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 2월 15일 쿠바의 하바나 항에 정박중이던 미국 전함 메인호에서 원인 불명의 폭발 사고가 발생하여 266명의 미 해군 장병이 전사하는 사고가 발생 하였다. 미국은 이사고의 배후에 스페인이 있다는 것을 명분으로 선전 포고 하므로서 미국-스페인 전쟁이 발발 하였다.
미국 해군은 스페인 무적 함대의 주 군항인 산티아고항을 봉쇄하는 주 전략을 채택 하였다. 표주박과 같은 형태의 오목한 산티아고 항에 주력함대를 가두어 고사시키려는 전략 이었다. 봉쇄 전략 자체가 성공적인것은 아니었지만 이 해전에서 미국은 대승하고 스페인 무적 함대는 전멸의 비참한 결과를 맞게 되었다. 이로써 미국은 열강의 대열에 어깨를 나란히 하는 보상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 미국-스페인 전쟁중에 일본으로서는 크게 눈에 띠지도 않았지만 장차 벌어질 제국주의 경쟁에서 상상 할 수 없는 이득을 얻게 되었다. 미서전쟁 발발 당시 일본 해군의 엘리트 아키야마 사네유키는 미국 해군에 유학 중이었다. 그는 전쟁에 참전을 신청 하였지만 미 해군측으로 부터
거부 당하였다. 대신 그는 관전 무관 자격으로 미 전함에 승선 하였다. 아키야마와 같은 젊은 천재 전략가가 이 전쟁을 관전 하였던 것은 일본 해군 으로서는 더이상 바랄수 없는 기회가 되었다.
그는 전쟁의 전과정을 통해 미 해군의 공격과 방어 전략, 전함의 기동전략, 함포를 비롯한 각급 화기의 운용전술등을 먼지 한점도 놓치지 않고 분석하고 기록 하였으며 매일 밤을 새우다시피 전황의 진전 경과와 원인등을 정리하여 극비 보고서를 일본 해군성으로 전송하였다.
당시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할양받은 요동반도를 러시아가 주동한 삼국간섭에 의해 다시 토해낸후 그 울분을 참을수 없었다. 언젠가 다가올 국운을 건 러시아와의 전쟁을 가상하고 일본은 전국력을 기울여 10년 동안 군사력을 강화 하였다고는 해도 1904년초의 시점에서 러일 해군력은 숫자 상으로만 본다면 비교도 할 수 없는 열세였다.
국운을 건 국가간의 전쟁은 한두가지의 원인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엄청난 전력의 열세속에서 일본이 대국 러시아에 도전하여 승리를 거머쥐었던 것은 해군에 있어서는 아키야마 사네유키의 전략이 큰 공헌을 하였다는데 이의를 제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키야마의 미서해전의 관전은 장차 벌어질 러일 전쟁의 결정판 동해 해전에서 일본의 승리를 예약하는 대 학습의 장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미서 해전의 산티아고 봉쇄 전략은 거의 그대로 러일 전쟁 초기 러시아 군항 여순 봉쇄 전략의 모델이 되었으며 러시아 극동함대의 발을 묶는 성공적인 전략이 되었던 것이다.
러시아측 입장에서 패전의 원인을 분석해 본다면 첫째는 무엇보다도 볼세비키 혁명세력의 성장으로 인한 국론의 분열과 국가 집중력의 저하, 둘째는 니콜라이 2세 황제를 비롯한 상류층뿐 아니라 전 국가 시스템에 만연한 부정 부패, 셋째는 외교전에서의 고립과 동맹국이었던 프랑스로 부터도 협력을 얻어내지 못했던점, 넷째는 육군에서의 정보의 부족으로 인한 잘못된 정세판단, 다섯째는 해군력의 주력인 발틱함대가 1년동안 지구 반바퀴를 돌아 상상을 초월하는 이동거리와 시간을 소모하는 동안 이미 전의를 거의 상실 하였던 점 등이다.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와 가족. 황제는 성격이 온화 하고 인간적이었으나 통치자로서의 정치적 역량은 부족하였다. 러일전쟁 패전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1917년 볼세비키 혁명 세력에 의해 체포당하였다. 1918년 7월 17일, 볼셰비키 민중들은 억류돼 있던 니콜라이 2세, 그의 아내, 4명의 딸과 1명의 아들을 시골의 헛간 지하로 끌고갔다. 평소처럼 사진을 찍는줄 알았던 그들은 나란히 세워져 총과 곡괭이, 삽 등으로 무자비하게 살해 당하였다. 황제가 되기에 준비되지 않았던 그는 국가와 민중을 혼란에 빠트렸고 본인과 모든 가족들까지도 비참한 최후를 맞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당시 러시아는 이미 노쇠한 대국으로서 육해군 지휘부 공히 목숨을 초개같이 던져서라도 승리하겠다는 확신은 약한 상태에서 개전을 맞게 되었던 점이다.
그에 반해 일본은 전력은 아직 부족하나 신흥국으로서 국가 시스템이 활발히 가동 되었고 군부를 비롯한 전국민이 패전은 곧 죽음 이라는 절박한 상황에서 죽음이냐 삶이냐의 결연한 의지를 모아 전쟁에 돌입 하였다는 것이다.
이제 동해 해전 전후의 전황을 살펴 보기로 한다. 러시아는 일본 보다 최소 세배 이상의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흑해 함대등 흩어져 있는 해군력을 집결 시키기 어려웠다. 파견 할 수 있었던 것은 로제스트 벤스키 제독이 이끄는 발트함대(정식 명칭은 제2 태평양함대)와 니콜라이 네보가드프 제독이 이끄는 제3 태평양함대였다.
그러나 유럽에 기항중인 주력 함대를 동아시아까지 이동시킨다는 것은 역사상 없었던 일이며 함대의 대부분이 증기선인 전함에 계속 석탄을 공급해야했다. 그러나 외교 관계가 악화된 영국은 스페인에게도 발트함대에 보급을 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행사하는 한편 아프리카의 모든 영국 식민지 항구에도 기항하지 못하도록했다.
발트 함대는 1년 가까이 열대 기후와 연료와 식량과 물부족과 싸우며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돌아 마다가스칼을 거처 인도양을 횡단 하고 말래카 해협을 거처 북상해 기진 맥진한 상태로 베트남의 캄란만에 도착 하였다.
한편, 일본 연합함대의 토오고 헤이하치로오 제독과 아키야마 사네유키 작전 참모는 여순을 비롯한 동아시아에 있던 러시아 태평양함대를 황해 해전과 부산해 해전에서 격파해 무력화 시킨 뒤 발트함대와 대결할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지구를 돌아온 발트함대를 어디서 맞아 싸워야 하는가가 문제였다. 캄란만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항로는 3곳으로 대한 해협, 츠가루 해협, 소오야 해협 이었다.
일본 해군 연합함대는 열세를 만회하기 위하여 발트 함대의 북상 진로를 정확히 예측하고 그중 한곳에 전력을 집중해야 했다. 토오고 헤이하치로는 쓰시마 해협을 통과할 것으로 예상하고, 한반도 남부해안에 주력함대를 배치하고 경계망을 폈다.
5월 14일 발틱함대가 캄란항을 출항했으나, 19일부터 소식이 묘연했다. 발틱함대의 진로를 알 수 없게된 일본 연합함대는 초초해지기 시작했고, 발틱함대가 태평양에서 훗카이도로 향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도 있었다. 발트 함대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예민하고 불안했던 토오고는 일본 해군 군령부에 연락해 훗카이도로 이동하고자 한다는 전보를 보냈고, 군령부에서는 일단 신중하게 기다리라는 연락이 왔다. 토오고는 26일 정오까지 기다리다 이동하기로 마음먹었다.
26일 오전, 발트함대의 석탄운반선 6척이 25일 저녁 상하이에 입항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운반선이 함대에서 떨어져 나왔다는것은 항속거리가 긴 태평양 루트로는 가지 않는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이로서 토오고는 쓰시마 해협에서 발트함대를 기다리기로 했다. 만약 운반선이 하루라도 늦게 입항했다면 토오고의 함대는 훗카이도로 향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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