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 수 (鄕愁)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헤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 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마음 파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 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 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정지용님은 한의사인 아버지 정태국과 어머니 정미하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1923년 4월 도쿄에 있는 도오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에 입학했으며, 1929년 졸업과 함께 귀국하여 이후 8·15해방 때까지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하였다.
1939년에는 〈문장〉의 시 추천위원으로 박목월·조지훈·박두진 등의 청록파 시인을 등단시켰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이화여자대학으로 옮겨 교수 및 문과과장이 되었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했던 이유로 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전향강연에 종사했다. 1950년 6·25전쟁 이후의 행적에는 여러 설이 있으나 월북했다가 1953년경 북한에서 사망한 것이 통설로 알려져 있다.
1923년 3월에 쓴것으로 추정되는 '향수'는 제1기 대표작으로서 시인의 향토색 짙은 서정의 세계와 비관적 현실 인식및 비애가 표출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일제하에서 존재의 근원을 상실한 시대의 아픔과 그 회복을 노래한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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