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 중위로서 수많은 어려움과 기쁨이 교차했던 군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1976년 6월 30일 서부전선의 O사단 사령부에서 전역신고를 완료하였다. 곧이어 국내 제약회사의 톱 D사에 합격하여 큰 기쁨 속에 꿈많은 사회 생활을 시작 하였다.
자유의 다리; 임진강에 놓인 이 다리를 건너면 군생활의 대부분을 보냈던 지역이다. 민족의 애환이 서린 곳이기도 하지만 내 젊은 날의 추억이 어린 곳이기도 하다. 자유의 다리 남쪽에 있는 헌병 초소에 R이 언제나 와서 면회를 신청하곤 하였다. 부대 안에 있을때는 한두시간 만에 나오기도 하였지만 다른 곳에서 업무 중일때는 유선 연락도 잘 닿지 않았다. 언젠가 얼어붙는 겨울 토요일 오후 3시쯤 J고교 교사로 있던 R이 헌병 초소에 찾아와 소중위 면회를 신청 하였다. 헌병 초소로 부터 연대 본부 대대 본부를 거처 나에게 연락이 와야 했으나 그날 나는 공교롭게도 통신이 거의 닿지 않는 곳에서 업무 중이었다. 내가 연락을 받은 것이 여섯시 쯤이었으나 이제는 나올 차량이 없었다. 어떻게 어떻게 정신 없이 차량을 수배 하여 헌병 초소에 나온 시간이 저녁 9시였다. 6시간을 기다린 R은 추위에 온몸이 얼어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나의 마음이 너무나 아파왔다 그렇게 나의 젊은 날이 흐르고 이 다리를 건너 무사히 전역 하였던 것이다.
취직이 빨리 안되면 결혼은 어떻게 해야하나 그게 군생활 중의 가장 큰 걱정 이었는데 R(당시는 정혼자)에게도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친구와 같이 영업부에 배치되었다. 하지만 친구는 좋은 지역을 담당하여 업적을 잘 올리는데 나는 깡 벽촌을 담당하게 되어 큰 실망을 하게 되었다.
포천 운천 동두천 전곡 철원 와수리 지포리 문혜리 동송 신수리 일동 의정부 청평 가평 현리 덕소 교문리 퇴계원 장현... 다니기도 힘들어 몸은 지치기만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잘 가꿔보니 이게 웬일인가. 군부대가 많은 이 지역이 의외로 서울 보다도 더 좋은 금싸라기 지역 이었다. 3년의 시간이 흐르자 나의 업적이 최상위권으로 떠올라 동기들 보다 먼저 진급하고 해외 여행도 자유화 되지 않았던 그때 해외 포상 여행까지 선발 되었다.
그런데 여행에서 돌아오니 이럴수가.. 생면 부지의 부산으로 발령이 나 있었다. 사정상 가족이 같이 내려갈 수도 없는데 그런 난감함과 실망이 없었다. 버티고 버티다 2주후에 부임지로 내려가니 지점장님이 대노하며 너 필요 없으니 가라는 것이었다. 그래도 용케 참으며 부산 생활에 적응 하였다.
그러나 만 1년 만에 서울로 다시 올라오게 되니 모두가 전례가 없는 기적같은 일이라고 부러워 하였다. 거기에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선망의 부서 종합병원부로 배치되고 드디어는 영업의 최고봉인 서울대 병원을 담당하게 되니 그야말로 조직의 꽃 이었다. 한동안 화려하게 달려 나갔지만, 이게 웬일이랴 2년후 치열한 연간 입찰전쟁에서 Y사에 패하여 시련의 골짜기로 빠지고 말았다.
그 여파였는지 두번재 진급에서는 낙방까지 하게 되니 그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여름휴가도 포기하고 사립 독서실에서 시험을 준비하였고 영어, 경영학, 논문, 상식등 시험도 잘 보았는데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 버리니 그 좌절 감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산을 건너가는 시커먼 용꿈까지 꾸었는데 철석같이 믿었던 그해의 진급에서 떨어진후 꿈은 절대로 믿지 않게 되었다.
한동안 방황하다 몸을 추스려 군생활후 손을 놓았던 영어공부에 미친듯 매달리고 인생의 모드를 바꾸려고 공부하여 K대 경영 대학원에 합격 하였다. 삶의 실마리가 풀리는것 같아 다시 희망을 갖고 힘차게 생활 하였다. 하지만 한동안 지나자 상사는 회사냐 학교냐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 하였다.
나는 현실이 어렵더라도 미래의 꿈을 버릴수는 없다는 생각에 학교를 선택하고 그 회사를 떠나기로 결심 하였다. (그 후에 일어난 일이지만 그해의 진급 시험에서 합격한 일부 동료들은 40대 중,후반에 모두 회사를 떠날 수 밖에 없는 입장이 되었다 한다. 그때 만일 나도 합격 하였더라면 예외가 되기는 어려웠을것 같다. 그후 그중 몇 친구들은 제대로 된 직장을 갖기도 어려웠던 것으로 듣고 있으니 그런 새옹지마가 없다.)
그러나 직장을 아주 쉴수도 없기에 내가 좋아하는 영어를 쓰는 회사에 이곳 저곳 응시 하였으나 고배만 마시게 되니 그야말로 앞에는 오를수도 없는 절벽이 막아서 있고 뒤를 보니 천길 낭떠러지 였다. 그 시절이 가장 견디기 어려운 좌절기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몇개월 후 또 다른 문을 열어 주셨다. 그토록 바라던 외국회사 R사의 최고 전략제품 Product Manager 채용에 보란듯이 합격하였던 것이다. 그 기쁨은 이루 말할수 없었다. 내 인생의 방향을 바꾼 대 전환점 이었다.
그 이후로 22년간 사회 생활 최고의 가도를 줄기차게 달렸다. 하는일 마다 성공 이었다. 그 3년후 한해에는 3박자 축복이 터졌다. 차장 진급, 새아파트 입주, MBA획득.. 그런기쁨이 없었다. 그 후로도 탄탄 대로는 이어졌다. 모두가 부러워하던 해외 근무, 드디어 일본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후 진급, 또 진급하여 기업의 별인 임원이 되었다. 한동안 지난후 스위스 본사근무로 떠나게 되고 돌아온 몇해후에는 아시아 태평야 본부 시드니 근무가 결정 되어 다시 또 꿈을 갖고 떠날날이 임박 하였다.
그러나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직장내 퇴직자의 모함과 소송에 휘말리게 되어 1년간 출국 정지되고 서울 검찰청 검사의 수사를 받게 되었으니 그런 수사를 받아 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 하기도 힘들 것이다. 왜 검찰청에서 조사 받고 나온 많은 사람들이 빌딩에서 한강에서 절벽에서 뛰어 내리겠는가 그곳에 가면 바깥 세상에서 가졌던 모든 직함, 권력, 체면, 살아온 인격 등은 사라지고 오직 초라한 한사람의 피의자로서만 존재하니 그상황은 상상해 보면 알일이다. 그러나 나는 꿋꿋이 싸웠다. 몸은 괴로웠지만 잘못한 것이 없었기에 자신이 있었다.
드디어 1년후 모든 혐의와 모함에서 벗어나고 떳떳하게 명예를 회복 하였다. 경험해보지 못한 괴로운 시련을 극복한 것이었다. 거기에 그 괴로움을 견뎌 냈다고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그런일 없이 무사히 시드니 근무를 나갔더라면 10년을 죽도록 노력해도 얻을까 말까한 선물 이었다. 그러니 나를 모함해준 그 퇴직자들이 나에게는 평생의 은인이 되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생의 새옹지마 구도는 그렇게도 묘하게 짜여진 그물망 같은것이었나 보다. 물론 우리 신앙자의 말로 표현 하자면 더 좋은 것으로 베풀어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예정된 시련이었다. 드디어 호주로 떠날 날이 정해지고 힘들었던 시간들도 잊기 위해 아내와 같이 터키를 여행하고 돌아와 시드니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처음 아내와 같이했던 해외생활 시드니에서 또한 평생 못해볼 좋은 경험들을 많이 하였다.
그런데 귀임하니 회사의 사정은 만만치 않았다. 노사분규와 파업의 회오리가 휩쓸고 지나간 회사는 전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가 되어 있었다. 오랫동안 부족한 상사인 나를 위해 모든 열정을 다 바쳐 주었던 많은 관리자들과 직원들이 대부분 회사를 떠났고 새로 와 있던 젊은 외국인 상사와의 갈등도 발생 하여 회사 생활은 점점더 힘들어지게 되었다. 급기야 내 인생이었고 나의 청춘과 모든 열정을 다바쳐 키운 자식과 같았고 그토록 애착 하였던 회사와 제품을 떠나기로 결심 하였다.
어디로 갈 것인가. D사와의 접촉은 1년을 끌었다. 가기로 결정한 후에도 주변의 모두가 말렸다. 무엇때문에 고생을 자초하나. 빡세기로 소문난 회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닫힌 문의 미련을 버리고 과감히 새로 열린 문으로 돌진 하였다.
2006년 2얼 6일, 드디어 D사에 첫출근 하여 새로운 출발을 하였다. 과연 그 문화와 분위기는 나의 상상을 뛰어 넘는 것이었다. 나는 마치 새로운 혹성에 불시착 한것 처럼 느껴졌다. 그렇지 않으면 쇠망치로 머리를 얻어 맞아 비틀거리는 것만 같은 충격이었다. 우선 말은 한국어이되 알아 들을수 없는 방언으로 말하였다. "꽃밭에서 사건 챙기는 놈은 종놈이다" "평생 종놈으로 살았으니 총계정 원장이 안맞는다." "추 잡지 말고 투망끈을 잡아 다녀라"... 첫날 부터 회의에서 표정과 말투도 살기가 등등하게 이런 대화를 하니 어찌 알아 들을수 있겠는가.
그러나 결국 D사에서도 필사적으로 적응하여 3년 5개월을 근무하였다. 임원 송별회에서도 얘기 했지만 그리 쉽게 깨질수 없는 신기록이다. 외자계에서만 근무하고 사회생활을 마쳤더러면 설마 이런 세상이 있을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힘들었던 시기 였지만 그 경험들은 향후의 생활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이젠 또 지금의 S사에서 출발이다. 남극과 북극, 에베레스트, 킬리만자로, 아마존 삼천리 단독 뗏목 탐험, 북극권 삼만리의 개썰매 탐험등 지구의 모든 극지를 홀로 극복했던 우에무라 나오미처럼 나도 또 다시 설레는 탐험과 외로운 모험의 시작이다. 옛부터 내려오는 인생만사 새옹지마란 말처럼 인간의 작은 머리로 미래를 알수는 없는것이니 나는 또다시 그 어둠 속으로의 항해를 위해 기꺼이 즐겁게 뛰어드는 것이다.
물론 세칭의 새옹지마는 우리에게는 단순한 새옹지마가 아니다. 우리에게는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광야 40년 동안 믿음의 선조들을 이끌어 주신 그분의 앞서 가시는 예비이다. 대를 이어 우리 가문의 주인이 되시고 모든 시련을 가장 좋은 것으로 바꾸어 주시는 그분의 인도요 예정된 축복과 은혜라고 고백한다.
나의 일생을 통하여 나를 눈동자처럼 지키시는 그분의 깊은 뜻을 어찌 내가 알수 있을까. 모든 계획을 내가 하더라도 그분께서 원하지 않으신다면 그 모든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일 것이다. 일생을 통하여 그 경외로움에서 떠날 수가 없다. 나의 목자가 되시는 그분께서 언제나 부족한 나를 지켜 주시기만을 묵상하며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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