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illy의 독후감

坂の上の雲 (SAKANO UENO KUMO / 언덕위의 구름)-3

Billy Soh 雲 響 2009. 11. 27. 19:35

(2009. 11. 27)

 

일본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서 세계적인 규모의 제국주의 단계로 들어섰으나, 그 당시 극동의 국제적 대립관계는 중국 분할경쟁을 둘러싸고 전개되었다. 청일전쟁 승전후 일본은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인 러시아의 삼국 간섭으로 할양받은 요동 반도를 다시 반환 하였다. 일본의 만주 진출을 저지한 러시아는, 1895년 프랑스와 공동으로 4억 프랑에 달하는 대청차관(對淸借款)을 강요하고, 1896년에는 러청밀약을 맺고 일본이 중국,조선,극동 러시아령을 침략할 경우 상호원조할 것을 약속, 만주 북부를 관통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동청철도 부설권을 획득하였다.

 

1898년 러시아는 다시 중국 관동주의 조차권, 독일은 교주만, 영국은 구룡반도와 위해위,  프랑스는 광주만을 조차하기에 이르렀다. 뒤늦게 미국도 1899년에 문호개방 선언을 발표하고 중국 분할에 가담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극동에서는 영국 미국 대 러시아 프랑스 독일이라는 열강의 대항관계가 형성되어가고 있었다. 

 

3국 간섭 이래 국제적 고립에 고심하고 있던 일본은 1900년 청나라의 의화단사건 진압에 참가하게 되면서 드디어 열강의 대열에 끼어들었다. 그러나 일본은 아모이 출병에 실패하고, 중국 본토에 대한 이권 획득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조선에서 청 세력을 몰아낸  일본은 러시아의 강경한 태도에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일본 조야 지도자들은 물론 대부분의 국민들은 위기 의식이 팽배 하였다.

 

군사력으로 본다면 비교를 할 수 없는 열세 였으며 만일 전쟁에서 패전 한다면 일본은 멸망 하고 말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선 반도와 만주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물러나야 하는것은 물론, 일본 본토에서도 홋카이도오 정도는 넘겨 주어야 할것이며 여차하면 러시아의 반 식민지로 추락 할 지도 모른다고 걱정 하였다. 많은 논란을 거쳐  대세는 차차 주전론으로 기울어져가고 있었다. 이토오 히로부미의 뒤를 이어 수상에 오른 카츠라 타로오는 내치와 외교에 놀라운 실력을 발휘 하였다. 러시아의 국가적 본능을 직시하고 그것을 궤멸 할 수 있는 전략을 구사 한다면 승전 할 수도 있다고 생각 하였다.

 

그들은 홋카이도오의 원주민 아이누가 곰을 잡는 방법으로부터 러시아 공략법을 생각 하였다. 곰(러시아)을 생포하기 위해 아이누들 처럼 해안에 말린 청어알을 듬뿍 놓아두면 곰은 한 없이 청어알(만주)을 먹고 목이 마르면 해변 가로 내려가 바닷물을 들이키게 된다. 바닷물은 소금물이기 때문에 목이 점점더 마르게 되고 점점 더 마시는 사이에 위속의 청어알이 부풀어 올라 곰이 움직이지 못할때 사로 잡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1903년 6월 23일 일본 정부의 주요 각료 원로들의 어전회의는 조선에 대한 일본의 우선권과 만주에 대한 러시아의 우선권을 각각 인정하는 만,조교환론 에 의한 대(對)러시아 교섭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조선을 일본의 지배하에 두고, 만주에서는 러시아의 지배력 약화를 노리는 정책이었다.

 

러시아는 이에 대해 8월 극동총독부를 설치하여 일본에 대응하였고, 그 후 여러 차례에 걸친 양국의 교섭은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해를 넘겼다. 그 동안 일본에서는 육군을 중심으로 전쟁준비가 진척되었으나, 그것은 일본의 경제력에 비추어 군사행동을 남만주에 한정한다는 전제에 입각한 계획이었다.

 

일본은 드디어 외교책으로서 1902년 1월 영˙일동맹이 성립되어 러시아와의 대립이 명확해졌다. 이 때문에 그 해 10월 러시아는 의화단사건 이후의 만주 주둔군의 제1기 철병을 수행하였으나, 이듬해 4월의 제2기 철병은 보류한 채 만주의 독점적 지배는 물론, 압록강 연안에 진출하여 남하정책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일본은 조선에 대해 내가(일본) 안먹으면 남(러시아)이 먹는다고 생각 하였다. 우리의 선배들이 격변의 세계정세에 눈을 뜨지 못하고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주변의 열강은 이렇게 서로 우리를 먹으려고 아귀 다툼을 하고 있었으니 이 얼마나 가슴을 치며 통탄할 일이랴.

 

일본은 마침내 1904년 2월 4일 대 러시아 개전을 결정하여 국교를 단절하였다. 8일에는 육군 선발대가 한국의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로 향하고, 해군은 여순의 러시아 함대를 공격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되고 10일 러일 양국으로부터 정식 선전 포고 됨으로서 러일 전쟁이 발발하였다. 서전에서 일본군은 조선을 제압하고, 조선에 조일의정서를 강요해 유리한 전략체제를 확립하였다. 4월 하순 조선에 상륙하여 북상한 일본군 제1군은 5월 초 압록강 연안에서 러시아군과 충돌하여 격파했고, 같은 달 요동반도에 상륙한 제2군은 남산, 대련을 장악 하였다.

 

러일 전쟁중 여순 요새는 당시 일본군으로서는 함락하지 않으면 안 되는 최전방 요충이었고 러시아로서는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마지막 보루였다.  스테셀 장군을 지휘관으로 하는 여순 요새에는 총 4만 2천명의 러시아 병력이 투입돼 있었다. 이들은 일본군이 보유하지 못한 기관총으로 무장한 막강의 병력이었다. 노기 마레스키(乃木希典 )휘하의 일본군이 이같이 철통같은 러시아군의 요새에 총공격을 개시한건 8월19일. 이후 3차례의 공반전 끝에 여순이 일본군의 손에 함락된 건 공격 개시로부터 1백일 가까이 되는 11월26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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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요새의 가장 치열했던 전장이었던 203고지의 산정에 수많은 전사자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의 전사자는 실로 3만여 명에 이르렀다. 노기의 두 아들도 이 여순 공방전에서 전사 하였다.  상상할 수 없는 희생을 치뤘지만 여순 함락을 계기로 만주에서의  전기를 잡은 오오야마 대장의 만주군 총사령부는 밀리는 러시아군을 일거에 섬멸 하기 위해 봉천 대회전을 준비 하였다.만주군 총사령부 산하  5개 군 25만 명을 집결 시켰다.  이 처참한 전투에서 일본군은 7만 5천명 이상의 전사자를 내고 러시아군이 철수 함으로서 봉천을 함락 하였으니 전장의 참혹함은 실로 유례가 없는 극에 달한 상황이었다.  이 전쟁에서 아키야마 요시후루는 수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그의 기병대를 이끌고 목숨을 건 전투에 전투를 거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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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겨울 203고지에서 바라다 본 여순항의 모습...일본군은 수만의 사상자를 내고 점령한 후 여기에 관측소를 설치하고 시가지에 정밀포격을 실시했다.

 

요시후루는 술을 너무나 좋아하는 애주가였다. 적의 포격으로 천지가 뒤집어져 폭발하고 적이 코앞에 까지 다가와 공격하는 탄알이 빗줄기 처럼 날고 있는 전장에서도 술만은 그의 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부관은 별명없이, 치열하고 처참한 전투일수록 오히려 더, 언제나 자신의 사령관을 위하여 술을 준비하고 있어야 했다. 생사를 넘나드는 전장에서 요시후루는 수통의 술을 잔도 없이 마시며 한숨을 돌리고 다시 앞장서 돌격의 불호령을 내리곤 했으니 어찌됐든 그 두려움 없는 배짱만은 대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