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illy의 한국사 이해

고조선, 위대한 대륙의 지배자 - 1

Billy Soh 雲 響 2010. 7. 2.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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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은 제후국을 거느린 황제국가였다. 중국 사료 후한서, 동이열전, 예조에, '예군 남녀 28만 명을 들어서 항복했다'는 기록이 있다. '예'는 나라를 뜻하고 군은 군장을 뜻한다고볼수 있다.  즉 고조선은 예라는 나라를 속국으로 거느린 황제 국가라는 의미이다. 예의 인구가 28만 명이었다고 보고있다.


초등학교때 배운 우리나라의 역사에 따르면 고조선은 평안도 일대에 걸쳐있는 작은 나라에 불과하다. 그런데 고조선과 한나라와의 전쟁에 대한 기록을 보면 상당히 의문스러운 구절들이 많다. '한서'에  조한 朝漢 전쟁은 고조선이 한나라에 조공 바치러 가는 여러 나라를 못 가게 막았기 때문에 전쟁이 시작됐다고 한다.  고조선이 만일 현재의 평안도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면 어떻게 만주나 그위 북방의 다른 민족들의 조공길을 막겠는가? 전제 자체가 틀린 것이다. 

 

우리민족은 고조선과 고구려 및 발해가 멸망한 후, 수없는 세월동안 중화 사상의 사대주의에 물들고 거기에 일제의 침략으로 식민 사관에 또다시 마취되어 민족의 근원과 자존의 역사를 통째로 잃어 버렸던 것으로 생각한다. 한민족의 역사는 중국과 일본에 의해 조작되고 왜곡 축소되어 중국에 부속된 변방 의 한지방역사, 일제에 의해 날조되어 고대로 부터 일본민족의 통치를 받았으며 자율성이 부족하고 뭉치지못하고 분열만 하여 타 우수한 민족의 지도와 통치를 받지 않으면 않되는 민족으로 비열하게 조작 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노예사관의 영향을 받고 한국사 교육을 주도했던 자들의 전적인 영향으로 우리는 제대로 확립된 예백족-한민족의 역사를 배울 기회를 상실했던 것이다. 이제 조상님들의 웅지와 용맹성을 우리들의 가슴속에 다시 회복하여 바르게 알고 후손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에 일천한 지식으로 선학들의 논지를 고찰해 보고 싶다.

 

우선, 한사군의 설치와 전개 과정은 한민족의 역사를 반도내에 칩거해 버리도록 축소 조작한 효시가 되었다고 생각한다.그러나 기존에 알아왔던 그 역사는 많은 허구성을 내포하고 있다.

 

고조선과 한나라의 전쟁이 본격적으로 일어난 것은 기원전 109년의 일이다. 당시 한나라는 5만명의 수륙양군을 동원하여 고조선을 침범하였지만, 전쟁은 1년이상 전개되었다. 그러나 한나라는 이 전쟁에서 결코 승리하였다고 할 수 없다.  한나라는 고조선의 도성인 왕검성을 점령하지도 못했고, 고조선의 마지막 왕인 우거의 항복을 받지도 못하였다. 우거왕은 단지 중국과 화친하자고 주장하는 참등에 의해 살해 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여기에 반발하던 대신 성기成己역시 로인路人의 아들 최와 우거왕의 아들 장등에 의해 모살되었다.반면 고조선에서 한나라에 항복한 사람들은 전부 제후로 봉함을 받았다. 그리고 제후로 봉함 받은 지역이 산동반도에서부터 위쪽에 이르는 지역들이다. 왜 고조선에서 한참 떨어진 이 쪽 지역을 봉토 封土로 주었는지 생각해 볼 문제아닌가. 

 

따라서 고조선을 멸망시킨 것은 한나라의 군사력이었다기 보다는, 친중국 정책을 주도하였던 주화파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사마천의 사기 기록을 살펴보면, 고조선 원정은 사실상 실패하였음이 더욱 분명하다. 우선 수군사령관이었던 누선은 극형을 간신히 면하고 서인으로 강등되었으며, 육군을 지휘하였던 총 사령관 순체는 참수되어 저자거리에 시신을 내다 버리는 가장 무거운 형벌을 받았다.  또한 화친책을 추진하였던 위산이란 인물조차 참형에 처해졌다.
가장 마지막으로 침략을 주도하였던 요서지방의 토착세력 공손수역시 참형을 당하고, 전투에 참가하였던 어떠한 장수도 승진한 기록이 없다.  이것은 단순한 원정실패가 아니라 패전의 책임을 물은 것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한나라는 기존 고조선 땅에 한사군을 세운것만은 분명하지만,  행정적, 실효적 지배를 하였다고는 볼 수 없다. 더구나 한사군의 성립조차 단지 서류상으로만 존재할 뿐이지, 실질적으로는 중국의 행정범위에서 벗어난 완전히 독자적인 세력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중국 중심 역사인 사마천의 사기에도 한사군을 설치하였다는 기록만 있을뿐,  구체적인 이름이 거론되고 있지도 않다. 사마천이 편찬한 사기니 만큼 최대한 중국의 입장을 반영하였을 책인데,  이와 같은 책에서도 이름조차 거론되지 않았다는 것은, 역시 그곳이 중국의 영토가 아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랑, 진번, 임둔, 현도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나오는 것은 한서 무제본기때 부터이며, 한편 한서지리지에는 낙랑과 현도 2군만 나오고 있다.
 

이과 같이 동시대에 편찬된 책에도 내용이 제각기인 것은,  한나라가 행정관을 파견하지 않았음은 물론, 지명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즉 한서나 한서지리지 등에 나온 한사군 관련 기사는, 조공을 받친 나라는 모두 중국의 속국이라는 당시 중국천화관에서 서술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한사군은 사료상 단지 32년 동안만 존재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광개토태왕의 영토 확장

고구려 광개토태왕(391~412)은 18세의 젊은 나이로 왕위에 오른뒤 대규모 정복사업을 벌였다.  서쪽으로 후연을 격파하여 요동으로 진출하고 북쪽으로 거란을 남쪽으로 백제를 공략하여 고구려의 영토를 크게 확장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