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illy의 한국사 이해

한민족이여, 92년전의 3.1절 그 함성 그 절규를 정녕 잊었는가 (3)

Billy Soh 雲 響 2011. 2. 26. 01:17

3.1절 노래

 출처 http://blog.daum.net/kingkang2580/63

 

한민족이여, 92년전의 3.1절, 그 함성 그 절규를 정녕 잊었는가

 

3.1 운동에서 물론 유관순의 활약과 비극을 간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유관순은 천안군 목천면 지령리의 기독교 집안에서 1902년 3월 5일 태어났다. 이화학당의 학생이었던 유관순은 의협심이 강한 소녀였다. 3월 1일, 전교생을 인솔하여 만세운동에 참가하려 하였으나 학교당국에 의하여 이를 제지 당하자, 15명의 측근 동지 소녀들과 함께 학교 뒷담을 몰래 넘어가 시위 운동에 참가 하였다. 휴교령에 따라 더이상 학교에 등교 할 수 없게되자 유관순은 고향으로 내려왔다.

 

고향 천안에서는 아직 만세 운동의 불길이 오르지 않은것을 놀라와 하며 오빠와 동지들을 규합하여 거사 준비에 들어갔다. 4월 1일을 거사일로 잡았다. 거사일 고향의 뒷산에서 봉화를 올릴때 그 신호를 보고 3천명 가량의 군중들이 장터로 모여 들었다.

 

                                                         유관순의 원래 모습

 

유관순 체포 이후 모습(당시 17세)

 

조인원이 군중앞에 나서 선언서를 낭독하고 공약 3장을 읽은후 독립만세를 불렀다. 장터에 모인 군중들도 모두 만세를 부르며 선도자를 따라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때 들이 닥친 일본 경찰들이 군중들을 향해 닥치는대로 총을 쏘고 칼로 내리쳤다. 이것을 보고 격분한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은 "왜 평화적 시위에 마구 사람을 죽이느냐"고 항의하자. 살기가 등등한 헌병은 항의하는 그를 한 칼에 내리쳐서 쓰러뜨렸다. 이렇게 시작한 헌병과의 충돌로 아오내장터는 순식간에 피바다를 이루었다.이때의 사망자는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씨등 19명이었고, 부상자는 적어도 30여명이나 되었다.

 

일제의 경찰에 체포된 유관순은 먼저 천안 헌병부대 유치장에 갇힌채 10여 일동안 고문과 취조를 받은후,공주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그녀는 1919년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초심을 받고 불복, 공소하여 6월30일에는 병천시위의 주동자 조인원 등과 같이 3년 언도를 받았다. 3년 언도를 받은 유관순은 또 다시 서울 복심 법원으로 상고 하였다. 그는 법정에서 재판장에게 의자를 내던지며,"나는 조선사람이다. 너희들이 우리 땅에 와서 죄없는 우리 동포를 수없이 죽였으니, 죄인은 내가 아니라 바로 너희들이다. 그런 너희가 어찌 나를 재판 하겠단 말이냐? 당치도 않은 수작은 집어 치워라 하고 호통을 치며 대드는 바람에 일본인들에게 극도로 미움을 사 법정 모독죄로 4년이 추가되어 7년 언도를 받았다. 그래서 다른 동지는 다 공주로 내려갔지만, 그녀는 혼자 서대문 감옥에 남게 되었다.

 

1920년 3월 1일, 3.1운동 1주년이 되자 또 다시 감옥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유관순도 여기에 참가하여 만세를 부른후 벌겆게 달군 인두로 지짐을 당하고 손톱을 뽑히고 물고문 전기고문 등 인간으로서 견딜수 없는 모진 고문을 받았다. 그리하여 유관순은 끝내 고문과 매맞은 독으로 인해서 소생하지 못하고, 1920년 10월 12일, 꽃다운 17세를 일기로 옥사하였다. 그녀의 유언은 "일본은 망한다. 절대로 망하고야 만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죽자 형무소에서는 그 시체를 몰래 처치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를 후에 탐지한 이화학당 교장 미쓰 프라이오가  형무소로 찾아가 그 시체를 요구하였다. 처음에는 그의 참혹한 형체를 보고 소동이 일어날까봐 내어주지 않으려 했으나,만일에 내어주지 아니하면 외국에 알려 세계 여론에 호소하겠다고 하자,마지막에는 어쩔 수 없어 내어주었다. 그래서 시체를 가지고 돌아와 정성껏 수의를 장만해서 동강난몸을 맞추어 입히고, 새벽녘에 유관순이 다니던 정동교회당으로 가 조용히 장례식을 마친후,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하였다. 이렇게 해서 우리나라 독립 제단위에 17세의 처녀 유관순은 아낌없이 그의 몸을 바치게 된 것이다.

 

3.1 운동중 목숨을 아끼지 않고 조국 독립을 위해 만세 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일제의 잔혹한 고문에 몸이 찢기고 숨져간 애국 열사들이 수없이 많지만 제암리 교회의 사건 만은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사건은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가던 당시,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제암리교회에서 일어난 학살사건이다. 제암리교회

청년들과 천도교 김상렬 등을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은 4월 5일 만세시위를 결의하고 발안주재소 앞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

쳤다. 이에 당황한 일본 경찰은 무력으로 진압했으며 마을 사람들은 밤마다 봉화를 올리고 만세시위를 했다.

 

만세시위가 있은지 10일 후인 4월 15일 일본의 육군 중위 아리타 다케오 有田俊夫를 중심으로 한 일본헌병들은 4·5만세

시위시 일본군이 주민들에게 행한 만행에 대해 사과하겠다며 15세 이상의 남자들을 제암리교회에 모이게 하였다. 주민들

이 모이자 그들은 총격과 함께 교회당 문을 걸어잠그고 불을 질렀다. 밖으로 빠져나오려는 사람들에게는 무차별 사격을 가했으

며 남편을 살려달라 애원하는 아낙 2명의 목을 베었고 제암리 마을 32가구에 불을 지르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어찌 잊으리요.. 인륜의 도를 넘은 저들의 만행을..

세월이 아무리 흐르고 세상이 변하여 서로 협력하여야 할 시대가 되었다 해도 지난일을 망각해 버리는 민족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학습 곡선을 모르는 그런 단순한 민족에게는 기필코 찢어지는 역사가 다시 돌아올 것이다. 웃고 협력 하지만 가슴엔 칼을

품고 힘을 길러야 한다. 세상에 어느나라 어느 다른 민족을 믿는단 말인가.

 

그러면 이제 3.1운동의 피해결과및 의의살펴 보자.

일제의 발표에 의하면, 들불처럼 휩쓸었던 독립 만세 시위 운동은 총 1,542회를 기록하였으며, 참가 인원은 202만3,089명,

사망 7,509명, 부상 1만,5961명, 검거당한자 5만2,770명, 불탄 교회, 47개소, 학교 2개교, 민가 715채나 되었다. 이와

같은 전 민족의 독립 운동은 비폭력 평화 시위로서 일제의 잔인 무도한 무장과 고문 탄압으로 억을 하게도 목적인 독립을 이루어

내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세계 만방에 한국 민족의 확고한 독립 의지를 분명히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근대 민족 운동의 효시를

이루었다. 이러한 한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정과, 불의 앞에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항거하는 불굴의 정신은 세계인들을 놀라

게 하였다. 이는 한국인들이 소중히 여기는 자유와 평등 사상을 불길 처럼 분출한 민족의 의거였으며, 이후 대한 민국 임시정부

가 수립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우리의 조국이 자주 독립 국가임을 선포하므로서 민족의 강력한 독립 의지에 대하여

세계의 국가들이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토록 엄청난 희생을 치루며 일제의 침략과 가혹한 통치에 두려움을 모르고 항거하였던 민족의 위대한 투쟁사를 오늘의 많은

학생과 젊은이들은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누가 이들을 이렇게 가르쳤단 말인가. 더구나 언제부터인지 3.1절 노래도 듣기가

어렵게 되었다. 숨막히게 빨라진 디지털 문명, 풍요로운 의식주, 외모 지상주의와 물결치는 패션, 악을 쓰며 국가를 비난하고

국가 공권력인 국민 경찰에게 죽창을 찔러대며 행진해도 아무도 제지하기 어려운 자유와 절제 없는 방종의 문화 속에서

3.1절의 의미를 찾는것은 곰팡이 냄새가 나는 풍조라는 말인가. 이 좋은 세상에 무슨 케케묵은 옛날 얘기를 하냐는 것인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영혼을 잃어 버린 민족의 목줄기에는 머지 않아 또다시 단칼이 들어올 것이다. 역사는 공짜를 허락

하지 않는다. 세대를 돌고 돌아와 다시 엄격하고도 냉혹하게 한 세대가 해이했던 댓가를 피눈물 나게 요구할 것이다. 역사

에는 피하려도 피할 쥐구멍이 없다. 정신 차려서 자손들을 가르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우리의 아들 딸들의 피가 강물을

이룰 것이며, 찢기운 사지가 산을 이루는 날이 언젠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계속)            <운향>

 

 

 

                                             제암리교회에 있는 23인에게 불을 지르고 총질을 가하고 일본군
                                                        출처  http://boomup.chosun.com/si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