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1.26)
형인 아키야마 요시후루는 가난한 가정 환경 속에서 우울한 소년 시절을 보내면서도 치미는 울분을 참고 향학열을 불태워 나간다. 그는 목욕탕에서도 일하며 공부 하지만 변화하는 큰 세상으로 나가고자 하는 꿈과 목표가 있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몰락한 번의 가난한 무사의 자제들에겐 관비 장학생으로 공부하여 교사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가장 큰 출세의 길이었다. 그들은 메이지 유신 혁명을 주도했던 쵸오슈나 사츠마의 출신도 아닌 평범한 몰락한 무사의 아들들 이었다. 요시후루는 각고의 노력으로 관비 장학생에 선발 되어 사범학교에서 공부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격변하는 세계와 일본의 미래를 보는 눈을 뜨게 되어 오오사카를 거쳐 토오쿄오로 진출하게 된다.
요시후루는 군인의 길을 가기로 결심하고 일본 육사에 들어간다. 당시 일본 육군의 기병 수준은 극히 미약한 것이었다. 요시후루는 근대전에선 기병의 기동성과 전략적인 중요성에 착안하여 기병의 육성에 모든 정열을 불태운다.
요시후루가 모든 정성을 다해 육성한 일본의 근대 기병은 청일 전쟁을 통해 그 중요성이 확인 되었다. 감돌던 전운끝에 드디어 1894년 청(淸)나라와 일본이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다투는 청일전쟁이 발발 하였다. 일찌기 1876년 일본은 조선과의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이 자주국임을 인정하였다. 이는 조선으로 부터 청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일본 주도의 세력을 장악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러나 1884년에는 김옥균 박영효등 개화파를 후원하여 갑신정변을 일으켜 실패하자 청의 영향력이 오히려 강화되었다. 1894년 5월, 외세의 수탈과 관리들의 부정 압제에 반발하여 동학 전쟁이 발발하여 동학군이 전주를 점령하자 조선왕조는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조선에서 청,일 양국의 세력균형을 요구하던 일본은 6월 초에 서울에 출병하고 7월 25일 서해의 풍도 해전과 29일 성환 전투에서 청군에 승전하고 8월 1일의 개전 후 평양 전투와 서해 해전에서 청의 함대를 격파하고 연이어 중국 영토로 진출, 봉천을 제압하고 북양함대를 격파 하였다.
연패한 청은 결국 시모노세키에서 강화조약에 조인하고 조선에서의 청국 종주권 파기, 랴오뚱 반도와 타이완,펑후섬의 할양, 배상금 2억 냥 지불, 서구 열강과 동일한 특권을 인정하는 통상조약의 체결등 일본의 요구에 굴복 하였다. 청일 전쟁 개전 당시 사실은 일본 내에서도 일본의 승리를 확신 하는 사람들은 군부 외에는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새롭게 성장하는 국가였던 일본은 노후국인 청국을 물리쳤고 요시후루는 이 청일 전쟁의 과정에서 자신이 훈련한 기병여단을 이끌고 산개와 집중, 기동타격을 중심전술로 구사하여 연전 연승하였던 것이다. 전쟁의 전 과정을 통하여 요시후루는 훌륭히 자기의 역할을 수행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동 아시아에서 일본이 지나치게 신흥 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을 경계하는 러시아의 패권주의는 일본의 꿈을 좌절시킬 추세였다. 일본이 국운을 건 러시아와의 한판 승부를 결정 했을때, 일본의 이 모험에 대하여 승리할것이라고 예측 하는 세계의 전략가는 거의 없었다. 미국은 거대한 제국 러시아의 힘을 일본을 앞세워 시험해 보고 싶었다.
당시의 양국 전력을 숫자로 비교해 보면 육군은 러시아가 일본의 10배 이상, 해군의 함정 숫자는 2배 이상이었다.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를 비롯한 정치가들도 어떻게든 전쟁을 피하고 요동반도와 대만 문제등 청일전쟁 승전후의 문제에 대해 정치적으로 타결하려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의 완강한 정책앞에 일본의 외교는 좌절 하였고 군부 소장파를 중심으로 러시아와의 일전을 회피하고서는 일본의 미래를 지켜내기 어렵다는 의견이 강하게 대두 되었다.
그러나 일본이 러시아에 대드는 것은 마치 초등학생이 대학생에게 싸우자고 덤비는 갓과 같은 형세였다. 많은 논란을 거쳐 국가가 전쟁을 결정했고 기병여단장 요시후루는 그의 원대한 절대 목표인 러시아 코사크 기병의 격파를 위해 쓰라린 훈련의 나날을 보냈다. 이미 요시후루는 육사 졸업후 관비 유학생으로 프랑스의 생시르 육균 사관학교에 유학하여 나폴레옹 시대 이래 발전해온 프랑스 기병전술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육사 교육은 이미 독일식으로 변해가고 있었으므로 요시후루는 프랑스식과 독일식 전략을 연구함으로서 프랑스의 장점인 유연성과 독일의 단점인 경직성을 분석해낸다.돌아와 일본적인 기병전술을 개발하고 때를 기다리며 훈련에 훈련을 거듭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일본 육군은 그때까지 단위 전략 편제였던 진대를 사단으로 개편하였다. 육군대학교에서 독일의 작전 천재 육군 참모장교 메켈 소령을 교수로 초빙하여 독일의 주요 전쟁 개념이었던 공격 전술을 중심으로 일몬의 인재들을 교육하여 아시아에서의 패권을 위한 침략을 준비 하였다. 소위 몰트게 전술로서 전장에서 발생하는 지엽적 현상에 집착하지 않고 적 주력 부대의 소재와 움직임을 간파하여 아군 타격력을 집중화 하여 전광 석화와 같이 적 주력을 먼저 궤멸 시킨다는 것이다.
열악한 무기와 부족한 병력 으로도 독일이 프랑스를 격파 했던 것은 지휘관의 탁월한 능력이었으며 우수한 전략 덕분이었다고 메켈 소령은 가르쳤다. 그 전통으로 이후 태평양 전쟁시까지 일본의 전쟁 방식은 언제나 선제공격 이었다. 메켈은 언제나 전쟁 하려면 초전에서 승리해라. 적을 이미 쳐부수고 있는 순간에 선전 포고해라라고 강조했다. 그의 교육 방식은 현장에서 실제 상황을 부여하고 시나리오 방식으로 교육하고 토론하는 참모여행 방식 이었다. 메켈은 일본 육군의 발전과 근대화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시후루는 35세가 되어서야 젊은시절 마음을 두었던 하숙집의 딸 다미와 결혼하였다. 군인은 결혼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군인이 자기 자신의 안락한 행복을 생각하는것은 태만이며 그런 생각이 나라의 발전을 늦게한다는 생각 이었다. 결혼은 했으나 그는 무인이 집안 살림에 관심을 두면 안된다며 월급은 어려운 후배들에게 나눠 주거나 같이 술을 마시는데 써버리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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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시인이 되는 마사오카 시키는 아키야마 사네유키의 어릴적 부터의 친구였다. 이 두사람은 시골을 떠나 토오쿄오로 유학 와서 동경 제국대학에 입학 하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공부 하였다. 그러나 아키야마 사네유키는 이미 육군 장교가 되어있던 형 아키야마 요시후루의 권유와 집안의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훗날 해군병 학교를 거쳐 해군 사관학교가 되는 해군병 학료에 입학 하였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해군 연합함대 수석참모 "아키야마 사네유키" 중좌의 실제 사진. 참모장이 아예 전권을 맡길 정도로 작전의 신으로 불리던 천재. 후일 해군중장까지 진급하였다, 학자금이 없어서 동경대학 대신 공짜로 교육시켜주는 해군병 학교를 선택했다고 한다. 해군병 학교 시절 백프로 적중하는 시험문제의 족보를 작성하여 동기생들에게 시험의 신으로 불렸다. 그러나 그의 그러한 예측력 뒤에는 말 할수 없이 철저한 노력과 분석이 숨어 있었다. 그는 해군병 학교를 수석 졸업하고 교수를 거처 제국주의 격동의 시기에 그의 조국 일본을 위기에서 구해내는 주역의 한사람이 되었다.
1896년 중위로 승진하였고, 이듬해 미국의 일본 대사관 주재무관으로 파견되어 3년간 머물렀다. 아키야마는 미국의 해군 사관학교에서 공부하려고 했으나, 미국측은 거절하였다. 그러나 미국 스페인 전쟁이 발발하자, 아키야마는 참관인으로서 미국 함대에 탑승할 수 있었다. 이때 쿠바의 아바나 작전을 지켜보고 일본에 장문의 보고서를 보냈다.
1899년에는 미국의 전함 뉴욕호에 6개월간 탑승하여 미국의 해군전술을 배울 기회를 가졌다. 그리고 로드 아일랜드에있는 미 해군대학에서 고등전술을 배우기도 했다. 이후 그는 영국을 여행한 후 1900년 귀국하였다. 아키야마는 귀국 이후 대위로 승진하여 참모직을 섭렵하였고, 해군대학의 교관이 되었다. 그는 해군대학의 교육 프로그램을 실전 대비용으로 개편하였다. 그는 34살에 불과했고 그의 생도들은 대부분 그의 동년배이거나 연장자였으나, 그의 훌륭한 인품과 전문지식때문에 생도들에게 많은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여러차례의 함상 근무를 통해 세계 여러 곳을 기항하고 둘러보았다. 이후 정보장교로서 신분을 위장하고 조선과 만주에서 정보를 수집하기도 하였다.
러일전쟁의 발발과 동시에 그는 소좌(소령)로 진급하였고 연합함대 사령장관인 토오고 헤이하치로오의 절대적 신임을 받았다. 그는 토오고의 참모로서 연합함대의 기함 미카사에 승선 하였다.그는 계급상 하급장교였으나 발틱 함대와의 결전인 동해 해전의 작전 수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고 일본의 대승에 결정적 기여를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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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29일 부터 방영되는 NHK 특집극 <언덕 위의 구름>에 출연하는 주연 모토키 마사히로, 아베 히로시, 작년 12월 28일에 전격 결혼한 여배우 마츠 타카코가 카나가와현의 한 스튜디오에서 기자회견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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