으나 자식운은 불운했다. 4남 1녀가 조기에 사망하였다.
궁내의 숲은 루이 13세 부터 왕실의 사냥터였으며 루이 14세는 사냥터 내에 궁전을 건축 하였던 것이다. 루이 14세는 1643년에 출생하여 5세에 즉위하였다. 어린시절 지방 영주의 권력이 강해지며 왕권이 약화 되어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6세의 성인이 되었을때 권위를 세우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이 초 거대 궁전 건축을 발표하였다.
루이 15세는 증손자이며 4세에 즉위하였다. 그의 통치는 왕권과 절대 권력의 유지가 목적이었으며 그를 위한 수단으로 문화를 만들고자 하였다. 3일에 한번 대 연회를 열고, 에티켓, 교양, 음악회, 시, 희곡 등의 문화적 우월을 통해 통치하였다.
루이 16세가 즉위하였을때 그는 이 초 거대 궁전의 유지로 인하여 심각한 재정난에 봉착하였다. 방법을 찾아낸 것이 유럽의 부호 왕가였던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와 정략 결혼 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루이 16세는 합스부르크의 마리아 테레사 여제의 막내 공주였던 마리 앙또와네트와 결혼하게 되었다. 왕비는 550대의 황금 마차에 갖은 금은 보화를 가지고 시집오게 되었다. 그러나 마리 앙또와네트 왕비는 말이 통하지 않아 파티에 취미를 잃고 점차 보석 수집에 집착하게 되었다.
이곳이 소위 중앙부의 거울의 방이다. 이 거울의 방에 700명 내지 1300명까지도 귀족들을 초대해 파티를 하였던 것이다. 이때 귀족 부인들은 몸매를 아름답게 보이기 위하여 콜셋과 플레어 치마가 유행하기 시작하였고 남자들은 멋지고 세련된 가발을 사용하여 초대된 촌스러운 외국의 사신들과 부인들을 주눅들게 하였다. 이곳에서 연주되고 인기를 얻었던 음악들이 전 유럽에 유행하였으며 유럽의 예술을 주도하였다.
1789년 7월 14일. 극도의 궁핍에 시달리던 프랑스 민중은 드디어 일어났다. 이 프랑스 대혁명은 처음에는 민중의 권익이나 인권의 차원 보다는 우선 굶어 죽지 않고 살아 남기 위하여 본능적으로 터져 나온 엄청난 에너지 였다. 그러나 점차 평민 부호인 부르조아 계급이 민중을 선동하였으며 왕을 감금하고 협상하였다.
견딜수 없었던 루이 16세는 기밀리에 처가인 오스트리아에 구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군은 프랑스 영내로 진군할 수는 없었다. 전쟁이 발발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오스트리아 군이 국경까지 진격하여 기다리고 있을때 루이 16세 왕과 마리 앙또와네트 왕비는 마부와 하녀로 변장하고 탈출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왕의 탈출 정보를 입수하고 추격하기 시작한 혁명군에 의해 왕과 왕비는 체포되어 파리로 송환 되었다.
마침내 왕과 왕비는 1843명의 왕족 및 친척과 함께 콩코드 광장에서 단두대 길로띤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엄청난 권력과 부의 허무한 종말이었다. 이 베르사이유 궁은 1812년 나폴레옹이 황제로 등극하며 명령을 내려 복원하기 시작하였으며 복원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이곳이 그 화려했던 마리 앙또와네트의 침실이다. 침대 정도가 남아 있으나 유감스럽게도 그 외의 가구 등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이곳은 나폴레옹 홀이라고 일컬어지는 곳이다. 홀 정면의 벽 한면을 차지하고 있는 이 거대한 벽화는 1804년 12월 1일, 나폴레옹 황제의 즉위식 장면이다. 두번째의 벽화는 백마를 탄 나폴레옹 황제가 전선에서 진격하고 있는 그림이다. 아마도 이탈리아 북부의 기름진 롬바르디아 대 평원을 향하여 알프스를 넘어가는 장면일 것이다.
황제는 그의 병사들을 향하여 "나의 사랑하는 병사들이여, 전력을 다하여 알프스를 넘어가자. 저 아래의 기름진 롬바르디아 평원은 그대들의 것이다." 하고 외치며 이탈리아 진격 부대를 독려하였다. 수 십만의 부대와 포병부대 병참부대까지 이끌고 엄청난 눈속의 알프스를 넘는다는 것은 그 누구도 감히 상상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작전을 성공시켜 이탈리아를 손에 넣은 나폴레옹은 "나에게 불가능이란 없다" 고 일갈 하였다.
세번째의 벽화는 나폴레옹 황제 앞에서 그의 부하 장군들이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장면이다.
베르사이유에서 세느 강변을 다라 파리로 들어오며 강변의 파리 풍경을 구경 하였다. 거대 도시가 아닌 파리는 아직도 녹음으로 덮여있다.
세느강은 아름답긴 하나 한강처럼 거대한 강이 아니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은 흐르고 우리의 사랑도 흐른다." 고 노래하였던 기용 아폴리네르 시인의 시가 한국에서는 유명하나 정작 프랑스 사람들은 잘 모른다. 그저 그 지역에 놓여있는 다리라는 것 외에 다른 의미는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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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보 다리
기욤 아폴리네르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은 흐르고
우리의 사랑도 흐른다
마음속 깊이깊이 아로새길까
기쁨 앞엔 언제나 괴로움이 있음을
밤이여 오너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만 머문다
손에 손을 잡고 얼굴 마주하며
우리의 팔 밑 다리 아래로
영원의 눈길 지친 물살이
천천히 하염없이 흐른다
밤이여 오너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만 머문다
사랑이 흘러 세느 강물처럼
우리네 사랑도 흘러만 간다
어찌 삶이란 이다지도 지루하더냐
희망이란 또 왜 격렬하더냐
밤이여 오너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만 머문다
햇빛도 흐르고 달빛도 흐르고
오는 세월도 흘러만 가니
우리의 사랑은 가서는 오지 않고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만 흐른다
밤이여 오너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만 머문다
시집『알콜』(1912)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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