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illy의 한국사 이해

민족의 기원과 예맥족의 남진이동 - 2

Billy Soh 雲 響 2010. 6. 23. 17:47

고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이 고인돌비파형 청동검이. 고고학적으로도 민무늬 토기인의 분묘인 고인돌, 석상분 石箱墳,독무덤의 분포는 만주나 한반도 및 산뚱 반도 지방에 미치고 있어 이들과의 관련을 말해 준다  고인돌은 중국 요녕성에서부터 우리나라 남쪽 흑산도에까지 같은 형식의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다. 이는 같은 내세관, 같은 문화권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산뚱반도에서도 한두 점 발굴됐는데, 화하족이라고 불리는 중국민족이 사는 지역에서는 단 한점도 나오지 않고 있다.
 
그리고 비파형 동검은 고조선식 동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는 흔히 우리나라의 모든 문명은 중국에서 들어왔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청동기나 철기시대에도 모두 중국에서 왔을 것이라는 전제하에서 교과서를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청동은 주석과 아연의 합금인데, 우리나라 청동검에는 아연이 상당히 많이 들어있다. 아연은 섭씨 7∼8백도에서는 날아간다. 그런데 청동검을 만들려면 섭씨 1200도씨 이상 가열을 해야 한다. 그러니 당시에 청동기에 아연을 섞는다는 것은 굉장히 고난도의 기술이었다.
 
우리나라 청동기 유물에는 아연이 20∼30%씩 들어있다. 반면 중국 청동기는 아연이 거의 함유되어 있지 않다. 중국에서는 아연을 합금할 기술이 없었으며, 고조선의 청동기술이 중국보다 뛰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비파형 동검은 중국지역에서는 전혀 출토되지 않는다. 이 비파형 동검의 출토지역이 바로 예맥족의 세력범위, 즉 고조선의 세력범위하고 아주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내몽고 지역에서도 비파형 동검과 거푸집이 발견되었는데, 비파형 동검을 만드는 그 거푸집 틀이 나왔다는 것은 그곳이 고조선의 중심지역 중 하나라는 걸 뜻한다. 지금으로 말하면 포항제철이나 광양제철과 같이 철생산의 중심지라는 뜻이다. 고조선의 청동 제조기술은 당시 세계 최고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청동기에서 철기로 발전하는데, 철기 제조기술도 우리가 아주 압도적으로 발달했다고 유추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국사 교과서에서는 철기는 위만이 갖고 온 것처럼 기술하고 있지만 고대 기록에 위만이 철기를 갖고 왔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출토된 유물들의 분포에 의해 중국 북부와 만주 대륙및 산뚱반도에 이르기까지 그 광활한 지역이 예맥족의 활동 주무대 였음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한민족의 조상인 이 예맥족이 왜 점차 남하하여 한반도 안에 갇히게 되었을까.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우리 조상들이 그 광활한 대륙을 지켜 냈더라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고구려만 하더라도 건국한 장소는 지금의 남만주인 집안시 지역이었지만 그들은 본래 그곳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아니라 시조인 주몽을 비롯한 건국세력은 그보다 훨신 북쪽지역인 북부여로부터 이주해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용맹성과 거침없는 정복 활동은 4세기에서 5세기초의 19대 광개토태왕대에 이르러 요동등 전 만주 지역을 장악하고, 한강 이북과 신라를 원조해 왜구까지 격퇴하였다. 더 나아가 고구려의 전성기였던 장수왕 대에 이르러서는 흥안령 일대까지 장악하여 동북아시아의 대 제국을 건설하게  되었다. 그러나 20대 장수왕은 후에 남하정책에 더 무게를 두어 수도를 남만주의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천도하고 북방의 대륙 제국건설 보다는 한반도의 장악에 더 무게를 두어갔던 것이다.  장수왕의 이 남진 정책이 예맥족 즉, 우리 한민족의 무대가 한반도 안에 갇히게 되는 자충수의 단초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후로부터 우리 한민족은 대외적 야망의 웅비보다는 한반도 내에서 치고박는 민족내부 투쟁의 역사로 변모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뿐만아니라 고구려와 함께 예맥족의 일파로서 부여의 후손이었던 온조는 세력다툼을 피해 남진하여 지금의 서울지역인 하남위례성에서 이끌고온 고구려 유이민과 토착세력을 규합하여 백제를 건국하였다. 4세기 중반 그 전성기인 근초고왕대에는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고 고국원왕을 전사케까지하였으나 그후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점차 밀려 한강유역을 포기하고 지금의 공주지역인 웅진성으로 남하 천도하였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버티기 힘들어 무령왕의 아들인 성왕대에는 지금의 부여지역인 사비성으로 더욱 남쪽으로 쫓겨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결국 660년에 백제는 나당연합군에게 멸망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오늘날...   

세계사적 관점에서 민족의 발전 방향과 각도에 대해 어떻게 설정되어야 할까. 삼면에 면한 대양으로의 진출과 대륙세력과의 사이에서 균형을 어떻게 잡아나가야 하나. 국가 지도부의 위치는 어느지점이 유리하고 향후 어느방향을 대망의 민족 웅비 벨트로 설정하여야 하나. 민족의 그 비젼을 위해 지금 생각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민족의 이동사는 말없이 그 치열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역사는 한치의 오차없이 돌고 돌아오며 그 역사가 주는 해답을 보고 듣는 눈과 귀가 멀었거나, 머언먼 미래를 볼수있는 선각자가 없고 눈앞의 일만 생각하며, 역사의 해답을 오만과 이기심과 편견으로 무시한 민족, 심지어는 소외 지역이나 계층을 생각하는 척하며 혼자 애국자인척 거짓포장하고 역사의식과 판단력이 약한 민중을 선동 미혹 기망하는 부랑자 무리들을 뭣모르고 인정해주는 민족에 대해 역사는 그 후손들에게 엄중하고도 피눈물 나는 댓가를 요구하게 될 것이다.      <운향제에서>

 

<현재 만주벌판의 끝없는 지평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