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17)
러일전쟁 전체의 구도에서 승전의 분수령이 되었던것은 육군의 만주 원정군 오오야마 원수와 그 참모장 고다마 겐타로 대장 및 그 휘하 부대들이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이뤄낸 여순 함락과 봉천 대 회전에서의 승리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러일전쟁을 전사상 미증유의 승리로 장식한 대미의 마침표를 찍은것은 해군 연합 함대 토오고 헤이하치로오 제독의 동해 해전이었다(일본에서는 니혼카이카이센 日本海海戰 이라 한다).그리고 그 동해 해전에서 실제적인 작전을 입안했던 책임자는 "언덕위의 구름"의 줄기를 이루는 주인공, 연합함대 작전참모 아키야마 사네유키 중좌였다. 그는 해군 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미국유학을 거쳐 34세에 해군 사관학교 교수를 지낸 천재 전략가였다. 그는 한가지 과제에 집착하면 시간도 잊어버리고 몰두하는 성격이었다.
아키야마 사네유키는 러시아 발틱 함대를 격파하기 위해 임진왜란시의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법을 연구하였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일본제국은 조선을 식민지로 집어 삼키고 동양의 패권을 거머 쥐었지만, 그 계기가 된 전쟁의 마지막 승리를 장식한 동해 해전의 주 전략은 자신들의 선조를 격파한 조선의 제독 이순신의 전략이었으니 아이러니라면 그런 아이러니가 없다. 물론 일본 해군에서는 학익진법이라 하지않고 정자전법(丁字戰法)으로 바꿔 부르고 있지만 그것은 정확히 이순신 제독이 임진왜란중인 1592년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왜군의 수군 맹장 와키자카 야쓰하루(脇坂安治)와 쿠키 요시타카(九鬼嘉隆) 수군 장수의 함대를 맞아 싸워 대승했던 전법이다.
사네유키는 당시의 상황과 전투를 상세히 복기하고 러시아 발틱 함대를 맞아 싸워야할 1904년의 해전이 그와 유사 하다고 생각하였다.임진왜란 당시 조선 연합 함대는 이순신의 판옥선 21척, 거북선 3척 도합 24척에, 전라 우수사 이억기의 함대 25척, 원균 함대 7척, 총 56척 이었다.이순신은 총 사령이 되어 왜군이 정박한 견내량에 이르러 정세를 분석하니 견내량은 수로가 좁고 암초가 많아 공격에 제한이 많다고 판단하고 전략상 유리한 한산도 앞바다로 적을 유인하기로 작전을 세웠다. 한산도는 거제도와 고성사이에 있어 적이 사방으로 헤엄쳐 나갈 수도 없고 궁지에 몰려 상륙한다 해도 굶어죽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여기서 사네유키가 연구했던 학익진법과 한산 대첩이 어떻게 진행 되었는지 좀더 알아보기로 한다. 왜 그 학익진법이 그렇게 유명해졌고 해전사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것인가? 이순신 이전, 세계 해전은 그야말로 육박전이나 백병전이었다. 측면으로 다가가 적선에 뛰어들어 적을 베는 것이었다. 그것을 이순신은 세계 최초로 총통을 이용한 포격전 개념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포격전에서 이순신은 한 단계 더 나아가 본격적인 진법을 적용했던 것이다. 학익진을 펼치기에는 위험 부담이 적지 않다. 육지와 달리 바다는 날씨와 파도 등 미묘한 변수가 많아, 전 함대의 속도와 방향을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순신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학익진을 펼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이순신이 택한 것은 자신이 펼치려는 진법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었다.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을 믿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학익진은 종대로 공격해오는 적 함대에 대항하여 섬그늘 등에 매복해 놓은 대 함대를 순식간에 중앙부가 오목한 횡대 대형으로 넓게 전개 한후 그안으로 들어온 적 종대 진형의 함대를 양측에서 조여가며 일거에 공격하는 포위 진법을 말한다. 산개 했을때의 함대 진형이 학이 날개를 편 형세와 흡사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이 학익진에 성공 하려면 잘 훈련된 유능한 장수와 군사가 필요했다. "적을 유인하여 학익진을 펼칠 것이오!" 이순신이 선언하자 장수들이 놀랐다. 장수들은 반대 의견이 많았다. 이순신 역시 이런 점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러나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순신은 휘하 장수들을 설득했다. 더구나 지금 조선 수군에게는 두 척의 거북선이 있었다. 거북선을 학의 양 날개 끝에 배치하여 적선을 학익진 안에 가두기만 하면 필승지세라고 설득했다.
결국 적을 유인하여 한산 앞바다에서 결전을 하기로 했다. 이순신은 즉각 5,6척의 판옥선을 띄워 견내량 북쪽 덕호리 포구에 주둔하고 있는 와키자카 야스하루 부대를 공격하도록 했다. 조선 판옥선을 본 와키자카 함대는 곧 응전해 왔다. 포구를 향해 쳐들어가던 조선 판옥선이 일본군의 응전에 뱃머리를 돌렸다. 그러자 기세가 오른 일본군 전 함대가 아무런 의심 없이 조선 판옥선을 쫓아 나왔다. 쫓고 쫓기는 숨막히는 추격전은 산 위의 조선군 탐망꾼들에 의해 그대로 이순신에게 보고되었다.
드디어 한산도와 미륵도 양안에 매복해 있던 조선 함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선의 주력 함대가 그물망을 형성하는 것과 동시에, 쫓겨 오던 판옥선들도 방향을 90도로 틀었다. 일자로 길게 늘어선 함대의 가운데 부분은 물살에 약간 밀리면서 조선 함대는 자연스럽게 폭이 깊은 반월형 진형을 갖추었다. 조선 판옥선을 쫓아오던 왜장 와키자카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너댓 척의 조선 배를 추격해 왔는데, 어느 순간 조선 주력군이 눈앞을 막아선 것이다. 멈춰라! 함정이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일본 배의 선두가 멈추자, 영문도 모르고 따라오던 후미의 전선이 앞선 배를 들이박기 시작했다.
전투가 벌어지기도 전에 이미 일본 함대는 진형이 무너지고 있었다. 드디어 외곽부터 조여오던 조선함대에서 포격이 시작되었다. 조선 함대는 노련했다. 차근차근 정밀 포격을 하면서 일본 함대를 격파했다. 거북선은 빠져나가려는 일본 전함들을 차례로 격파했다. 포위망을 뚫어라! 한 곳을 집중 공격하라! 와키자카는 독려를 거듭했다. 몇몇 일본 전함이 조선 함대의 한 군데를 노리고 밀고 들어왔다. 그러나 그것도 오산이었다. 한쪽 면의 포격이 끝나면 조선 배는 방향을 빙글 돌려 반대편에 장전하고 있던 총통으로 포격을 했다.
마침내 와키자카의 전함도 강력한 조선 수군의 포격을 받고 침몰하기 시작했다. 단 한나절 만에 73척의 대함대 중에서 59척을 잃었고 9,000여 명의 군사를 잃었다. 왜군 지휘관 와키자카는 뒤에서 독전하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패잔선 10여 척을 이끌고 도주하였으며, 한산도로 도망친 400여 명도 13일 후 겨우 탈출 하였다. 이순신 수군의 기적 같은 승리였다. 조선 수군은 단 한 척의 전함도 손상당하지 않고 고스란히 적의 대함대를 격멸시켰다.
이순신장군의 해전사가 서방세계에 알려진 후 많은 전략·전술가들이 그의 위업에 최상급의 찬사를 아끼지 않았는데, 대표적으로 영국의 해군 중장 밸러드(G.A. Ballad)는 그의 저서에서 한산해전을 평가하여 말하기를 "이 해전으로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려던 야망은 급속히 끝을 맺었다. 이것은 위대한 조선의 제독이 세운 빛나는 전공 때문이었다. 불과 6주간이라는 짧은 기간에 그는 전 세계 해전사상 유례가 없는 연전연승의 전공을 세웠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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