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 화 - [이형기]

 

낙  화(落花)

 

                                이형기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이형기 시인은 1933년에 태어나 2005년에  뇌졸중후의 오랜 투병끝에 작고 하였다. 1950년 17세에 최연소 기록으로 등단 하였으며 시(詩)란 본질적으로 구축해 놓은 가치를 허무화시키는 작업이며 그 무엇이건 전적으로 수용하지 않으려는 정신의 자유 라고 생각했다. 그는 한국시사에서 사라짐에 대한 존재론적 미학을 선보인 분이다.

 

꽃이 소리없이 지듯이  손에 꼭 쥐었던 것들도 언젠가는 놓아야 한다. 꽃잎이 떨어저 흩날리는 모습은 길 떠나는 수행자의 뒷모습을 연상케 한다. 미련 없이 돌아서는 낙화에는 아쉬움이 어린다. 이별은 등 뒤를 허전하게 만들고, 눈물을 머금게 하겠지만, 그러나 제때에 떠난다는 것은 추하지 않고 얼마나 멋진 이별의 모습인가!

새잎이 돋고, 줄기가 힘차게 뻗고, 꽃이 벙글고, 벌이 꽃의 주위를 맴돌고, 비로소 어느 아침에는 꽃이 '하롱하롱' 지고, 그 꽃의 지난 시간들을 기억하며 열매가 맺히고,… 우리의 몸과 마음도 이 큰 운행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 아닐까.

부귀는 가난함이 되고, 만남은 이별이 되고, 건강은 늙고 죽음을 초래하며 삶은 시시각각 바뀌어 간다. 온갖 사물은 다 없어질 것이며 공중의 번개와 같고, 굽지 않은 질그릇, 빌린 물건, 썩은 풀로 엮은 울타리, 모래로 된 기슭과 같은 것이다. 이형기 시인의 초기 시에 속하는 이 시는 집착의  덧 없음과 아름다운 물러남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