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번군의 경우 기원전 108년에 세워져 기원전 82년에 폐지된 것으로 후한서에 나와있으며, 현도군 역시 기원전 75년에 그 위치를 옮겼다. 임둔군은 언제 폐지되었는지 조차 분명하지 않는데 대체적으로 진번군과 같은 시기에 폐지되엇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와 같이 짧은 시기에 행정관을 파견하여, 실효적인 지배를 하기란 대단히 힘들다. 전쟁에서 분명한 승리를 거두었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앞서 본봐와 같이 고조선과의 전쟁은 결코 승리한 전쟁이 아니었다.
중국이 실질적으로 지배하지 않았으면서도, 마치 자신의 영토인 것처럼 이름만 봉한 예는 매우 많다. 발해가 그렇고 신라나 후백제등, 우리나라는 물론 동북아 일대 수차례 등장한다. 그것은 말 그대로 중국과 봉건관계를 맺은 것 뿐이지, 영토적, 주권적 지배와는 무관하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이 낙랑이다. 낙랑은 기원전 108년부터 서기 37년까지 상당기간 역사에 등장하며 고구려, 백제, 신라등과 다양한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고구려 대무신왕에 의해 멸망당할때 역시, 중국에서 파견된 태수가 아니라 낙랑국 왕 최리가 통치자 였다. 이와 같은 기록을 볼 때 낙랑국은, 과거 중국과의 화친을 주장했던 주화파가 정권을 잡고, 처음에는 郡호칭을 쓰다 점차 國의 호칭을 쓰고 독자적인 세력으로 발전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이상으로 한사군의 설치와 구성에 대해 간략하게 나마 살펴 보았다. 비록 고조선은 내부 갈등으로 인해 멸망하엿지만, 그것이 한나라의 직접적인 지배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다만 중국과 봉건관계를 맺었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민족이 고대때부터 분열과 반목을 일삼았던 민족인가라고 보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 어느나라 어느시대에서나, 전쟁에 대한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경우 화친책을 도모하기 마련이다.
더구나 고조선은 한나라에 맞서 1년이상 최선을 다해 싸웠다. 전쟁을 통해 한나라에게 승리를 하였다면 더욱 좋았겠지만, 친중국 정책을 폈던 주화파 역시 중국의 실효적 지배를 막고, 우리민족이 다시 힘을 기를때 까지 시간을 벌어 주었다는 면에서 나름대로의 의의는 있을 것이다. 결국 한사군은 단지 이름뿐인 지명이었으며, 고조선이 멸망한 후에도 그곳을 지배하고 영위하였던 것은 우리민족이었다.
다음으로 중요한것은 한사군이 어디에 있었는지 그 위치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한사군이 한반도의 평안도 지역에 있었다고 배웠다. 이병도 씨가 쓴 '조선사대관' (동지사, 1948)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리고 한사군의 중심인 낙랑군은 평양지역에 있다고 한다. 낙랑군의 위치는 고조선사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낙랑군의 위치를 알 수 있게 하는 아주 중요한 단서가 '사기'와 '태강지리지'이다.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는데, 장성이 시작되는 지점이다”라는 구절이다. 따라서 수성현과 갈석산이 어딘가를 찾으면 낙랑군의 위치를 알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병도씨는 '한국고대사연구'에서 수성遂城에 대해 “맹랑하지만 황해도 수안遂安으로 본다”고 했다. 자신도 얼마나 소신이 없었으면 그 글에다 ‘맹랑하지만’이라고 썼다. 그리고 그 근거는‘수’ 자가 같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중국 지명에서 ‘수’ 자 같은 지명 찾으면 백 개 이상 나온다. 그런데 갈석산이 없으니 그냥 근처에 산 하나를 ‘저것을 갈석산이라고 했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황해도 수안이 수성현이 됐고, 만리장성이 여기서 시작됐다는 것이다. 그러니 요즘 중국박물관에 가면 만리장성이 한반도 황해도까지 내려와 있다. 그 이론 제공을 우리 사학계가 한 것이다.
실제로 수성현과 갈석산은 중국 하북성 창려현에 있다. 그 지역은 바로 만리장성의 동쪽 끝인 산해관하고 아주 가까운 지역이다. 또 '수서'에 '수성현이 현재의 창려현'이라는 구절이 있다. 모든 부분이 다 사실로 맞아떨어진다.
또 하나의 근거로, 수나라 양제가 고구려 평양성을 침공할 때 좌군 12군, 우군 12군을 나눠서 진격로를 제시해주었다. 그 진격로에 이 사군 이름이 거의 다 나온다. 낙랑이 평양에 있다고 하면 수양제가 북경 북부 탁현에서 24군을 출발시키면서 ‘너는 낙랑을 거쳐서 낙랑으로 와라’고 하는 셈이 된다. 당시에 공수부대가 있었나. 앞뒤가 안 맞는 얘기이다. 결론적으로 중국 고대 기록들을 봐도 낙랑군 지역은 현재의 하북성 창려현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한사군이라는 것은 난하 근처 산해관 일대, 고조선 서쪽 끝자락에 일부 형식적으로 만들었을 수는 있지만 한나라가 고조선의 영토를 거의 차지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당시 고조선 수도는 어디였는가? 흔히 고조선이 멸망할 때 수도가 대동강 근처 평양이었고, 위만이 쳐들어오자 고조선의 준왕이 남쪽으로 도주해서 마한의 왕이 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준왕의 도주로를 기록한 중국 기록을 보면 ‘주입해走入海’라고 쓰고 있다. 즉, 달려서 바다로 들어갔다, 해로로 도주했다는 뜻이다. 그러면 수도가 평양에 있었다면 충청도나 호남지역으로 도주할 때 배로 도주하겠는가. 이 곳은 배를 부려서 도주하는 것보다 육로로 가는 게 훨씬 빠른 지역이다. 그러나 요동반도는 지형이 상당히 험하므로 해로로 도주하는 게 훨씬 유리하다.
고조선 왕검성의 위치를 추적해볼 수 있는 또 다른 단서로, 중국 고대 지리서 중에 왕검성에는 패수가 흐르는데, 패수는 동남쪽으로 흘러서 동쪽 바다로 빠진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데 평양부근 대동강은 서해로 빠집니다. 이것도 안 맞는 것입니다. 고조선은 멸망할 당시까지도 한반도가 아니라 요동반도에 있었던 것입니다.
한민족의 기원은 북방에서 내려온 예맥족이며 그들은 능숙하게 말을 다루며 용맹한기마민족이었다. 그들이 한반도에 같히게 된건 불과 천몇백년 밖에 안된 기간이다. 그보다 몇 배 더 긴 기간동안 우리 민족은 내몽고 일대를 다 포함한 만주대륙의 주인이었고 역사를 펼쳐나간 무대였다. 고조선은 당시의 우수한 기마민족으로서 저렇게 광대한 지역을 영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고조선에서 부여가 나오고 부여에서 고구려가 나왔다. 그래서 고구려의 벽화를 보면 다 기마무사들 아닌가.
우리 민족은 해방으로 일제의 압박에서 벗어난 후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 그 동력은 바로 우리 민족 내부에 내재해 있는 대륙성과 해양성, 기마민족성이 발휘되었기 때문이다. 그 힘찬 신바람으로 전쟁의 폐허 속에서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면서 이만큼 나라를 일구었던 것이다. 민족의 역사 속에서 기마 민족의 기질이 발휘 되지 못하고 한반도내에서 내부 투쟁하는것은 민족의 위축과 패망을 불러온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밖으로 밖으로 진출해야 한다.
고구려의 기마 무사도
고구려 기마무사 고구려의 기마 무사들은 비늘 갑옷과 투구 차림에 창, 도검 등의 무기를 들고 전쟁터에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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