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illy의 한국사 이해

명량 대첩의 울돌목에 가다 2011.5.7

Billy Soh 雲 響 2011. 5. 8. 21:52

                    울돌목에 재현된 전라 우수영

이곳이 바로 이순신 제독의 명량대첩(鳴梁大捷) 본진 이었던 전라 우수영이다. 울돌목을 사이에 두고 진도를 건너다 보는 해남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임진 왜란 전략은 카토우 키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육군을 신속히 한양까지 진군 시키고, 그 사이에 조선의 남해안을 경유한 수군이 현재의 인천만으로 진입하여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마포에 상륙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왜군은 병참선을 확보하고 수륙 병진으로 평양을 공략한후 그 계획이 성공 한다면 명으로 진공한다는 작전이었다. 그리고 중국 대륙을 삼킨후 아시아의 대 제국을 건설한다는 황당 무계한 공상이었다. 이러한 공상을 종식 시키고 냉혹한 현실을 가리켜준 전투가 바로 이곳의 명량 대첩인 것이다.

 

최신예 전함 350척으로 구성된 연합함대와 마포에 상륙작전을 준비해온 10만의 왜군 수군 전력은 이순신 제독이 모함받은후 백의종군으로부터 돌아와 받은 겨우 12척의 패잔선과는 비교도 되지않는 월등한 전력이었으므로 왜군의 사기는 드높았다. 이순신은 어떤 특단의 작전이 아니고서는 전세를 뒤집기가 어렵다는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판옥선 12척으로 어떻게 이십배 가까운 적군을 상대 한단 말인가.  장군은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의 신념으로 노를 젓는 격군들을 격려하여 함선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도록 훈련시켰다. 그야말로 피를 토하는 심정 이었다. 

 

이순신이 모함을 받아 구속 된후 원균의 조선 수군은 왜군에 완패하여 피폐하였다. 이순신은 다시 삼도 수군 통제사로 복직된후 패배 의식 속에 젖어 있던 조선 수군의 전열을 다시 가다듬고 있었다. 왜장 와키자카는 이 전라 우수영 전력을 철저히 제압 하지 않고서는 서해안의 수군 북상 진로를 확보하는데 지장이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 서해 북상 항로를 막지 못하면 한양이 위태로워지고 조국은 누란의 위기에 떨어지는 상황이었으니 양측 모두 한치도 물러 설 수 없는 결전 이었던 것이다.

 

1597년 음력 8월 20일, 드디어 이순신은 갑판 개조를 끝낸 12척의 군함으로 함대를 구성하고 직접 지휘하여 이진(梨津)으로 이동하였다. 8월 26일, 기다리고 있던 일본 해군의 척후선 8척이 이진의 60리 거리까지 접근하여 왔다. 왜선의 추격을 발견한 이순신은 슬그머니 함대를 어란진(於蘭津)으로 옮겨갔다.   

 

그런데 왜군 수장 와키자카는 이미 한산 대첩에서 충무공의 학익진에 대패하여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달아났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명량 대첩 초기에 이순신 제독이 다시 복직되어 지휘권을 잡고 있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조선 수군의 패잔선 무리가 이진에 있다는 정보에 따라 일본의 척후선단이 추격해 와 보니, 조선의 패잔선단은 겁에 질려 어란진으로 도망쳐 버렸다. 적어도 왜군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9월 16일, 드디어 결전의 날이 밝았다. 오시(오전 11시)가 되었다. 133척의 왜선이 해남과 진도 사이의 울돌목에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왜군의 연합함대는 쿠루시마 미치후사를 선봉으로 하여 토도 타카토라와 카토 요시아키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특히 쿠루시마 미치후사는 1592년 6월 5일 벌어진 당항포 해전에서 전사한 형님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 선봉을 자원하고 나선 자였다. 

쿠루시마 미치후사는 무려 133척의 정예 함대를 이끌고 명량 해협으로 접근하였고, 70여 척의 제 2 함대들이 그 뒤를 따랐다. 일본 함대가 명량 해협의 남쪽 입구에 도착한 것은 12시경이었다. 마침 바다의 물결이 잔잔하여 하늘이 일본 함대를 돕는 듯 하였고 항해는 순조로웠다. 그런데 미치후사 함대가 명량 해협 중 가장 폭이 좁은 울돌목에 접근하니, 도망갔다고 판단했던 조선의 유령 함대가 기함을 선봉으로 하여 미리 포진해 있었다.

 


12척의 조선 판옥선은 나는 듯 일본 수군의 중심을 깨뜨리며 전진했다. 일본 수군은 울돌목의 거센 물살에 팔랑이는 연처럼 밀려났다. 일본 수군의 접근을 교묘한 조종술로 피해 드디어 일본수군 사이에서 일자(一字)로 선 조선수군은 배의 양편에서 일제히 함포사격을 가했다. 미치후사가 눈여겨 살펴보니 유령 함대의 기함에 오른 장기(將旗)는 분명 삼도 수군통제사 이순신으로 되어 있었다.

비로소 그 동안 소문으로만 떠돌던 이순신이 실제로 유령 함대를 지휘하고 있음이 확인된 것이다. 기함이 선봉에 서서 일본 함대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 뒤로 11척의 전함들이 포진하여 결사 항전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 뒤에도 멀리 한 무리의 선박이 있었으나 큰 전선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미치후사는 당대의 영웅이라 불릴만한 이순신과 한판 붙어보는 것에 야릇한 흥분을 느끼면서 단 12척의 적선을 133척의 최신예 전함으로 이기지 못한다면 배를 갈라 죽느니만 못하다는 생각을 하며 공격을 명령했다.

그러나 해협의 폭이 좁아 함대는 종대로 전진해야 했다. 이 당시의 해전은 전세계 어디에서나 적선에 접근하여 병사들이 배에 기어올라 선상에서의 난전(亂戰)을 통해 승부를 결정짓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수척의 일본 돌격선들은 조선의 기함을 사방에서 포위하고자 양쪽으로 날개를 벌리며 우회하려 하였다. 그런데 바깥쪽으로 돌던 왜선들이 돌연 물 속에 숨어 있던 암초에 걸리면서 기동 불능에 빠지고 말았다.

이때서야 왜 함대는 기함을 포위하려던 작전을 바꾸어 중앙으로 재집결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왜선들을 보고 있으면서도 기함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나 중앙으로 집결된 왜선들이 앞으로 전진하여 해협을 빠져나오는 순간, 좁은 물길을 가로막고 우뚝 서 있던 조선 함대의 기함이 서서히 옆으로 돌더니, 종대로 덤벼드는 일본 함대를 향해 지자포와 현자포 등, 함재포들을 일제히 발사하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갑판 위에 있던 병사들도 일제히 활과 총을 쏘아 대기 시작하니, 선봉에서 달려들던 일본 전함이 단번에 불길에 휩싸여 버렸다. 조선 함대는 우선 현자총통과 지자총통 등을 발사하여 일본 군함의 기동력을 마비시킨 후, 곧이어 조란환이라 불리는 새알 크기만한 쇳덩어리를 한 번에 100-200개씩 산탄으로 발사하였다. 이순신의 기함 한쪽에서 한 번에 발사되는 조란환은 모두 약 2천 개나 되어 갑판 위에 노출된 왜병들은 순식간에 몰살당하고 말았다. 이 전법을 이순신 제독은 합력사살(合力射殺)이라 하였다.

앞장선 전함이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여 처참한 지경이 되자, 후열의 전함들은 조선 군함의 가공할 함포 사격에 소름이 끼쳤다. 그러나 그들은 뒤를 따르는 동료 함선들 때문에 뒤로 물러서고 싶어도 물러설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물살이 그들을 조선 함대 쪽으로 밀어주고 있어서 후퇴하기가 물리적으로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진해도 죽고 물러서도 죽게 되었으니 선발 돌격선들은 결사적으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조선의 함선들은 기함의 위기를 쳐다보고만 있을 뿐 도무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조선 삼도 수군통제사 이순신 제독의 기함이 홀로 적을 맞아 약 1시간 동안 결사전을 전개하며 왜 선단을 차례로 격침시키고 있을 뿐이었다. 일본 수군이 육박전을 겨냥하여 조총을 주로 사용한 데 비하여 조선 해군은 대포를 주무기로 한 현대적인 함포전으로 일관하여 처음부터 상이한 전투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불과 1시간여의 싸움으로 일본 군함 20여 척이 깨어졌으며 승선 인원 대부분이 몰살당했다.

그러나 뒤로 돌아설 수도 없는 일본 수병들은 악귀같이 달려들었고, 조선 함포를 피한 몇몇 돌격선들이 접근에 성공하여 배 위로 왜병들이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이 때서야 비로소 이순신 제독은 중군기(中軍旗)와 초요기(招搖旗)를 세워 중군장 김응함에게 자신의 기함을 엄호하도록 지시하였다. 기함의 명령을 받은 중군장과 거제 현령 안위가 즉각 그들의 함선을 몰아 일본 함대 속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그 동안 일본군의 공격에 수비로만 일관하던 조선 수군이 마침내 공세를 취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소극적인 전법으로 공방전을 벌이며 시간을 끌고 있었다. 나머지 9척의 전함들은 여전히 기함의 명령을 주시하며 대기하고 있었다. 전면에 나섰던 20여 척의 선봉 전함들이 모조리 격파되자 드디어 적의 대장선이 노출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이 배에는 깃대 꼭대기에 새의 날개가 꽂혀 있었고 붉은 기가 매달려 있었으며, 누각 주위는 푸른 장막으로 둘러쳐져 있었다고 한다. 적장은 다락방 위에서 선봉 돌격 함대를 지휘하였던 것이다.



 

이순신 제독이 그의 기함을 빠르게 몰아 접근한 후 집중 함포 사격을 퍼부으니 일본의 대장선은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고 적의 대장은 바다에 떨어지고 말았다. 기함의 병사 김을손이 적장을 끌어올려 보니, 그는 붉은 문양이 그려져 있는 화려한 비단 옷을 입고 있던 쿠루시마 미치후사였다. 쿠루시마의 목은 즉각 기함의 돛대 꼭대기에 매달렸고, 멀리서 이를 본 일본 병사들은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상대적으로 조선 수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충천하였다.

12시경에 시작된 해전은 어느새 3시간 정도 계속되었고, 북쪽으로 흐르던 물살도 서서히 바뀌어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더니 차츰 빨라지기 시작했다. 앞으로 전진하려는 일본 군함들이 배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하여 안간힘을 써 노 젓는데 노력을 집중하는 반면, 조선 함대는 물길을 따라 흐르면서 마음껏 적선을 공략하는데만 열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바로 이순신이 기다리던 공격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마침내 이순신 제독의 기함에 전 함대의 총공격을 알리는 깃발이 올랐다. 기함을 주시하며 휴식을 취하던 9척의 전함들은 일제히 함포를 발사하며 달려들었다.

이순신의 기함 한 척에 진땀을 흘리며 3시간을 소모한 일본 함대는 혼비백산하여 뱃머리를 돌려 도망가려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큰 실수였다. 전투 지원을 위해 후방에서 좁은 해협을 따라 올라오던 함선들과 탈출하려는 함선들이 서로 충돌하게 되었고, 이를 피하려다 양 옆의 암초에 걸려 침몰하는 등 일본 함대는 막심한 피해를 입게 되었던 것이다. 적을 단번에 격멸시키기 위하여 물의 흐름이 가장 빠른 신시(申時)까지 전투를 질질 끌며 기다려 왔던 것이다. 또 전투경험이 적은 조선 수군에게 단 1~2척의 함선으로 수백척에 맞서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자신감과 결전의 의지를 갖게 하는 것과, 그 반대의 효과를 왜군에게 주는 고도의 심리전 전술이었던 것이다.

이순신 제독의 절묘한 전술이 극치를 이루며 세계 해전 사상 전무후무한 대기록이 이어지고 있었다. 일본 함대는 서로 먼저 빠져나가려는 다툼으로 인하여 연쇄적으로 좌충우돌하였고 또 해협의 양측 암초에 부딪쳐 처절하게 파선되어 갔다. 무사히 빠져나간 듯 싶었던 함선들도 시속 11노트라는 가공할 속도로 흐르는 물살을 타고 마치 나는 듯 추격해 온 조선 함대의 함포에 맞아 침몰되어 갔다. 이 수라장 속에서 무려 100여 척 이상의 일본 군함들이 격침되었고 멀리서 대기하던 90여 척만이 도망갈 수 있었으나 그들도 거의 치명적인 피해를 입은 상태였다.

 이 명량 대첩은 오전 오시(11시)부터 신시(오후 4시)까지 장장 5시간에 이르는 치열한 전투였다. 이순신 제독은 남해에서 원균의 조선 수군에 대승한뒤 서해를 북상하여 한양으로 진출하려는 133척의 일본 수군을 맞아 단 1척의 배도 잃지 않으면서 적선 31척을 침몰시키고 90척을 파손시켰다. 한편의 드라마 같은 그날의 대승리는 임진·정유 7년 전쟁의 종지부를 찍는 반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이것이 바로 세계 해전사에 영원한 불멸의 신화로 남을 명량대첩이었던 것이다.  <운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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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나라나 기나긴 역사 속에서 나라의 위기를 구해낸 영웅이나 스승이 있었다. 유럽 제국 건설의 야망에 불탔던 프랑스의 나폴레옹, 그를 물리친 트라팔카 해전의 영국 넬슨 제독, 미국의 독립을 쟁취한 조지 워싱턴 장군, 필리핀의 독립을 위해 젊음을 던진 호세 리잘, 패전국 독일의 롬멜 원수.. 헤일 수 없이 많다.

 

그러나 우리 민족에게는 성웅 이순신이 있다. 어린 시절 부터 우리는 충무공에 대해 배워왔다. 그러나 나 자신 막연하게만 알고 있을뿐 그가 어떤 전략으로 어떤 핍박 속에서 어떤 용기와 리더십으로 싸웠는지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세계의 해전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렵다고 인정받고 있는 우리의 역사를 정작 우리들은 그 연구가 부족하니 각성해야 할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해전의 개념을 바꿨던 전설적인 학익진과 울돌목의 일자진은 현대 해전에서도 세계 각국이 깊이 응용하고 있는 전략이다.

 

임진 왜란시 육군은 패전을 거듭하였지만 충무공의 수군만은 일본 수군에게 패해 본적이 없는 필승의 전설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무공이 오히려 질시와 당쟁의 희생 제물이 되었으니 어찌 분함을 이길수 있으랴. 그러나 공은 묵묵히 그 고난을  받아 들였고 조국은 더 깊은 위기의 벼랑으로 몰리게 되었다. 이순신이 아니면 이 위기를 구하기 어렵다는 서애 유성룡의 간곡한 상소와 새벽에 공을 찾아 다시 전선의 지휘권을 잡아 줄것을 부탁한 도원수 권율 장군의 의기에 힘입어 그가 다시 남해안의 적진으로 향하였을때 그의 심정이 어떠하였을까..

 

전선은 초토화 되고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육성하였던 조선 수군은 지리 멸렬한 상태였다. 전함도 군사도 무기도 군량도 모든것이 전쟁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심지어 그나마 남아 있던 육상 부대의 무기와 군량도 그대로 팽개치고 지휘관들은 도망질을 치고 말았으니 공의 그 비통한 심정은 필설로 표현 할 수 없었으리라. 더욱 기가 막힐 노릇은 비통한 심정은 그렇다 치고, 그 잔여 무기와 군량들은 왜선의 기지로 부터도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으니 그것들이 만일 왜군의 전략 물자로 노획 되었을때 조선군의 미래는 그야말로 재기 절대 불가능한 암흑 상태로 떨어졌을 것이다.

 

불과 며칠 사이로 그모든 물자를 수습하고 군사들을 모집하여 훈련시켜 겨우 그나마 싸워 볼 수라도 있는 채비를 다시 갖췄던 시점이 바로 명량 대첩의 직전 상태이었던 것이다. 얼마나 아슬 아슬한 작전의 시차이었던가. 공은 이 긴박한 순간에도 오직 나라를 구하겠다는 단심일념 하나로 침착하고 냉정하게 작전에 임하고 전투의 진퇴에는 불같은 투혼으로 한몸을 던져 임하였다. 그는 민족을 구해낸 참다운 영웅이요 스승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현대사에서는 왜 이러한 참 스승과 영웅이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나라의 미래를 짊어질고 나갈 젊은 세대들에게는 무엇을 불어 넣어야 하는 것일까. 지식인가 정체성인가 불굴의 호기인가. 무엇이 우선이 되어야 할까.. 이 분단의 시대를 해결한 영웅은 언제 출현할 것인가. 대답 없는 낮은 구름만이 온 하늘을 덮고 있다.    <운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