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illy의 삶의 지혜

성공밖에 못하는 어학 공부

Billy Soh 雲 響 2008. 9. 11. 13:21

가끔, 드물지 않게 나는 질문을 받는다. "어떻게 하면 어학 공부를 잘 할 수 있나요?" 또는 선배나 후배나 직원들로 부터 푸념 섞인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나는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요, 도저히 늘지가 않네요.  아마 타고난 소질이 없나 봅니다" 그러면 나는 다시 질문해 본다."영어 공부를 어떻게 했어요?" 그러면 대부분 학원에 몇년간 다니며 열심히 공부했다는 대답이다. 그러면 나는 "그러게요, 아마 자기 공부가 아닌 남의 공부를 해 준것 같습니다."하고 대답한다.

 

물론 어학이란 끝이 없는 것이지만 그래도 22년 동안 외국인과 같이 사회생활을 하고 스위스, 호주, 일본 등에서 수년간 근무를 경험한 나로서 어학 수업 시대의 경험을 후배 들과 함께 공유해보고 싶은 생각에서 이 글을 쓴다.

 

1. 영어 공부

우리 시대의 누구나 똑같이 13살, 중학교 1학년때 영어를 처음 배우게 되었다. 물론 알파벳은 중학교 입학 전에 외울수 있었다. 시골 중학교라 대단한 교육 수준은 아니었지만 내겐 새로 배우는 영어 선생님이 가장 멋있게 보였다. 선생님은 당시 드물게도 미군 방송 아나운서 출신이셨다. 목소리와 발음이 완전히 버터를 발라 굴러 넘어가며 미국인과 전혀 차이가 없었다. 나도 저렇게 멋있는 영어를 해보고 싶은게 정말 소원이었다.  

 

그 선생님의 영향으로 영어를 열심히 공부 했지만 하면 할 수록 어려 웠다. 그러다 중학교 1학년 겨울 방학에 형에게 매일밤 소위 영어 과외를 받았다. 교재는 안현필 선생저 '영어 실력 기초' 였다. 숙제가 충분치 않거나 가르쳐 준걸 틀릴때는 군밤을 수없이 먹고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당시 형은 서울대에 막들어간 신입생이었는데 내게는 영웅으로 보였다. 형은 고등학교 때부터 영어 웅변대회에 나가기도 하고 매일 아침 저녁으로 'Voice of America' 의 뉴스 방송을 들으며 수없이 그 뉴스를 따라 하곤 하였다.

 

그렇게 자라나며 다른건 몰라도 영어만은 완전히 손에서 놓지는 않았었나 보다.  군 생활 중반기까지는 판문점 진입로를 경비하며 미군 장교와 교환 소대장 근무를 하기도 하였고, 약업계 초년병 시절에는 밤이면 종로 2가 영어 학원에 다니는걸 취미로 하였다. 그러다 결국은 영어를 쓰는 회사로 이직하게 되었다. 그러나 영어를 한다고 하긴 했어도 공식적으로 업무가 영어로 진행 되는 회사에서의 적응은 쉽지 않았다.

 

함께 놀아라; 하버드대에 간 비

 

한동안 애로가 많았지만 서강대 영어 연수원에서 영국인 선생에게 한학기를 수업 받은후 나름대로 다른 길을 찾게 되었다. 미8군 Episcopal Church(성공회 교회)에 성가대로 나가게 된것이다.  그러니 주중에는 언제나 영어로 업무하고 주말엔 8군에 나가서 미국인들과 사귀며 그 문화와 언어의 환경에 몰입 하려고 노력 하였다. 물론 그런 생활은 아주 흥미롭고 재미있는 일이었다. 그 생활을 일본에 가기 전까지 7년 동안 계속 하였다.  그리고 22년을 외국회사에서 15개국의 상사와 영어로 근무 하였으니 영어는 언제 익히게 되었는지 딱 집어 말할 수가 없을것 같다. 오랜 시간 때로는 힘들게 때로는 즐기는 생활 속에서 그 매너와 문화가 나도 모르게 몸에 익은것 같다. 

 

다만, 말할수 있는것은 공부한 것을 어떻게든 내 실 생활 속에서 써먹어 보려는 노력을 부단히 했다는 점이다. 선생님에게 배우는 것은 언제나 선생님의 것이다. 배운후 그날 생활 하는 도중 어떻게든 배운 말과 비슷한 상황을 만들어 그말을 동료에게 한번 써먹어 보는 순간 그말은 바로 내 숨결이 들어가 내것이 되었다.  그러니 생활 속에서 즐기는것, 그것이 바로 비결 이라면 비결 이었다.

 

2. 일어 공부

영어는 내가 하려고 결정하고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학교 과정에서 의무적으로 하지 않을수가 없었던 공부였으니 그 발전 과정을 명확히 정리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일어 공부를 했던 과정은 내가 선택한 길 이었으며 아주 극적인 방법이었고 그 효과도 극적인 발전 이었다.  물론 어린 시절 환경의 영향은 컸다고 본다. 우리 부모님은 내가 태어 나기전 일본의 카와사키 시의 토오쿄오 전기(현재의 토시바) 공장의 기획 조수셨다. 그러니 여러가지 사연을 거쳐 귀향하신 후에 내가 태어났고 어린시절 아버지는 언제나 일본 방송을 들으셨다. 나는 알아 듣지도 못하는 그 일본 방송이 너무 싫고 지루해서 어서 아버지가 그만 들으시기만을 기다렸다. 나는 어린이 방송 프로가 너무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어린시절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옆에서 들었던 그 일어 방송이 얼마나 나의 일어 공부의 깊이를 더해주고 속도를 빠르게 해 주었는지는 공부해 보기 전에는 미쳐 깨닫지도 못하였다.

 

나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이 끝난후 오래지 않아 9월 1일, 처음으로 일어 전문 학원에 등록하고 수업을 받게 되었다. 물론 나는 그전 부산 근무 시절에 한번 시작했다가 중단하고 실패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그야말로 실패 할 수 없다고 결심했다. 거기에 나는 일본에서 개발된 항암제를 담당하게된 Product Manager 였다. 실패하면 업무상으로도 심각한 어려움을 갖게 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나 자신에게 결심을 보이기 위해 무언가 표시를 나타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재수 시절 부터 가끔 한가치씩 피우던 담배를 당시에는 하루 한갑 정도 피우고 있었는데 담배를 완전히 끊음으로서 결심을 굳혀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학원에 처음 간날 88년 9월 1일 금연을 실행 하였다. 유혹도 많았지만 그날 이후에는 담배를 손대어 본적이 없다. 또한 친구들에게 모두 전화 연락을 하였다. 내가 적어도 일년 정도는 만나기가 어려울것 같다는 것이었다. 나는 실제로 그 1년동안 그 어떤 친구도 만나지 않았다. 아니 만날 시간도 없었다.  나는 내 포니2 승용차에 있던 음악 테이프를 모두 없앴다. 일어 테이프 외에는 차속에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1년동안 신문을 보지 않았다. 내가 신문 안본다고 세상은 지장이 없을거라고 생각했다. 낮에는 업무에 집중하고 저녁 6시면 매일 학원으로 달려 갔다.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젊은 처녀 선생님은 정말 열정적으로 가르치셨다. 학원에서는 언제나 맨앞에 앉아 선생님의 주목과 질문을 거의 독차지 하다시피 했다.7시에 끝나면 다시 회사로 돌아와 9시 정도 까지 잔무를 정리하고 귀가하여 식사후 잠자기전 밤 한시까지 일어 공부에 매달렸다. 아침이면 테잎을 들으면서 한시간 일찍 일곱시 반에 출근하고 샌드위치를 먹으며 또 책을 보고 연습문제를 풀었다. 

 

 그렇게 석달을 지내고 선생님에게 부탁하여 일본인 친구를 소개 받았다. 그때부터는 낮동안에 근무를 하다 오전중에 한번 일본인 친구에게 전화를 하여 아직 되지도 않는 일본어로 수다를 떨며 지금 하는 일을 이야기 하고, 오후에도 또 한번 그렇게 수다를 즐겼다주말이면 그 친구와 관악산 북한산 등으로 몇시간씩 등산을 하고 내려오면 비빔밥이나 불고기 백반을 사주며 수다를 즐기는 것이 용돈의 가장 큰 사용처였다. 또는 다른 주말에는 강남역 뒤에 일본인들이 많이 모여있는 숙소에 놀러 가곤 하였다.  그들은 어떤 종교에 소속된 친구들로서 한국에 와서 한국어 공부를 하고 있는 그룹이었는데 식생활이 변변치 않았다. 그러니 밖에 나와 식사만 대접해 주어도 내 인기는 소위 요즘말로 짱이었다.  나는 친구들도 안만나니 그런데 쓰는 용돈은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한달에 두번 정도는 안국동의 일본 문화원에 가서 영화를 보았다. 문화원에서 선정하는 영화는 일본 문화를 알리는데 아주 대표적인 영화라  재미도 있고 생생한 말을 배우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영화를 보며 워크맨으로 영화를 녹음하여 테잎이 다 달을 정도로 차속에서 듣고 다녔다. 지금도 그 테잎이 남아 있으며 "오토코와 츠라이요(남자는 괴로워)' 시리즈와 '호타루(반딧불)', '오레와 토오쿄오에 이쿠사(난 동경에 갈거야)' 등은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 (그 후의 이야기 이지만 일본 근무 시절에 그 오토코와 츠라이요 의 촬영지인 케이세이 시바마타에 가 산책하는 것이 또하나의 즐거움 이기도 하였다.)

 

그렇게 모든것을 끊고 다른 세상에서 산것과 같은 일년을 지내고 났을때 나는 정말 터질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것은 마치 어두운 터널을 간신히 기어서 빠져나와 전혀 다른 세상으로 온듯한 느낌 이었다. 지금 까지 알수 없었던 일본어 책과 그 문화와 역사를 원어 그대로 읽으며 이해 하는것은 그야말로 새로운 세상의 빛을 보는 느낌 그대로였다. 

 

우에노공원의 하나미(花見); 매년의 벗꽃놀이. 직장 동료, 가족, 친구 등의

그룹별로 모이는데 모두가 인정하는 이유가 없으면 참가 하는것이 문화다.

 

그렇게 일본어를 공부하여 급기야는 일본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인에게는 지고 싶지 않다는 자신감과 각오를 다지고 떠난 일본에서의 처음 적응기는 그야말로 암흑이었다. 2000명 정도 되는 회사에서 한국인은 내가 유일하니 그들에게는 신기하고 관찰의 대상이었다. 처음 들어간 회의에서는 거의 아무것도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내 상사가 곁에서 내가 알아 들을만한 수준의 일본어로 다시 통역을 해 주어야 겨우 이해 하였다.  그로부터 다시 2년 근무후 귀국 하기까지 밤이면 일본어 학교에 나가 공부 하였다.  특히 의대 교수들을 만나야 하는 직무상 필수인 존경어 겸양어 공부와 직무상 용어에 많이 집중 하였고 일본의 역사와 문화, 수필 , 소설 등을 공부 하였다.  1월 7일 부터 초기의 몇달을 고생한 후 엄청난 편두통에 시달리고, 4월말 5월초의 골든 위크 휴가에 집에 돌아 왔다가 다시 귀임 한후 부터는 스트레스도 사라지고 업무에 완전한 적응이 가능하였으며 동경 대학 병원을 비롯한 많은 병원에서 교수 들을 상대로 제품 세미나에서 발표도 하고 질문에 대해 답변과 토론을 하기도 하였다.

 

직장 생활을 하며 일어 공부에 성공했던 첩경은 완전한 일본어의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 하였고, 그 신선한 환경을 즐기도록 내 모든 생활을 개편 하였던 것이 비결 이었다고 생각한다.지금도 그렇게만 한다면, 그렇게 집중하고 즐기려는 노력만 한다면 어떤 언어든 일년만 하면 할 수 있다는 자신은 있다.        다만, 그런 결단만 가능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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