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이성계의 사랑과 이별
고려말의 신진 사대부 출신 무장 이성계는 어느날 사냥을 하며 말을 달리다가 너무나 목이 말라 물을 찾아 헤매었다. 마침 인근 고을의 우물가에 아리따운 처자가 서있기로 물 한바가지를 청하였더니 처자는 바가지에 물을 떠 그 위에 버들잎을 띄워 주는것 아닌가. 목 마른 참에 버들잎 때문에 물을 잘 마실 수 없었던 이성계는 화가나서 이게 무슨 일이냐고 힐문하였다. 처자는 "심한 갈증에 급히 물을 드시다가 체하실까 염려되어 그리 하였습니다." 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이성계는 그녀의 지혜와 미모에 반하여 부인이 되어 주기를 청혼하였다.
이렇게 운명적으로 만난 이 처자가 바로 훗날의 신덕왕후 강씨이다. 신덕 왕후는 이성계보다 스무살 연하였다. 그녀는 불교의 진리에 심취해 있었으며 이는 사실 조선 초기의 통치 이념이었던 숭유 억불 정책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을 건국하여 태조가 된 이성계는 사랑하는 부인 신덕왕후를 위하여 명산 대찰을 자주 찾아 명승의 법문을 같이 듣곤 하였으며 그 사랑이 애틋하고 극진하였다. 신덕왕후 또한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부군을 내조 보필 하였으며 방번 방석 두 아들을 출산 하였다.
신덕왕후가 먼저 세상을 떠났을때 태조 이성계는 삶의 의욕을 잃고 슬퍼하였으며 "내가 이 고생을 하며 나라를 세우기까지 오직 신덕 왕후의 도움이 컸도다. 이제 그 목소리와 좋은 말을 듣을 수 없이 되었으니 어찌 살아가야 할고. 내 모든 보좌를 잃었구나" 하며 통곡하였다. 그 사랑의 마음이 얼마나 애통하였을까. 태조는 직접 지금의 안암동에 나아가 신덕왕후의 능 자리를 찾았다. 그러나 물이 나와 적절치 않음으로 사랑하는 신덕 왕후를 더이상 멀리 묻을 수는 없어 경복궁에서 가까운 지금의 정동 자리에 흥천사를 세우고 왕후의 능을 조성하여 정릉이라 하였으며 그 곁에는 자신이 묻힐 수능까지도 미리 조성하여 놓았다.
방웜의 부상
이성계는 신덕왕후를 너무나 사랑했던 나머지 그 소생의 막내 아들 방석에게 왕위를 물려 주고자 하였었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에게는 이미 향처인 한씨가 있었고 장성한 아들 다섯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다섯째 아들 방원은 려말의 충신으로서 마지막까지 조선 왕조 에 저항하였던 포은 정몽주를 심복 조영규를 시켜 선죽교에서 처단하고 마지막 고려 세력을 일소 하는등 부왕을 도와 조선의 개국에 혁혁한 공을 세웠었다.
방원은 왕자로서 유일하게 대과 그것도 문과에 급제하였으므로 그는 지략과 무도가 뛰어났었다. 하지만 그가 과거에 급제 하기까지는 사가로 말하면 작은 어머니였던 신덕 왕후의 도움 또한 컸다 한다. 신덕 왕후는 첫째 부인 소생인 방원의 그릇을 알아보고 그를 키웠던 것이다. 그러나 방원은 다섯째 아들이니 왕위에 오를 기회는 처음부터 없는 것이었다. 부왕 이성계가 혼미하여 어린 이복 동생 방석을 왕위에 앉히려 하자 방원은 이에 불복하여 제1차 왕자의 난이 발생 하였다.
1차 왕자의 난을 통해 이방원은 자신의 신권 안존을 위해 방석을 건의한 정도전과 이복 동생인 신덕 왕후 소생 방번과 방석을 죽였다. 적장자 상속 원칙에 따라 첫째 아들이 왕위를 이어야 하나 그는 정권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보며 왕위를 거절 하였다. 방원의 정략으로 왕위에 오른 둘째형 정종 방과가 후사 없이 죽자 친형제간에 다시 권력 투쟁이 발생하였다. 1차 왕자의 난 논공 행상에 불만을 품었던 박포가 방원의 바로 윗형인 네째 아들 방간을 옹위하여 난을 일으키니 방간과 방원의 사병 군대가 개경 일원에서 접전 하였다. 방원의 군대가 승리하여 박포는 처형하고 방간은 유배 보냈으니 이것이 2차 왕자의 난이다. 이후 방원은 실권을 장악하고 드디어 1400년 11월, 3대 태종으로 즉위 하였다.
이성계의 통한과 그리움
방원은 왕위에 오르자 작은 어머니인 신덕왕후의 능이 경복궁의 눈앞에 있는 것이 보기싫어 지금의 정릉으로 이전하였다. 당대 세력가인 하륜등은 정릉의 울창한 나무들을 베어내 자신들의 저택을 짓기도 하였다. 자식들간의 피비린내나는 권력 다툼에 세상이 싫어져 함흥에 물러나 있던 태조 이성계는 사랑하는 신덕왕후의 능이 초토화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애통의 눈물이 그칠줄을 몰랐다. 그토록 신덕 왕후를 그리워하고 잊지 못하던 이성계는 서로 떨어져 동구능의 건원릉에 묻혀 영원한 그리움에 지금도 젖어 있다.
태종의 등극
세제로 책봉된 방원은 병권을 장악하고 동시에 중앙 집권의 틀을 다져 나갔다. 그 일환으로 사병을 혁파하고 군사를 삼군부로 집중 시켰으며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고쳐 정무를 담당하게 했고 중추원을 삼군부로 고쳐 군정을 맡도록 했다. 이처럼 방원은 세제 시절에 이미 왕권 안정책을 마련하고 고려 정치문화의 잔재들을 없애기 시작했다. 정무와 군정을 분리 시켰으며 권문세가의 힘을 약화 시키기 위해 노비 변정도감을 실시해 노비의 변속을 관리 하기도 했다. 그리고 1400년 11월 마침내 정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 제3대 왕으로 등극하였다.
태종 이방원의 정치
그는 전술한 바와 같이 왕자의 신분과 별도로 문과에 급제한 수재였으며 머리가 똑똑하고 무인의 기상까지 겸비하였으니 비록 형제간의 비극적 상잔 후에 등극 하기는 하였지만 일국의 왕재로서는 손색이 없었다. 태종의 연간에 중앙 부처와 지방 통치제도의 정비가 완전히 이루어져 비로소 고려의 잔재를 완전히 청산 하였다. 또한 군사 제도를 강화해 국방을 튼튼히 하고 국가 재정 안정을 위해 조세 제도를 정비 하였다. 노비제를 정비하고 신문고를 설치 하였으며 과거 제도를 통해 능력 위주로 관리를 등용토록 하였다. 그 외에도 수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일시 개경으로 옮겼던 수도를 다시 한양으로 옮겨 조선의 기초를 확고히 하였던 왕이다. 태종의 치적이 있었기에 아들 세종의 시대가 꽃피울수 있었다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는 모든 피를 자신의 손에 묻히고 아들에게는 더이상 어려움을 주지 않아 성군이 되는 길만을 바랐던 것이다.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애증
원경왕후 여흥(여주)민씨는 여흥 부원군 민제의 딸로서 고려 말에 방원과 결혼하여 방원이 왕좌에 오르기 까지 많은 공을 세웠던 부인이다. 특히, 1398년 8월에 몸이 불편한 태조곁에서 다른 왕자들과 당직하고 있던 남편 방원을 정도전이 습격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남편에게 시급히 주의를 환기시켜 선수를 치게 하였다. 이 정보에 의해 방원은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였다. 왕자의 난 10일 전에는 정도전이 왕자군을 혁파하여 무기를 불태울때 원경왕후는 몰래 무기들을 은닉 하였다가 거사 직전에 방원의 군사에게 지급하여 거사가 성공토록 돕기도 하였다.
이렇게 남편의 태종 등극에 많은 역할을 했지만 등극후 측실 들만 가까이 하니 원경 왕후는 심한 질투심을 드러내 태종과의 사이에 불화가 그칠날이 없었다. 드디어 태종이 선위를 표명하자 왕비 민씨의 동생인 민무구, 무질 형제는 어린 세자 양녕을 통해 이른바 협유집권, 즉 어린 세자 틈에 끼어 집권을 획책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게 된다. 그러나 물론 진짜 원인은 태종과 원경왕후 사이의 불화였다. 원경왕후의 권세를 믿고 활개를 치던 민씨 형제들은 불만을 품게 되고 태종이 선위할 뜻을 비치자 세자인 양녕을 찾아가 그런 불만을 토로한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태종은 민무구 무질 형제를 자진케하고 형들의 억울 함을 호소하는 그 동생들 무휼 무회 까지도 사사 시켰다.
원경왕후는 그일로 태종에게 불손한 행동을 계속해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날 처지에 직면하기도 했지만 태종은 세자와 왕자들에게 끼칠 영향을 생각해 끝내 그녀를 폐비 시키지 않았다. 원경왕후 민씨는 1420년 56세를 일기로 죽었다. 민씨는 4남 4녀를 낳았으며 양녕, 효령, 충녕, 성녕 등의 왕자들과 정순, 경정, 경안, 정선 등의 공주가 그녀의 소생이다. 왕권의 강화를 위해 많은 후궁을 늘여 나갔던 태종은 생전에 비록 애증이 교차하였지만 부인의 사후에는 같이 묻히기를 원하여 원경왕후의 능은 헌릉으로 태종의 능과 함께 쌍을 이루며 현재 서울 강남구 내곡동에 소재해 있다. <운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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