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1운동 당시 종로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있는 시민들
출처
http://blog.daum.net/jjkkss6944/687
한민족이여, 92년전의 3.1절, 그 함성 그 절규를 정녕 잊었는가
이제 3.! 운동의 경과와 결과에 대하여 고찰해 보겠다.
일본 제국은 한일 합방으로 우리나라를 꿀꺽 삼켜버렸다. 독사가 개구리를 삼키듯이.. 그러나 우리는 아무런 힘도 없이 당하고 말았으니 그 가슴 찢어지는 비통한 심경이야 필설로 표현할 수가 없었을것이다. 거기에 조금이라도 항거하거나 계몽하려 하기만 해도 무자비한 기마 헌병 경찰의 말발굽으로 짓밟고 총칼로 내리 쳤으니 그 하늘을 찌르는 분노의 열기는 이미 곧 터질듯 압력을 받아가고 있었다.
그 탱천한 분노에 불을 붙이고 용기를 준것이 바로,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 제안이었다. 1차 세계대전 종결을 위한 파리 강화 회의에서 윌슨은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 스스로 결정하여야 한다는 원칙을 발표하였으니, 일제의 잔혹한 탄압에 맞서 투쟁해오던 항일 투사 들에게는 그보다 더 용기를 주는 말이 없었다. 각 종교계의 대표들로 구성된 조직적인 항거는 일시에 밀물처럼 터져나와 독립의 함성이 전국으로 불길처럼 퍼져 나가게 되었다.
그렇게 분위기가 고조되어 가는데, 마침 고종황제가 승하하였다. 나라를 빼앗기고 강제 퇴위당한 울분에도 나름대로 인내하며 건강을 지켜왔던 고종이 갑자기 승하한 것이다. 이에 앞서 고종은 이회영을 시켜 망명 계획을 준비하던 중이었다. 망명후 일제의 한일 합방이 무효임을 만천하에 선포하고 국민을 궐기 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를 눈치챈 일제가 비밀리에 고종을 암살할 계획을 추진 하여 이왕직의 총 관리인 장시사장 남작 한창수와 그의 심복인 시종관 한상학을 매수하여 시기를 엿보고 있었다.
일제에의해 엄청난 금품과 부귀를 하사 받았던 그 두사람의 주구는 밤중에 고종 황제에게 진찬(자리끼)을 올리는 궁인을 매수하였다. 1919년 1월 20일 밤, 한창수와 한상학 그리고 궁인은 독약을 탄 식혜를 고종에게 올렸다. 그 식혜가 비탄의 최후 운명이었음을 황제께서 어찌 아셨으랴. 마시자 마자 고종 황제는 전신이 파멸되어 쓰러져 절명 하시었다. 그날밤의 덕수궁 함녕전 숙직은 1급 친일파 이기용이었다. 일제의 치밀한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악독한 패륜의 거사후 이 궁인은 사라지고 말았으니 비밀을 누설치 않게 하려고 일제에 의해 처치된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일제가 그렇게 극비리에 자행했던 이 사건도 어디론가 새나가 이미 국민 일반에도 고종 황제께서 암살 당했다는 소문이 흉흉하게 퍼저나가고 있었다. 마침 고종의 인산일(국장)이 3월 3일로 잡히자 손병희를 대표로하여 천도교 기독교 불교의 지도적 인사들로 구성된 민족대표들은 군중들이 모여들 이 시기를 기해 거사하기로 하였다.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 선언서와 한용운이 기초한 공약 삼장을 인쇄 하는 일은 거사의 성패를 가름하는 중요한 임무였다.
3·1운동이 시작되기 이틀 전인 2월27일 밤. 비밀리에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있던 천도교 인쇄소 보성사(현재 조계사 뒷편 홰나무가 있는곳)에 갑자기 신철이 나타났다. 그는 독립 운동가(그들이 말하는 사상범)를 체포하고 고문 취조하는 종로 경찰서 고등계의 조선인 형사로서 인쇄기 돌아가는 소리에 냄새를 맡고 들어왔던 것이다. 그는 인쇄 현장을 보고나서 말없이 나갔다. 천도교 중진 최린은 황급히 사람을 넣어 그를 만나 당시 거금인 5천원을 내놓으며 비밀유지를 당부했다. 생각에 잠기던 신철은 돈을 거절한뒤 사라졌다. 그는 그 길로 상사에게 신의주 출장보고를 하고 떠나버렸다. 후에 일경은 그를 체포했지만 그는 체포되자 마자 준비하고 있던 청산가리를 마시고 자결했다. 신철은 악랄한 고등계 형사로 살았지만 그의 최후 침묵으로 3·1운동이 성공 할 수 있었던 것은 민족사의 아픈 에피소드이다.
1919년 2월 27일 밤까지 이렇게 인쇄된 2만 1천장의 독립 선언서는 비밀 조직을 통하여 전국 각지에 배포 되었다. 거사 결정일인 3월 1일 낮 열두시, 손병희를 비롯한 민족 대표 33인은 파고다 공원에 모여 독립 선언서를 낭독한후 인쇄물을 뿌리고
시위 운동에 들어가기로 결정 하였다. 그러나 운집한 학생들과 일본 경찰의 무력 충돌을 피하기 위해 거사 당일, 민족 대표 모임 장소를 인사동의 태화관으로 변경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 모인 민족 대표는 한용운이 독립 선언서를 낭독한후 전원 만세 삼창을 부르고 태화관의 주인 이었던 안순환으로 하여금 종로 경찰서에 전화 통보토록 하였다. 즉시 출동한 경찰에 의해 민족 대표 전원은 자진 체포당하였다.
그때 태화관에 인접한 파고다 공원에서는 5천명 이상의 학생들이 운집하여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부르며 종로 거리의 시위에 나섰다. 그들 학생들을 따라 수만의 시민들이 동참하여 종로 거리를 행진 하였으니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는 군중들의 함성과 열기는 천지에 진동 하였다. 출동한 일제 기마 경찰이 짓밟고 체포하였지만 불타 오르기 시작한 독립 만세의 경천 지동을 이미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만세 운동은 삽시간에 전국적 으로 퍼져나가 저녁 무렵에는 진남포, 선천, 안주, 의주, 원산, 함흥, 대구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으며, 다음 날에는 전국 각지에서 독립 만세 소리와 가두시위가 일어났다. 학생들은 휴교하고 상인들은 가게 문을 닫고 철시하였으며 노동자들은 파업으로 관리들은 퇴직으로 항거하였다.
비무장 비폭력 평화적으로 시위하는 군중을 향해 일제 경찰은 무자비한 총검 공격을 감행해 수많은 시위 군중이 학살, 부상, 투옥 되는 참극이 눈앞에서 벌어졌다. (계속) <운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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