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illy의 독후감

坂の上の雲 (SAKANO UENO KUMO / 언덕위의 구름)-5

Billy Soh 雲 響 2009. 12. 11. 21:25

(2009. 12. 11)

 

그러나 여순 요새는 일본군으로서는 함락 하지 않아서는 안될 전략 요충이었다.  여순항에 주둔 중인 러시아 극동 함대는 일본 해군에겐 크나큰 위협 이었으며 더구나 만주의 육군이 요청하는 병력과 군수 물자를 수송하기 위한 서해상의 해양 항로 확보는 절대적 이었으므로 해군에서는 육군이 신속히 여순 요새를 함락해 주기만을 강력히 원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미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중인 러시아 극동 함대 분대는 수시로 출항하여 만주로 향하는 일본 해군 수송 선단을 공격하여 격침 시키고 있었으니 해군으로서 러시아 극동함대 모항인 여순은 일각을 다퉈 장악하지않으면 않될 전략 거점 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기의 제 3군은 무모한 육탄 돌격만을 거듭하여 시산 혈하를 이루는 희생만을 거듭하고 있었다. 러시아군이 빠른 시간에 철벽으로 구축한 203고지의 요새와 천지를 뒤집는 포격, 철조망에 걸린 돌격 부대위로 우박처럼 쏟아지는 러시아 기관총탄 앞에 일본군은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처럽 쓰러지고 쓰러지고 또 그위에 포개 쓰러지며 시체는 산처럼 쌓여 갔던 것이다.

 

이때 토오쿄오의 대본영과 만주군 총사령부에서는 노기를 경질해야 한다는 의견이 들끓었다. 그러나 총사령관인 오오야마 이와오 원수는 노기를 파면하는 것은 전투중인 군의 사기를 오히려 떨어 뜨릴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경질대신 자신의 참모장인 고다마 겐타로 대장을 여순에 파견하여 작전권을 접수 하도록 하였다.  물론 만주 원정군 전체의 작전을 책임지고 입안하며 만주 북부에 포진하고 있는 러시아의 대군을 상대로 전황을 판단하여 진퇴에 분전을 거듭하고 있던 고다마 참모장을 여순에 파견 한다는 것은 오오야마 원수에게도 고다마 대장 자신에게도 크나큰 부담이었다. 그러나 여순의 상황이 그만큼 급박했으므로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여순의 제 3군 사령부에 도착한 고다마 대장은 노기 사령관을 면담하고 3군 작전참모 이지치 코스케 소장을 불러 호통을 쳤다.  골짜기 마다 수천명씩 일본군 시체의 산을 쌓은 처참한 전쟁의 실패는 거의 이 무능한 이지치 참모의 실책이었다. "나는 오오야마 총사령관 각하의 명을 받고 이곳에 와 있다. 이 시간부로 노기 사령관의 지휘권은 내가 이어 받는다." 그는 3군을 장악하고 모든 작전부 참모들을 직접 지휘하여 작전 개념을 변화 시켰다. 참모들을 전선으로 보내 러시아군 상황을  직접 파악케하고 중포를 포함한 모든 포병 부대를 203고지의 코앞까지 전진 시켰다. 총공격에 나선 일본군의 엄청난 포격은 근거리 사격 이므로 203 고지의 러시아군 진지에 정획히 명중되어  견고한 진지를 부숴내고 있었다. 포격으로 가루가 되어가는 고지에 보병부대가 돌격을 개시 하였다. 전우들의 시체를 딛고 돌격을 거듭한끝에  참담한 희생을 치루고 마침대 여순의 203 고지는 일본군의 손에 떨어졌다.

 

203 고지 정상에서는 여순 시내와 항구에 주둔중인 러시아 극동함대의 모습이 손에 잡힐듯이 보였다. 고다마 대장은 즉시 항구에 정박중인 러시아 전함을 포격하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집중 포화는 정확히 러시아 전함에 명중되어 한척 한척 대 폭발을 일으키고 침몰해 갔다. 실로 여순 공략을 시작한지 155일 만에 여순은 완전히 일본군 장악하에 들어가고 러시아군은 항복 하였다. 만주군 총참모장 고다마 겐타로 대장의 지략과 과감한 전투 지도의 결과 였다.

 

여순을 장악한 고다마 겐타로 대장은 곧이어 러일전쟁의 분수령 이었으며 최후의 대규모 지상군 전투였던 봉천(奉天, 현재 심양) 대회전(大會戰)을 기획하였다.  여순 공략을 마치고 북상 시킨 제 3군을 포함해 오오야마 이와오의 일본군은 총 5개군 25만 병력 이었다. 이에 비해 쿠로파트킨 대장이 이끄는 러시아 극동군은 총 11개군 3개 병단 32만명 이었다. 1905년 3월 1일, 대치하고 있던 양군 총 57만명의 거대 규모의 병력이 격돌하는 봉천 대회전은 드디어 불을 뿜기 시작 하었다. 이 봉천 대회전 이야 말로 육상전에서뿐 아니라 러일 전쟁 전체의 전국을 결정지을 것이며 양국의 운명을 건 대 승부였던 것이다. 오오야마 원수 휘하의 고다마 겐타로의 전략은 노기의 제 3군이 러시아의 우익, 즉 동청 철도 방면으로 북상시켜 러시아군 후방에 타격을 가하는 동안 중앙군을 진격 시켜 러시아군 주력을 격파하고 봉천을 장악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기 마레스케의 제 3군은 여순 전투의 후유증으로 계획대로 후방을 교란 하지 못했고, 따라서 중앙 주력군의 진격도 부진 할 수 밖에 없었다.

 

쿠로파트킨 러시아 극동 총사령관의 전략은 주력 부대의 결전을 회피하고 미루며 만주 북방까지 깊숙히 일본군 주력을 유인하여 고사시키려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서부 전선에서 히틀러의 독일군을 상트 페테르부르그와 모스크바 공방전 까지 유인하여 주요 두 도시를 불바다로 만들고 퇴각한후 모스크바에 입성한 독일군이 굶주림과 추위에 지쳐 스스로 퇴각 할 수 밖에 없는 상황과 유사한 개념의 전략 이었다. 퇴각하는 적군을 공격하여 섬멸하고 국면을 전환시켜 승기를 잡는 것은 러시아의 전통적인 전략가운데 하나였다. 

 

 만주 벌판 봉천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러일 양국의 전투는 두나라의 운명을 가른 처참한 결전 이었다.

 

이 봉천 대회전 에서도 어쩌면 그렇게 쿠로파트킨의 전략이 성공할 수도 있었다. 조금만 더 유인 했다가 퇴각 하는 일본군에 우세한 전력으로 밀어 부쳤더라면 러시아는 만주에서 일본군을 축출하고 그 야욕을 저지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쿠로파트킨 대장의 정보력의 열세와 그에 따라 내린 잘못된 한순간의 판단으로  전세는 급전직하 역전되고 패전의 길로 접어 들었던 것이다. 다름 아닌 여순 전투후 북상한 노기의 제3군에 대한 판단이었다. 쿠로파트킨은 우익을 파고드는 노기군이 10만명 정도라고 판단하였으며, 전력과 사기가 엄청 나다고 생각 하였다. 그에 따라 봉천 방어선의 주력군을 철수시켜 극동군 보급 루트인 동청 철도의 방어를 위한 재배치를 실행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노기의 제3군은 증원된 병력까지 합하여 3만 8천명에 불과 했으며 여순 전투 피로감의 회복도 덜되어 전투력과 사기는 그다지 우수하지도 않았고 러시아 군의 역습을 방어하기도 급급한 상황이었다.

 

러시아 군은 봉천 주 방어선에서 갑자기 퇴각 함에 따라  중앙군이 허약해 지고, 급기야 3월 9일에는 봉천 전선에서 전면 퇴각하니 일본군은 하루만에 3월 10일 봉천에 입성하였다.

오오야마와 고다마를 비롯해 일본군이 그토록 원하던 대 승리를 거머쥔 것이었다. 그러나 승리의 이면에 일본군은 이 봉천 대회전에서 이미 7만 8천 명의 사상자를 기록하고 있었으니 그 희생의 규모는 말로 표현 할수가 없는 참상끝에 얻어낸 승리였다.  당시 러시아도 혁명의 영향으로 장기전을 기획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일본군도 작전과 보급은 거의 한계선상에 이르고 있었으니 양군 모두가 거의 최후의 한계점에서, 전원 죽음의 직전에서 전투를 수행하고 있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눈덮인 전선에서 일본군은 1000여 문의 야포를 동원하여 러시아 군에 대한 전면 공격을 개시했다.

 

봉천 대회전에 패한후 러시아군은 철수하지 않을수 없었고 제정 러시아는 급기야 망국의 길을 걷게 되었다.일본군은 참혹한 희생 끝의 한계점에서 가까스로 승리를 쟁취 했으니 하늘의 도움 이었을까.  이 전투의 승리로 일본은 러시아의 남하 세력을 밀어내고 조선을 확실히 집어 삼키게 되었다. 우리 한민족으로서는 피눈물을 흘리지 않을수 없는 국제 정세의 변화였다.

 

그런데..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육군 승리의 제 1등 공신자 만주군 총사령부 참모장 고다마 겐타로 대장은 전쟁이 끝난 후 8개월 만에 뇌졸중으로 사망하였으니 이는 그가 한줄기의 정신력 까지도 남김없이 소모하며 전쟁을 지도하였던 것이 원인이 아니었을까하고 생각해 본다. 이 전쟁에서 이긴 결과로 당시의 일본 제국은 우리 한국의 원수가 되었다. 하지만 이 전쟁에서 생명을 불사르며 그들의 조국을 위해 싸웠던 천재 전략가들은 피아를 떠나 한 인간 으로서 경외심을 갖지 않을수 없다.  우리의 지도자들은 그때 무엇을 지도하고 우리의 선배 젊은이들은 나라를 위해 어떤 우국의 정열을 가지고 살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