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illy의 독후감

坂の上の雲 (SAKANO UENO KUMO / 언덕위의 구름)-4

Billy Soh 雲 響 2009. 12. 10. 21:34

(2009. 12.10)

 

엄청난 국력의 열세에 있던 일본이 대국 러시아에 도전하여 그토록 짧은 시간에 그렇게 완벽한 승리를 했던 러일전쟁은 세계의 전사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경이로운 사실이었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단 말인가. 승전의 배후에는 목숨을 초개같이 버렸던 수만명의 감투정신과 천재 전략가들의 온몸과 정신을 불사르는 열정과 지략이 있었다.  그들은 너무나도 전력을 다해 자신을 혹사하며 국난의 위기를 극복하려고 투혼을 불사르며 기진해 버린 나머지 전쟁이 끝난후의 허망함 속에서 일찍 세상을 떠나거나 더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시들어 버린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 대표적인 사람이 고다마 겐타로(兒玉 源太郞) 육군 대장이다.

 

파일:Gentaro Kodama 2.jpg

 

러일전쟁의 승리를 육군부와 해군부로 나누어 볼때 육군은 고다마 겐타로, 해군은 아키야마 사네유키의 천재적인 전략과 과감한 실행에 의한 결과라해도 아주 지나친 거짓말은 아니다. 그들은 그만큼 전쟁수행에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국가를 위하여 온몸과 정신을 불태웠던 것이다.

 

고다마 겐타로는 사츠마 번과 함께 메이지유신을 주도했던 두 번중 하나인 초오슈(長州) 번(현재의 야마구치현)의 무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메이지 유신 신정부와 막부파 간에 벌어졌던 보신전쟁에 참전하고 메이지 신정권이 확립된 후,1870년 부사관으로서 육군에 입대했고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오사카 병학료(大阪兵学寮)를 졸업하였다. 이후 연대장을 거쳐 고급 참모 양성 기관인 육군대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근대전에서 전략 전술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독일군 참모 출신 교관 야코프 메켈을 초빙하여 독일식 참모 교육을 실시하였던 것은 전술한바 있다. 그후 독일 주재무관으로 근무하고 귀국하여 육군 부대신이 되었다. 이어 남작 작위를 받고 중장으로 승진하여 1895년 타이완 총독에 임명되었다.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 후 이토오 히로부미 내각에서 육군대신을 맡았고, 카츠라 타로 내각에서는 내무대신과 문부대신을 맡았다.

 

1904년 고다마는 대장으로 승진 하였다.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원정군 총사령관 오오야마 이와오(大山 ) 원수는 고다마 겐타로에게 참모장을 맡아달라고 부탁하였다. 일본의 육군대신을 지낸 고다마에게 원정군 참모장은 오히려 낮은 직위 였지만 우국의 지사였던 그는 괘념치 않았다. 당시 전력이 열세인 상황에서 러시아와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전쟁은 국운을 건 위기라는 의식을 떨칠수 없었다. 그러나 이길수 있는 작전가라면 일본 육군 내에서 고다마 밖에 없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러일전쟁 초기 승세를 보였던 일본군은 여순 공략에서 참패를 당하여 만주군 제3군을 창설하고 본격적인 공략에 나섰다.그러나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사령관의 3군은 여순 시내를 감제하는 전략 요충인 203고지 공략에서 3만 여명의 전사자를 포함한 6만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 공격군 전부대가 사실상 거의 전멸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