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 고지 (러일전쟁 영화)
토오에이샤 제작
《 사선으로 무작정 달려드는 일본군, 뼈아픈 최초 공세의 실패 》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뤼순 요새와의 포격전을 경험하며 해안포대의 중포가 고지에 위치한 포대에도 고스란히 배치되어 있을 것을 충분히 예감했다. 요새와의 포격전은 함대를 지휘하는 그에게 있어 결코 탐탁치 않은 임무였지만 육상에서 공격하는 데는 그만큼 사상자가 많이 발생할 뿐더러 어중간한 야포나 산포로는 쉽게 공략이 어렵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육군이 강력하게 타격한다고 해도 저런 위력의 중포들이 대량으로 배치되어 있다면 쉽게 돌파가 어려울 것이야. 그렇지, 우리 중포대를 배속시켜 줘야겠군”
이리하여 이지치 고스케 소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구로이 데이치로 중좌가 이끄는 해군 중포대가 제3군에 배속되었다. 공세에 앞서 1904년 6월 16일을 기해 제3군은 뤼순 요새 사령관 스테셀 중장에게 항복을 권고했다가 도리어 요새 수비대의 사기만 올려주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로부터 약 2개월 동안 제3군은 공세 준비에 돌입해 마침내 1904년 8월 19일, 포병의 공격 준비 포격 하에 제1차 공세가 시작되었다. 제3군 병사들은 제식 소총인 30년식 소총에 착검한 뒤 일제히 뤼순 요새를 향해 돌격해 들어갔지만 그 결과는 너무나도 참담했다. 이룡산과 동계관산, 송수산을 도배하다시피한 포대와 보루에서 일제히 중포들이 불을 뿜어 돌격해 들어오는 보병들을 원거리에서부터 무더기로 살상하기 시작했던 것!
여기에 간신히 포격을 뚫고 철조망 지대에 봉착한 보병들에게는 보루와 벙커에 거치된 M1893 “맥심” 중기관총들이 불을 뿜었다. 개틀링보다 더욱 요란한 총성이 울릴 때마다 수십~수백 명에 달하는 일본군 병사들의 시체가 철조망 지대를 가득 덮었고 약 5일에 걸쳐 펼쳐진 공세 기간 동안 일본군 제1, 9, 11 보병사단의 공격제대는 사실상 전멸해버렸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집계된 제3군의 사상자는 무려 15,800명에 이르렀으니 겨우 1차 총공세에서 1개 사단이 넘는 병력이 문자 그대로 “녹아내려”버리는 참사가 벌어졌다.
보고를 받은 노기 마레스케 중장을 비롯한 제3군 사령부는 기가 막혔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어찌 이런 일이!!” 전선에서 한참 떨어진 후방의 안락한 사령부에 위치한 제3군 사령부로서는 전방에서 벌어지는 이 참사가 전혀 믿기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일본 제3군은 이와 같은 엄청난 사상자를 냈음에도 러시아군의 벙커나 방어진지 하나 함락시키지 못한 현실에 충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지치 고스케 소장은 자신의 엉터리 작전으로 그렇게 많은 부하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면서도 작전 계획을 그대로 속행하여 제2차 총공세를 감행하는 삽질을 저질렀다. 그리고 그 결과는 4,900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는 참패로 끝이 났다.
도쿄의 대본영에서는 난리가 났다.
“이미 저 난공불락의 철벽 밑에 2만여 명이나 파묻었으면 무엇인가 뭔가 다른 공격 방식을 생각할 법도 한데!! 이지치 고스케, 이 작자는 도대체 무엇을 하는 것이며, 노기 장군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육군 참모본부 차장 나가오카 가이시 소장은 그의 일기에 위와 같은 내용의 분노를 남겼다. 더욱 가관인 점은 제1차 공세에서 15,800명이나 손실했음에도 대본영이 아주 관대했다는 점이다. “뤼순 요새가 그토록 강력하단 말인가?!”( 여기에 대해 필자도 상당히 황당할 지경이다. 원래대로라면 당장 진상 조사 위원회를 구성해야 된다 )
《 너무나도 후방에 위치한 잠망경 없는 잠수함, 제3군 사령부 》
2차례에 걸친 뤼순 요새 공략 실패 이후 제3군 사령부는 너무 많은 희생을 냈음에도 공세 계획을 전혀 바꾸지 않았다. 진작에 주공 방향을 해군이 건의한대로 203 고지로 선정했다면 러시아군이 방어선을 구축하기 전에 적은 희생으로 점령할 수 있었겠지만 문제는 이미 러시아군이 이 곳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속속 증원 병력과 포대, 벙커, 산병호, 철조망 지대를 구축해 소규모로나마 요새화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일본 제3군으로서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셈이었고 결국 지속적으로 막대한 사상자만을 내게 되었다.
더욱 큰 문제는 어떻게든 전선의 상황을 신속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전선 근방에 위치해야할 제3군 사령부가 너무나도 후방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것인데 이는 포성 등 전장의 시끄러운 환경에서는 냉정한 작전 지휘가 안된다는 참모장 이지치 고스케 소장의 강력한 주장 때문이었다. 노기 마레스케 중장으로서는 당연히 좀더 융통성있는 지휘가 될 수 있도록 사령부를 전방으로 이동시킬 것을 원했지만 작전 계통에 경험이 전무하다시피한 자신의 한계로 인해 이지치 고스케 소장의 주장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이는 노기 마레스케 중장 개인의 문제만은 아니다. 당시 제1~4군 사령관 중 참모장의 도움 없이 직접 지휘할 수 있는 장성은 제2군 사령관 오쿠 야스카다 대장 뿐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참모들의 적정 정찰은 계속되어야 함에도 제3군 참모들은 뤼순 요새 주변의 고지들을 장악한 당일에만 이 곳에 올라왔을 뿐 이후에는 전혀 올라오지 않았다. 작전에 앞서 정찰은 필수인데도 말이다!! 일본 해군은 답답하고 초조해졌다. 러시아 극동함대와의 해전으로 함정들의 손상이 이만저만이 아닌데도 뤼순항을 봉쇄하는 임무로 수리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의 발틱함대가 출동한 마당에 언제까지 이 곳에 있을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해군은 제발 203 고지를 점령해 이 곳을 관측소로 하여 뤼순항에 틀어박힌 극동함대를 격침시켜주기를 바랬고 실제 이를 위해 중포대까지 배속시켜줬으나 이지치 고스케 소장의 답변은 한결 같았다.
“203 고지처럼 구석에 있는 언덕을 함락시켜봐야 뤼순 요새를 점령할 수 없다. 우리 육군은 전 요새를 함락하는 것이 목적이다!”
도쿄의 대본영도 분노에 휩싸였다.
“왜 공격의 주력을 203 고지로 돌리지 않는 것인가?! 그게 그토록 불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203 고지만 함락시키면 모든 일이 수월한데 제3군은 이를 실행에 옮기지도 않고 지속적으로 전 요새에 공격을 퍼부어 막대한 인명피해만 내고 있었던 것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병력에서 러시아에 압도적으로 밀리는 일본으로서는 이처럼 대규모 인명피해를 더 이상 간과할 수 없었다. 제3군 내에서도 서서히 203 고지를 공격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바로 제2차 총공세 당시 제1 보병사단의 참모장이 이 고지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소규모 제대로 공략하자는 건의를 한 것이다. 이지치 고스케 소장의 허가를 받아 제1 보병사단의 별동대는 203 고지에 공격을 감행했지만 워낙 규모가 작아 고지는 탈취되지 못했고 오히려 러시아군에게 203 고지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는 결과만 낳았다.
“포트 아르투르는 견고한데 이 고지만이 우리 요새의 약점이었군 그래. 서둘러서 보강해!”
그 전까지 극소수의 수비대와 방어진지만을 구축해왔던 스테셀 중장은 황급히 이 고지에 중포와 벙커, 철조망 지대를 더욱 보강했고 이제 203 고지는 다른 고지들이 부럽지 않을 만큼 난공불락의 요새로 탈바꿈했다.
《 전황의 반전 개시, 280mm 유탄포의 뤼순 배치 》
하지만 이즈음 대본영에서는 전황을 타개할 획기적인 무기를 투입하기로 결정을 내린다. 바로 280mm 유탄포가 그것이다. 일본의 유명한 대포 장인이자 육군 심사부장인 아리사카 나리아키라 소장은 육군 참모본부 차장 나가오카 가이시 소장을 방문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제안을 했다.
“이보게 나가오카, 내가 보기에 뤼순은 말이지.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는 도저히 함락시킬 수가 없어”
그 소리를 들은 나가오카 가이시 소장은 울분이 가득 찼다. 안 그래도 그 문제로 몇 차례나 이지치 고스케 소장에게 작전을 변경해 203 고지를 공략하라고 간곡히 부탁을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 소리를 지금 여기에서 듣고 있는 것이다. 나가오카 가이시 소장은 아리사카 나리아키라 소장에게 되물었다.
“그럼 무슨 좋은 작전이라도 있습니까?”
“이보게나, 나는 작전에 관해서는 문외한이야. 작전 같은 것은 절대 묻지 말게. 대신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대포인데 지금 뤼순에 가지고간 대포로는 저 요새를 파괴할 수가 없단 말이지. 그래서 말인데…… 내 생각에는 280mm 유탄포를 보내는 것이 어떨까 싶네만”
“예?! 뭐…뭐를 보내자고 하셨습니까?! 280mm 유탄포를…”
나가오카 가이시 소장으로서는 경악할 만한 발언이었다. 이 포는 이탈리아제를 국산화한 것으로 당시 해안포로 운용하고 있었다. 배치는 일본 국내의 해협이나 도쿄 만과 오사카 만의 입구와 근처의 곶이나 섬에 설치해 어떠한 적함이든지 진입을 시도할 때 포격해 격침시키는 것이 주임무였다. 1883년 오사카 포병 공창에서 국산화를 위해 개발을 시작했는데, 초창기 일본의 주철 제조 기술이 충분치 않아 어쩔 수 없이 원산지인 이탈리아의 그레고리니 주철을 수입해 제조하는 방식으로 마침내 1884년 최초의 시제품이 완성되었다. 최초의 시험 발사는 오사카 부의 신타야마( 信太山 )의 구릉지대에서 실시되었는데 발사 시의 반동으로 천지를 뒤흔들 만한 포성 및 진동이 일어났다고 한다. 육군은 이 포의 성능에 만족해 즉시 도쿄 만의 간논자키에 전용 진지를 구축하고 배치했다. 이후 일본의 주철 제조 기술이 점차 향상됨에 따라 1893년, 그레고리니 주철 수입을 중단하고 국산 가마이시( 釜石 ) 선철로 교체하여 수십문 단위로 생산이 되었다.
이 포는 워낙 거대한 나머지 전용 포가가 필요했고 기초는 콘크리트로 견고하게 구축해야하는 단점이 있었지만 그 위력 하나는 확실했다. 아리사카 나리아키라 소장은 바로 이 포를 뤼순으로 보내자는 제안을 한 것이다.
“이 녀석이라면 뤼순 요새의 콘크리트 벽체를 날려버릴 수 있어. 설사 부수지는 못해도 러시아 녀석들에게 주는 심리적 동요는 클 것이야”
나가오카 가이시 소장은 그래도 약간은 우려가 있었다.
“이 포를 탈거하면 본토 해안 방비가 염려됩니다만…”
“이 사람아! 지금 뤼순 때문에 나라 전체가 망해가고 있어! 나라가 망한 뒤에 해안 방비가 다 무슨 소용인가?”
이 제안에 들뜬 나가오카 가이시 소장은 곧 야마가타 아리토모 원수를 찾아가 보고했다. 이에 야마가타 원수는 “아리사카가 말하는 것이라면 틀림없을 것일세. 육군대신과 상의해 보도록” 이리하여 나가오카 가이시 소장은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다케를 찾아가 이 안건과 취지, 기타 사항을 자세히 설명했지만 데라우치 대신은 처음부터 나가오카 가이시 소장을 덜렁이로 취급했기 때문에 몇 차례나 거절했다.
하지만 워낙 나가오카 가이시 소장이 끈질겼기 때문에 결국 그도 허가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나가오카 가이시 소장은 즉시 제3군 참모장 이지치 고스케 소장 앞으로 다음과 같은 전문을 타전했다.
“공성용으로 280mm 유탄포 4문을 투입할 준비에 착수함. 2문은 은현( 隱顯 ) 포가, 나머지는 심상( 尋常 ) 포가로 9월 15일까지 다롄만에 도착시키려함. 의견 있으면 경청하고 싶음”
이 전문에 대한 이지치 고스케 소장의 답변은 예상 범위 내에서 정확하게 돌았다.
“보낼 필요 없음”
정말 전사에 있어 이처럼 구제불능의 무능아가 또 있을까? 싶지만 당시 이지치 고스케 소장이 그러했다.
“나가오카는 보병 출신이라 280mm 유탄포가 얼마나 거추장스러운지 모른다. 일단 콘크리트가 마르는데만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고 그 육중한 포를 다 설치하는데 만도 3주는 걸릴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만큼 공격 시기도 늦춰진다”
문제는 당시 이 거포가 아무리 분해 및 운반이 어려워도 최소한 10일 정도면 충분히 설치가 가능하다는 점이 이 분야의 상식으로 통했다는 점이다. 여기에 당시 일본 최고의 대포 전문가 아리사카 나리아리카 소장 외에 이 280mm 유탄포의 전문가들을 모아 이른바 “포상 구축반”을 창설함으로써 이 포의 운용이 더욱더 효과적으로 향상되었다. 포상 구축반의 지휘관 요코다 미노루 대위는 나가오카 가이시 소장에게 확언했다. “걱정마십시오. 이 포의 설치에는 9일이면 충분합니다.” 실제 포상 구축반은 다롄만에 상륙한 이후 단 9일 만에 이 포를 거치함으로써 그 말이 허언이 아님을 입증해보였다. 그 결과 당초 4문을 보낼 예정이었던 280mm 유탄포는 6문으로 늘어났고, 종국에는 18문까지 증가했다.
《 무모한 공세의 반복, 마지막 예비부대 제7 보병사단, 뤼순으로!! 》
하지만 280mm 유탄포가 도착해 뤼순 요새를 향해 포격을 시작했지만 전황은 한동안 나아지지 않았다. 9월이 지나 10월이 되었지만 일본 제3군은 뤼순 요새의 그 어떠한 보루나 진지 1개소도 점령하지 못한 상태로 사상자만 늘어간 것이다. 당연히 일본 본토에서는 난리가 났다. 막대한 손실로 인해 보충병의 징집이 시작되었지만 그 한계가 드러날 것이 뻔했고 대본영에서는 막 신규 편성된 현역병 사단인 제7, 8 보병사단을 뤼순으로 파견해야 하는지에 대해 격론이 벌어졌다.
이미 제3군의 사상자가 2만 명을 훌쩍 뛰어넘어 3만 명을 바라보는 전례 유례가 없는 기록을 세우고 있는데도 이지치 고스케 소장은 고집스럽게 정면 공격만을 주장하는 판국이었고 계속 대본영에 포탄과 보충병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마침내 노기 마레스케 중장을 제3군 사령관에 추천한 야마가타 아리토모 원수조차 분통을 터뜨렸다.
“노기를 갈아 치워버려~!!”
물론 이는 노기 마레스케 중장의 직속 상관인 오야마 이와오 원수의 승인이 필요한 것이었지만 오야마 이와오 원수는 “그렇게 하면 오히려 아군의 사기만을 저하시킬 따름이다”라며 묵살해 버렸다.
다만 오야마 이와오 원수도 바보는 아니어서, 저 눈엣가시 같은 이지치 고스케 소장을 당장 내치고 싶었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이 모든 패전의 원인이 “노기 마레스케 중장과 이지치 고스케 소장에게 있다”는 여론을 형성하게 되고 자칫 아군의 사기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야마가타 원수의 요청을 묵살한 것이다.
대신 그는 차선책을 택했다. 바로 자신의 참모장인 고다마 겐타로 중장을 뤼순에 파견하는 것이다. 고다마 겐타로 중장이 저 멍청한 이지치 고스케 소장의 작전권을 박탈해 대신 지휘하게 하는 것이 절묘한 선택이었지만 문제는 고다마 겐타로 중장이 사하( 沙河 )의 대회전을 수행 중이었기 때문에 당장 뤼순으로 갈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자연히 시간이 지나면서 오야마 이와오 원수의 참모들도 불평을 내뱉기 시작했다.
“오야마 각하는 뤼순에서의 무익한 대량 희생이 이지치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잘 아시면서도 교체하지 않는 것은 역시 같은 사쓰마 출신이라서 그런 것일까?”
그 사이 대본영에서는 9~10월에 걸친 막대한 희생으로 인해 급격하게 전력이 소모된 제3군에 마침내 마지막 남은 예비부대인 오사코 나오도시 중장의 제7 보병사단을 증원하기로 결정했고 이로써 일본 본토에는 사실상 예비부대가 전무하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오야마 이와오 원수는 이 금쪽같은 사단이 이지치의 멍청한 작전으로 시체더미로 변하는 것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었다.
고다마 겐타로 중장 역시 자신의 예하부대가 포탄 부족에 시달리는 와중에서도 신규 생산되는 포탄들의 대부분을 뤼순의 제3군으로 보내는 것을 허가하는 와중에 이제 마지막 남은 예비 사단이 제1, 9, 11 보병사단처럼 허망하게 시체더미로 변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 실제 9월 중순의 전황은 그야말로 일본 제3군에게 절망적이었다. 해군 중포대의 치열한 포격으로 뤼순 시가지에도 포탄이 떨어지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육군은 여전히 지난날의 전술을 되풀이할 뿐이었던 것이다.
아나톨리 미하일로비치 스테셀 중장의 밀사로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한 라디비르 중위는 서방 기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본군은 왜 그렇게 많은 병사들을 죽이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내 말을 도무지 못 믿을 것인데 예를 들어주자면 9월 14일, 당시 제2, 제3포대 사이의 협소한 지대에만 2,600구에 이르는 일본군의 시체가 쌓여있는 것을 봤다. 아군 사령부에서도 왜 이리 많은 병사들을 헛되이 죽게 했는지 그 작전 내용을 알아내는데 무척 애를 먹어야 했다”
라디비르 중위의 증언으로는 워낙 많은 일본군의 시체가 그대로 방치되는 통에 시체 썩는 악취가 사방에 진동하여 도무지 정상적으로 작전을 수행하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이 때문에 러시아군 수비대는 포대에서 아예 교대 근무를 실시했고 다음 교대병들은 손수건에 나프탈렌을 묻혀 코를 막은 상태로 이동해야 했다.
일본 제3군의 끈질긴 공격 하에 러시아군의 감투정신도 그만큼 강해졌다. 한 예로 한 중령이 이끄는 러시아군 소부대는 사실상 함락 직전의 포대를 사수했는데 이 부대는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저항해 결국 단 한명도 남김없이 전멸해 버렸다.
하지만 스테셀 중장은 곧 새로운 부대로 이 포대를 보강했고 결국 일본 제3군은 또다시 시체의 산을 남기고 소멸되어야 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 원수는 분노로 몸이 달아올랐다. 벌써 2차례에 걸친 총공세로 사상자가 너무나도 많이 늘어나버린 것이다. 그는 제7 보병사단을 파견하면서 다음과 같은 한시를 지어 전보로 보냈다.
[ 백탄 격뢰에 하늘도 놀라고 포위 반 년에 일만 시체 구르네 정신이 뭉치면 무쇠보다 굳도다 단숨에 쳐부숴라, 뤼순의 성 ]
《 비극으로 끝이 난 제3차 총공세, 적에게 준비까지 시켜주고 병사들을 내던져주다! 》
마침내 11월 26일, 일본 제3군은 제3차 총공세를 개시했다. 본토에서 증원된 금쪽같은 제7 보병사단까지 합류한 공세였지만 그 공세계획은 이전의 그것과 별 차이가 없었다는 점이 비극을 야기시켰다. 작전 계획대로라면 제1 보병사단은 송수산을, 제9 보병사단은 이룡산을, 제11 보병사단은 동계관산을 공격하는 무모한 정면 돌격이었던 것! 그리고 이 제3차 공세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결사대가 있었으니 바로 ‘시로다스키 대’였다. 각 사단에서 특별히 선발된 3천명의 인원으로 편성된 이 결사대는 도쿄, 야마나시, 치바, 사이타마, 홋카이도 등 각 사단들을 총 망라해놓은 것 같았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이 공세는 막대한 희생만을 남긴 채 실패했다. 스테셀 중장은 일본군이 항상 26일에 총공세를 감행한다는 것을 그 간의 방어전을 통해 잘 알고 있었고 이번엔 이들을 열렬히 환영해 주기 위해 특별히 서치라이트와 수류탄, 폭약을 각 포대와 보루에 충분히 배치시켜 놓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대본영에서도 왜 적이 눈치 채기 좋도록 26일에 공격을 가하는지 질책이 만만치 않았지만 이지치 고스케 소장의 답변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그 이유는 세 가지 때문이다. 첫째는 화약 준비 때문이다. 이것을 준비하는 데만 1개월이 소요된다. 둘째는 남산을 돌파한 날이 26일이기 때문에 운이 좋은 날이다. 셋째는 26이라는 숫자는 짝수이기 때문에 둘로 쪼갤 수 있다. 그러니까 이 날은 바로 뤼순 요새를 쪼개버리는 날이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고 유치한 주장이란 말인가? 이지치 고스케 소장은 이런 말도 안되는 이유로 그 숱한 부하들을 러시아군의 먹잇감으로 던져준 것이다. 공세 시작 1일 전인 25일 정오, 스테셀 중장은 예하 부대에 전투 준비 명령을 내렸고 각 포대와 진지에 러시아군이 배치되었다. 기관총 사수들은 M1893 맥심 중기관총의 탄띠와 약실을 점검했고 포병들은 중포의 약실과 폐쇄기에 낀 이물질들을 말끔히 닦아 냈다.
그러는 동안 더 어이없는 사태가 벌어졌으니 일본 제3군의 포탄을 가득 실은 차량들이 줄지어 이동하는 광경이 각 포대와 보루에서 목격된 것이다. 잇따라 보고를 받은 스테셀 중장은 어이가 없었다.
“야간에 공세를 준비한다는 부대가 기도비닉을 유지하는 전술적인 상식조차 모른다는 말인가?”
아무튼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일본군이 공격을 한다는 것은 확실했고, 콘트라첸코 소장은 즉시 극동함대에서 차출한 해군 육전대 제10 중대를 추가로 요새에 배치하는 등 방어선을 더욱 보강했다.
“일본군이 몰려온다. 녀석들은 그렇게 당했으면서도 전혀 공격 방식과 작전을 변경하지 않고 마치 수레바퀴가 일직선으로 굴러가듯 동일한 방식으로 계속 공격해 오고 있는 것이다. 26일! 바로 오늘 이 고지를 녀석들의 피로 물들여 주자!!”
마침내 11월 26일, 280mm 유탄포를 필두로 해군의 중포, 산포, 야포들이 잇따라 포화를 뿜으며 뤼순 요새의 각 능선을 포격했다. 그리고 결사대인 시로다스키 대는 제2 보병여단장을 맡고 있던 나카무라 소장의 지휘 하에 쿠로파트킨 포대 북쪽에서 집결해 뤼순 시가지를 목표로 수사영 동북 고지의 어두운 지대를 따라 진격했다.
이 곳은 고지의 그늘에 해당되는 지점이라 야간에는 러시아군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이었고 자연히 공격지점으로 선정한 것은 좋았지만 하필 이 지역을 감시하는 러시아군 진지에 서치라이트가 배치되어 있었던 것이 이들에게 불행이었다.
야음이 되어 러시아군의 서치라이트가 발동되자 수사영 동편의 하천을 따라 진군하던 시로다스키 대는 그대로 노출되었고 20시 40분, 30년식 소총에 착검한 시로다스키 대는 함성을 지르며 송수산의 보조 포대를 향해 돌격을 감행했다. 서치라이트가 지속적으로 이들을 비추는 동안 M1893 맥심 기관총의 탄막과 주변 포대들에서 발사된 포탄의 세례가 이들을 강타했고 21시 40분이 경과할 무렵 3천명에 달했던 시로다스키 대는 이미 태반에 이르는 인명피해를 입고 사실상 궤멸되었다.
간신히 벙커에 육박한 일본군을 향해 러시아군은 수류탄과 공병용 폭약을 투척했고 그 결과 주변의 바위는 피와 시체의 바다를 이뤘다. 결국 시로다스키 대의 궤멸 소식은 그 동안 잠자코 있던 고마다 겐타로 중장마저 크게 격노하게 만들었고 결국 그가 뤼순으로 오게 되는 단초를 제공했다.
《 고다마 겐타로, 뤼순으로 오다! 203 고지의 함락과 전투의 마무리 》
시로다스키 대의 참혹한 궤멸을 끝으로 제3차 총공세는 사실상 실패했다. 제1, 9, 11 보병사단의 피해 또한 막심했고 중대나 대대급 제대는 사실상 전멸이나 마찬가지인 상태였다. 오히려 이지치 고스케 소장이 그리도 거추장스럽다고 비하했던 280mm 유탄포가 이룡산과 송수산, 동계관산의 포대들에 계속 피해를 입혀 러시아군의 사상자는 물론 보수 공사마저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는 점이 유일한 전과라 할 수 있었다.
한편 만주군 총참모장으로서, 육군 대장으로 진급한 상태였던 고마다 겐타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었다. 이 이상 두고 봤다가는 그야말로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가 무너지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즉시 자신의 막료인 마쓰카와 도시타네 대좌와 이구치 쇼고 소장을 호출했다. 얼떨결에 고다마 겐타로 대장의 사무실에 들어온 마쓰카와 대좌와 이구치 소장은 영문을 몰랐다. 그런 마쓰카와 대좌를 향해 고마다 겐타로 대장은 갑자기 성을 내면서 말했다.
“마쓰카와군, 나 지금 뤼순에 좀 가봐야겠어. 뤼순이 저 꼴로 계속 이어진다면 이제 만주군 전체가 붕괴되는 것은 시간문제야”
그러자 마쓰카와 대좌는 당연한 일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가 뤼순에 가는 것은 반대했다. 안 그래도 지난 번 고다마 겐타로 대장이 뤼순으로 가는 바람에 러시아 육군과 사하 대회전이 벌어져 초반 작전을 지휘하느라 얼마나 애를 먹었단 말인가? 거기에 지금 자신들의 북방에는 쿠로파트킨이 지휘하는 러시아의 대군이 포진하고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각하, 각하께서는 어찌 지난날의 실수를 되풀이하실 작정입니까?”
“뭐… 뭐야?!” “지난번처럼 독전을 위해 가신다는 것은 전혀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노기군 사령부에 불만이 있으시다면 노기군 참모부장인 오바 지로 중좌라도 호출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런 한가로운 일을 하러 가는 것이 아니야! 지난번에는 독전이었지만, 이번엔 내가 직접 제3군을 지휘하러 가는 것일세!”
그 말에 마쓰카와 대좌는 할 말을 잃었지만 고다마 겐타로 대장의 의지는 확고했다. 그는 오야마 이와오 원수를 방문한 후 곧바로 뤼순으로 향하는 열차에 올랐다. 그 사이 노기 마레스케 중장은 그 동안의 침묵을 깨고 11월 27일을 기해 203 고지를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고다마 겐타로 대장이 남하하던 그 시각, 제3군 사령부는 드디어 203 고지를 향해 제1 보병사단과 제7 보병사단을 전개시킨 것이었고 이 조치가 3개월 전에 실행되었다면 일본군은 그토록 많은 사상자를 내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러시아군이 요새화시킨 203 고지 공격에서 제1 보병사단과 제7 보병사단은 막대한 사상자를 내었지만 분명한 것은 이제 일본군의 공격이 요새 전 구간이 아닌 이 203 고지를 향해 집중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금주성 동문을 공격하다가 전사한 노기 가쓰스케 중위의 뒤를 이어 차남인 노기 야스스케 소위 역시 이 203 고지 공략전에서 전사하니 노기 마레스케 중장은 이 전쟁을 통해 두 아들을 모두 잃는 슬픔을 겪어야 했다.
여하튼 203 고지 전투는 점차 치열해져 러시아군의 피해도 심각할 정도로 늘어갔다. 203 고지는 제3군의 시체들로 뒤덮였지만 여전히 생존한 병사들이 끈덕지게 달라붙어 있었고 러시아군 역시 투입할 수 있는 모든 전력을 이 고지로 집중시켰다. 수비작전을 총 지휘한 콘트라첸코 소장은 휘하 지휘관들을 집합시켜 다음과 같이 훈시했다.
“병사들은 일본군의 착검돌격에 겁을 먹고 있다. 이들이 겁내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일본군보다 먼저 행동을 개시하고 먼저 돌격할 것이며 그리고 일본군보다 더 용맹스럽고 저돌적으로 돌격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대들이 먼저 군도를 휘두르며 앞장서서 돌격을 지휘하라!”
야간이 되자 양측의 격전은 더욱 심화되었고 마침내 먼동이 트자 203 고지는 온통 시체들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최초 연대 규모로 공격을 감행한 일본군은 203 고지의 동북편을 장악한 대가로 단 40명만이 살아남아 있었다. 1개 연대 병력 중 단 40명만이 생존한 것이다! 날이 밝아 곧 러시아군이 몰려올 것이고, 단 40명만으로 이들을 상대한다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결국 이들은 20명씩 조를 이뤄 203 고지를 내려왔고 공세는 또다시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는 동안 마침내 고다마 겐타로 대장이 뤼순에 도착했다. 현지에 도착하자마자 고다마 겐타로 대장은 엉망진창이 되어있는 제3군 사령부의 실상에 크게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통신소를 정거장에 설치하지 않은 건가? 그러니까 매번 지기만 하는 거야! 뤼순 요새를 함락시키기 전에 발틱함대가 들이닥치면 일본은 끝장이라는 것을 모르는가?! 우리 해군이 그래서 비명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고다마 겐타로 대장의 분노는 자연 졸렬한 작전을 지휘한 이지치 고스케 소장에게 집중되었다.
"이지치군,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것인가?! 자네의 작전 지휘로 얼마나 많은 병사들이 저 고지에 뼈를 묻어야하는지 아는가?! 지금 그대가 파리떼처럼 죽이고 있는 병사들은 바로 일본 국민들이야!!"
이지치 고스케 소장은 그야말로 자살하고 싶을 정도로 심각한 질책과 폭언을 들어야 했다. 생각 같아서는 고다마 겐타로 대장을 죽여버리고 싶을 심정이 들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고다마 겐타로 대장의 지적은 분명 일리가 있었다. 그는 이지치 고스케 소장을 신랄하게 질책한 후 곧바로 노기 마레스케 중장을 만났고 이 두 장성의 만남 이후 작전권은 사실상 고다마 겐타로 대장에게 넘어갔다.
그는 우선 제3군의 참모들을 전원 집합시킨 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본인은 오야마 총사령관 각하의 대리로서 여기에 와 있다. 거기에 관한 서장은 여기 있으니 참고하고, 제3군 사령관의 직권을 일시 정지한 후 내가 대행하기로 했다. 거기에 대한 사항도 여기 오야마 총사령관의 서장이 있고, 노기 마레스케 중장으로부터 권한 대행 서장을 받아가지고 있다"
고다마 겐타로 대장은 서장을 공개한 후 본격적으로 작전 변경을 지시했다.
"우선 이 전황을 타개하기 위해 공격 계획을 전면 수정한다. 첫째, 203 고지의 점령을 최우선으로 선정하고 화석령 부근에 있는 중포 부대를 신속히 고기산으로 이동시켜 고지 부근의 의자산을 제압한다. 둘째, 203 고지를 점령한 다음 주야 15분 간격으로 280mm 유탄포를 발사해 적의 역습에 대비한다"
고다마 겐타로 대장의 명령을 수령한 참모들은 어이없어했다. 이는 포병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분명한 것은 명령은 무조건 복종해야한다는 점이었다.
"앞으로 24시간 이내에 이 명령을 완수하라! 방금 들은 바로는 203 고지 서남부 일각에 100명도 채 안 되는 병사들이 수일 전부터 고립되어 있다고 한다. 그들은 보병의 증원은 고사하고 포병의 원호도 없이 그대로 찬바람 속에서 사수하고 있다. 그 모습을 여기에 있는 누군가 본 일이 있는가?!"
참모들은 할 말을 잃었다. 그만큼 제3군 사령부는 후방의 잠망경 없는 잠수함이었던 것이다. 얼마안 가 참모부장 오바 지로 중좌를 위시한 3명의 참모들이 완전군장을 꾸려 전선 시찰을 나갔다.
또한 고다마 겐타로 대장은 후방에 위치한 사령부를 즉시 전방인 수사영 근처로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12월 3일, 고다마 겐타로 대장은 전선 시찰을 나갔다.
그 날은 마침 휴전을 한 기간이었는데 문제는 러시아군은 워낙 사상자가 적다 보니 시체 치우는 작업을 금새 끝마치고 파괴된 포대를 보수하는데 전력을 기울일 수 있었지만 일본군은 문자 그대로 시체 치우기만을 수행한 것이다. 고다마 겐타로 대장은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그는 12월 4일까지 정해진 휴전 기간을 이용해 러시아군을 골탕먹여주기로 결심했다. 그는 전력이 소모된 제7 보병사단 사령부를 찾아 사단 참모들에게 공격 계획 작전도를 작성해 오도록 지시했는데 작성된 계획도는 어이없게도 이지치 고스케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이 녀석들이 그 많은 병사들을 죽여왔군!!"
고다마는 크게 분노했고 제7 보병사단 참모들은 그 날로 지옥과 이승을 오가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마침내 1904년 12월 5일, 화석령에서 이동해온 중포와 산포들이 203 고지를 향해 포격을 퍼부었다. 203 고지와 의자산의 포대에서도 중포들이 반격을 해왔지만 근거리로 접근해 보다 정확한 명중탄을 날릴 수 있는 일본 제3군이 유리했다. 203 고지 정상의 러시아군 진지는 잇따라 정확한 포격을 얻어맞으며 파괴되었고 고지 하단에서 돌격을 준비하는 제7 보병사단의 병사들은 모처럼만에 이런 정확한 포격을 받아 사기가 충천했다.
그 시각 고다마 겐타로 대장은 203 고지에서 비교적 가까운 구릉으로 올라 망원경을 이용해 203 고지 산정을 살펴봤다. 그 곳에는 숱한 시체들을 뒤로한 채 자신들의 위치를 지키고 있는 100명도 채 안 되는 생존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저들이야 말로 진정한 일본인의 용기요, 기백이다. 저 모습을 보고 감동하지 않는 놈은 인간이 아닐 것이야"
고다마 겐타로 대장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 해군의 중포들이 잇따라 불을 뿜어 러시아군의 포대를 파괴했다. 그만큼 고다마 겐타로의 중포 진지 전환은 탁월한 선택이었던 셈이다. 그 동안 일본 제3군이 무수한 사상자를 낸 것은 203 고지의 M1893 맥심 기관총의 탄막이 한 몫 두둑이 했지만 그 외에도 주변 고지의 포대에서 날아온 중포의 탄착으로 인한 것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러시아군의 포병 화망이 워낙 절묘해서 일본군은 공격 시마다 막대한 인명 피해를 냈는데 이제 그것이 종료되는 순간이었다.
《 1904년 12월 05일, 오전 10시 20분!! 》
시간이 지날수록 의자산을 비롯한 203 고지 주변의 포대들이 점차 침묵하기 시작했고 오전 09시를 기해 마침내 제3군의 돌격이 시작되었다. 때마침 전선에 도착해 전개를 마친 280mm 유탄포들이 일제 포격을 시작했고 일본 제3군은 제대로 된 포격 지원을 받아가며 마침내 러시아군의 거점을 하나 둘씩 장악하기 시작했다. 203 고지의 서남방면에서 공세를 시작한 사이토 소장의 종대는 30명씩 편성된 결사대를 축차적으로 올려 보냈고 마침내 오전 10시 20분, 203 고지의 서남방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그토록 많은 희생자를 냈음에도 함락시키지 못했던 203 고지에 마침내 일장기가 휘날렸고 그 광경을 지켜본 노기 마레스케 중장은 조용히 두 눈을 감으며 감격했다.
동시에 203 고지의 동북 방향에서 공격해 들어간 요시다 헤이타로 소장의 종대는 러시아군의 완강한 저항을 받아 잠시 공세를 중지했지만 오후 01시 30분을 기해 공격을 재개했다. 공격의 선봉은 제22 보병연대 1대대 1중대와 제17 보병연대가 맡았다. 그 결과 공세 재개 단 30분 만에 요시다 헤이타로 소장의 종대는 203 고지 동북 방면을 점령했다. 병사들은 30년식 소총에 매단 일장기를 휘날리며 일제히 "덴노 헤이카, 반자이! 반자이!! 반자이!!!( 천황 폐하 만세!! )를 연창했다.
마침내 고다마 겐타로 대장이 작전 계획을 변경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무려 6,200명에 달하는 일본군을 희생시킨 203 고지가 5시간 만에 함락되었다. 그것은 실로 기적과도 같은 것이었고 시종일관 전투 상황을 지켜본 고다마 겐타로 대장과 노기 마레스케 중장은 감격할 수밖에 없었다. 203 고지를 확실하게 장악한 14시, 마침내 203 고지 정상에서 전화가 걸려왔고 고다마 겐타로 대장은 신속하게 지휘소로 달려가다가 미끄러지고 말았다. 노기 마레스케 중장이 신속히 다가가 그를 일으켜줬고 곧 통화를 할 수 있었다.
"지휘부의 고다마다. 뤼순항이 내려다 보이는가?"
고다마 겐타로의 첫 통화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것은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고 이 고지를 함락시킨 이유였기 때문이다.
"예! 아주 선명하게 보입니다. 러시아 함대가 아주 똑똑히 보이고 있습니다!!"
“좋아!!”
고다마 겐타로 대장은 매우 만족했고 즉시 280mm 유탄포대에게 203 고지에서 불러주는 좌표대로 포격을 가해 극동함대의 전함들을 격침시킬 것을 지시했다. "공성포병 사령관은 즉시 280mm 유탄포로 뤼순항 내의 적 함대를 포격해 모조리 격침시켜라!" 약 10분 후 요란한 포성과 함께 280mm 유탄포들이 일제 포격을 개시했다.
그리고 그 명중률은 지독하게 높았으니 뤼순항 내에 정박해 있던 배수량 10,960톤의 전함 "폴타바"가 가장 먼저 대폭발을 일으키며 서서히 침몰하기 시작했다. 이어 배수량 12,900톤의 전함 "레트비잔"이 8발이나 얻어맞으며 승함해 있던 뷔렌 제독이 부상을 입었고 사실상 고철로 변해버렸다.
~~~~~~~~~~~~~~~~~~~~~~~~~~~~~~~~~~~~~~~~~~~~~~~~~~~
해발 252m인 서울의 남산보다도 낮은 요동반도끝의 203고지. 여순항을 내려다보는 이 고지는 피비린내나는 전투로 양측 수만명의 사상자를 내며 러일전쟁 승패의 분기점이 되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희생자를 내고 끝내 이 고지를 차지한 일본군은 러시아 극동함대를 격파하고 만주에 진출한 육군의 해상 보급로를 안전하게 확보하였으며 동해에서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격파한 해군의 대승과 함께 러일전쟁을 승리로 마감하게 되었다.
일본 육 해군의 칭송을 위해 이 영화를 포스팅하는것은 아니다. 이 러일전쟁의 결과로 인해 완전히 일본의 수중에 떨어져버린 우리 선조 조선의 운명을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함이다. 내정의 분열과 혼란 속에서 아무런 준비도 할 수 없었던 그 시대 우리의 지도자들이 애통스러울 뿐이다. 그보다도 더 슬픈것은 그로부터 1세기 남짓의 세월이 흐른 오늘날에도 우리조국의 분열상은 변함이 없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역사상의 사실이지만 일본의 당시 상황에서 부러운것은 바람앞의 촛불이 된 그들의 조국을 위하여 모든 삶을 불태워 몰입하였던 전략과 지휘의 천재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일본 만주군 총사령부의 참모장 고다마 켄타로 육군 대장과, 러시아 발틱 함대를 격파하여 동해해전을 사상최대의 승전으로 이끈 일본 연합함대 작전참모 아키야마 사네유키 해군중좌의 두사람이다. 수많은 공헌과 희생이 있었겠지만 이 두사람의 천재적 전략과 실행력이 국운을 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고해도 과언은 아니다.
과연 하늘은 우리에게 이런 천재나 지도자를 허락하지 않는 것일까. 작금의 국정 난맥상을 바라보는 소시민의 가슴은 바위처럼 무겁기만하다. <운향>
'★ Billy의 잊지못할 추억의 명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3 고지 (러일전쟁 영화) 토오에이샤 제작 - 1 (0) | 2018.11.26 |
---|---|
Hanover Street 하노버 스트리트 - 해리슨 포드, 레슬리 앤 다운 (0) | 2018.02.13 |
닥터 지바고 영화 - 오마 샤리프, 줄리 크리스티 (0) | 2017.02.12 |
엘 시드 (El Cid)- 찰톤 헤스톤, 소피아 로렌 (0) | 2017.01.25 |
My name is Nobody (무숙자) - 테렌스 힐, 헨리 폰다 (0) | 2017.0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