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5월 27일 오전 2시 45분, 큐우슈우 서쪽해역 203호 지점에서 연합함대의 순양함 시나노마루가 발틱함대의 병원선 아리욜의 조타를 발견했고, 뒤이어 발틱함대의 모습을 확인하고 4시 45분에 '203지점 적함 발견' 을 긴급 타전했다. 곧이어 시나노마루는 순양함 이즈미와 교대한후 적에게 발견되지 않고 이탈했다. 이즈미는 적의 위치 및 방향을 무선으로 연합함대에 통보했다.
시나노마루가 야간에 병원선을 발견한것은 병원선이 조타관제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발틱함대는 시나노마루가 무선으로 통보하는 동안에도 포격을 가하지 않았고, 전파방해도 하지 않았다. 강력한 무선기를 갖고 있던 우랄함장의 방해전파 발신허가에 대해 로제스트 벤스키는 허락치 않았다. 시나노마루가 야간동안 발트함대를 관측하면서 전파를 발신하는 동안 러시아 함대는 이들을 발견할 수 없었다.
5시 05분 한반도의 진해만에 대기중인 연합함대가 출항했다. 바다가 거칠었기에 원래 계획이던 기뢰작전은 하지 않고, 포격전 위주로 전투를 진행하기로 작전이 결정 되었다.
10시 최초로 달려온 연합함대 제5,6 전대가 발트함대를 확인했다. 11시 최초로 발트함대에서 위협포격을 가했고, 서로간의 포격이 벌어졌으나 전투상태로까지 번지지 않고 일정거리를 유지했다. 양쪽 모두 1발의 명중탄도 없었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 연합함대 기함 미카사 함상의 토오고 헤이하치로오 제독과 참모들
이때 일본 연합함대의 일부가 발틱함대 앞을 가로지르기를 몇번을 하여 발틱함대는 대열이 2열종대에서 3열종대로 바뀌었고, 순양함 함대는 후열로 밀리게 되었다. 13시 39분까지 연합함대의 모든 함대가 집결하고, 연합함대 주력 제1, 제2 전대가 좌현 남쪽에서 육안으로 발트함대를 확인하자 전투깃발을 내걸고 전투개시를 명령했다. 13시 55분 토오고는 연합함대 기함 미카사에서 Z기를 기양하라고 지시했다. Z기는 "황국의 흥망이 이 전투에 달려있다. 전 장병은 결연히 분발 노력하라"는 의미를 가진 신호기였다.
토오고 헤이하치로오의 기함 미카사호. 지금도 일본은 보존하고 있다.
14시 2분 침로를 남서로 정한 연합함대와 침로를 북동으로 정한 발틱함대는 반항로상에 있었다. 14시 3분 양측 함대의 거리가 11,000m까지 접근했다. 거리 8,500m 에 이르자 포술장교가 포격전의 사격준비를 우현으로 할것인지 좌현으로 할것인지 물었다. 어느덧 거리 8,000m가 되자, 토오고는 오른손을 높이 들어 왼쪽으로 반원을 그리는 모습을 보였고, 선두에 있던 기함 미카사는 크게 좌현으로 돌기 시작했다. 적 앞에서 대반전하는 일명 '정丁자전법' 혹은 '토오고 턴Tougo Turn' 이었으니 이것이 바로 아키야마 사네유키가 연구했던 이순신 제독의 학익진법의 전개였다. 임진왜란시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이 대결했던 한산대첩과 거의 유사한 형태의 전개였던 것이다.
즉, 종대로 북상하는 러시아 발틱함대를 대한해협에서 일본 연합 함대가 횡대로 가로막아 날개를 편 학의 모습으로 전개 하여 정확한 포격을 가하니 발트 함대의 종대진형은 여지없이 무너져 뿔뿔이 전력이 분산되고 각 전함이 도주하기에 급급하였다.
러시아 발틱함대는 전함, 순양함의 대부분이 침몰 혹은 나포당해 이 해전에서 대부분의 전력을 잃어버렸다. 격침 당한 러시이 함대는 전함 6척, 기타 10척으로 16척이었으며, 자침 5척, 나포 6척, 중립국 도피 6척, 자국항 도착 3척(순양함 오로라, 구축함 브라브이, 크로즈누이)이었다. 승무원 전사 4,830명이었으며 포로는 로제스트 벤스키, 네보가드프 두 제독을 포함하여 6,106명이었다.
러일 전쟁의 동해해전에서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러시아의 발틱 함대는 전멸 하였다. 겨우 3척이 살아 남아 블라디보스톡 항으로 도주에 성공 하였는데 그중의 한척이 위의 순양함 오로라호이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오로라호는 백년전에 건조되었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우수한 구조와 화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년 가까이 되도록 지구를 돌아 대한 해협에 도착 했을때 수병들은 기진 맥진하여 힘한번 써보지 못하고 일본 연함함대에의해 대 패전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坂の上の雲 (사카노우에노쿠모 / 언덕위의 구름)'을 읽고나서 상트 페테르 부르그를 여행 했을때 오로라 호를 보니 천지를 뒤집는 동해해전의 포성과 이비규환 전쟁의 비극 속에서 숨져간 수병들의 비명이 귀에 들리는듯 하였다.
한편 일본 함대의 피해는 경미했다. 함대 침몰 3척, 승무원 전사 117명, 부상 583명이었다.
대함대끼리의 해전임에도 불구하고 피해의 차가 이렇게 크게 난것은 해전사상 예가 드문 대 승리였다. 이 승리는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 동해 해전으로 일본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 시켰던 러일 전쟁의 대미를 장식하고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그들은 아시아의 강자로 부상하여 조선을 손안에 넣고 중국 대륙까지 침략의 길로 나아가게 되었으니 우리로서는 나라를 잃은 결졍적 계기가 된 통한의 전쟁 이었으며 일본은 당시로서는 국운을 연 대망의 전쟁 이었다고 아니할 수 없다.
본론으로 돌아가 '언덕위의 구름'의 주인공 아키야마 사네유키는 전쟁후 참모에서 지휘관으로 변신하여 연합 함대 기함인 미카사의 함장으로서 중장까지 진급 하였으나 육군의 고다마 겐타로처럼 러일 전쟁에서 너무나 온몸의 정열을 불태워 작전에 진력했던 탓일까, 지휘관으로서는 참모시절만큼의 빛나는 역량은 발휘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후 니콜라이 2세의 러시아 제국은 급격히 쇠락의 길을 걷게 되고 걷잡을수 없는 볼세비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패망 하였다.
역사의 진실이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미래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부족한 민족은 대 시련에 처할수밖에 없는것이 고금동서에 변함없는 철칙이다. 다가올 시대를 위한 준비에 허술함을 역사는 용납치 않는다는것. 그에 상응하는 댓가를 필연코 치루게 될것이다. 세상에 먼지 한점도 공짜는 없다. 국론이 분열되어 국가의 힘을 분산시키고 서로 물어뜯으며 소모하는것. 국가적 할일의 우선순위를 제대로 설정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진 민족도 또한 예외 없이 국력은 약화되고 비참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간다는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대승을 거두고 세계 열강과 어깨를 겨루게 되었다. 그러나 그 전쟁의 화려한 대미는 자신의 조상들을 대패 도주 시켰던 적장. 대제독 이순신의 혁신적인 진법이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 라지만 참으로 이런 아이러니는 없으리라.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가? 성웅 이순신이라며 호국의 영령으로서 숭배하고 노래하지만, 학익진에 대해 아키야마 사네유키와 같은 치밀한 분석과 학술적인 연구는 얼마나 되어 있을까..
나의 일천한 검색 실력이니 허점이 많겠지만 해군 사관학교나 국방 대학원 사이트에서도 학익진 관련 논문을 발견하지 못한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우리 조상의 진법으로 화려한 승리를 거두고 부상한 일본은 우리민족을 노예와 같은 상태에 빠뜨렸고 우리 선열들은 피눈물 나는 핍박을 받았는는데도 말이다.
수천년의 역사도 필연적인 원리 안에서 진화하고 있다. 우리의 국가 지도자들, 19세기말 20세기초 일본의 아키야마 형제, 마사오카 시키와도같은 오늘날 우리 민족의 수재들, 나라를 걱정하는 우국의 젊은이들은 민족의 미래 비젼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설정 하여야 할 것인가? 아니, 그보다도 우리 각자 자신들은, 나 자신은 어떠한 생각과 목표를 가지고 삶을 설계하며 실행해 나가야 할 것인가. 선열과 같은 피눈물을 흘리지 않으려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스스로 비판적 질문을 던지지 않을수 없다. 생각의 정리와 실행이 필요한 때임을 절감하고 민족의 단결을 꿈꾸며 이 독후감의 필을 놓는다.
아자 아자 대한건아! 화이팅! 화이팅 ! 화이팅!
< 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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