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 고지 (러일전쟁 영화)
토오에이샤 제작
이상 동영상 출처 http://cafe.daum.net/Europa/3L0P/2063
러일전쟁 발발의 역사적배경과 교훈
러일전쟁은 동아시아에서 한반도를 통해 남하하여 태평양으로 진출하려는 러시아와 한반도를 통해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일본간의 전쟁으로 영국의 패권에 도전하려던 러시아의 좌절로 볼 수 있다. 러시아는 중앙아시아, 동아시아 및 동유럽과 발칸반도에서 영국과 대립하고 동아시아에서는 영국이 일본을 이용하여 러시아를 제어한 결과 무능한 조선만이 그 희생양이 되었다. 러일전쟁으로 일본은 아시아의 중화질서와 서구의 지배에서도 벗어나 자주적인 강대국이 된다.
다른 관점으로는 약육강식의 제국주의 전쟁의 시대 산물로 신흥 통일 국가 일본은 근대화 이후 자신감을 표출하며 청일전쟁 승리의 기억을 잊지 못한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청제국의 3년간의 재정에 맞먹는 배상금으로 엘리트양성과 러일전쟁을 준비하며 상비군 20만과 예비군 100만명을 양성한다. 청일전쟁후 랴오둥반도, 만주, 대만의 할양 받았으나 러시아 주동의 삼국간섭으로 러시아에 대한 격렬한 반감을 키우며 10년간 절치부심한다.
러시아는 오스만터키와 영국의 견제로 만주진출정책으로 전환하고 블라디보스톡과 려순항을 건설하고 동청철도를 부설한다. 열강의 중국 분할정책으로 의화단운동에 개입하여 출병후 철군을 거부하한다. 미국과 영국은 일본을 이용하여 러시아를 견제하려 영일동맹과 카츠라-태프트조약을 맺어 일본에 차관과 석유자원을 공급한다. 또한 일본은 러·일 전쟁의 막대한 전비 17억 엔 중에서 8억 엔을 영국과 미국에서의 외채 모집으로 충당했다.
한편 조선은 동학농민혁명후 뒷수습으로 갑오개혁을 시작하나 역량의 부족으로 형식적인 개혁이 구호에 그치게 된다. 외교적인 무능으로 청일전쟁후 9년간을 속수무책으로 허송세월하였으며 극도의 국력 열세로 빚어진 필연적 결과였다. 영국과 미국등 서양의 해양세력들은 중국에 야심을 가져 조선은 교류나 전략적가치가 없다고 단정하였고,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대륙세력은 러일전쟁을 통해 대리전을 벌이지만 실패하여 조선을 배상대가로 일본에 넘기고 만다.
당시 명성황후 정권은 러시아를 이용하여 일본을 배척하려는 친러정책을 채택하였으며 명성황후가 일본에 의해 참살된 을미사변후 고종황제는1년이상 러시아 공관으로 아관파천하였으며 막대한 이권의 지불하여 전국을 수탈하게 하였다. 일본은 봉건제를 벗어나 부르조아지를 창출하여 자본주의의 국가주의로 군사력을 키우고 법치로 전환한후 공업국의 기틀로 불평등조약을 폐기하는등 자주적 강국이 된다.
러·일전쟁 발발, 근대적인 요새의 위력을 체감하는 일본군
1904년 2월 초 일본은 드디어 임시각의를 통해 개전을 결정하였다.동년 2월 8일, 연합함대의 뤼순항 기습 공격으로 발발한 러·일전쟁은 초반 일본군의 우세 속에 진행되었고 쿠로키 타메토모 대장의 제1군이 압록강을 돌파해 서진하는 한편, 오쿠 야스카다 대장의 제2군이 러시아 극동함대의 방해를 받지 않고 무사히 랴오둥 반도에 상륙해 극동함대가 갇혀있는 뤼순을 향해 진군을 개시했다.
하지만 5월 26일, 뤼순 외곽의 금주성과 남산에 대한 공세에서 제2군의 공격제대는 야전 축성의 달인이라 불렸던 콘트라첸코 소장의 지휘 하에 짦은 시간에 견고하게 축성된 러시아군의 요새로부터 쏟아지는 포격과 M1893 맥심 중기관총의 탄막 세례를 받아 무수한 시체더미로 변해버렸다. 이 난국은 제4 보병사단장 오가와 마다쓰구 중장이 기지를 발휘해 간신히 극복할 수 있었다.
오가와 마다쓰구 중장은 포병대의 집중 포격으로 러시아군의 진지를 뒤집어엎은 후 보병의 육탄돌격으로 마침내 남산 요새의 좌익을 함락시키는 전과를 거뒀지만 훗날 뤼순 요새 공략을 맡은 노기 마레스케 중장의 제3군은 이 이점을 전혀 활용하지 못하고 말았다.
《 뤼순 요새를 포위하는 일본 제3군 》
뤼순의 외곽인 금주성과 남산을 함락시킨 일본군이었지만 본토의 대본영은 제2군의 보고를 받고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이거 전문( 電文 )의 내용이 잘못된 것 아닌가? 300명을 3,000명으로 적은 것인가 말이야?”
센코쿠지다이( 戰國時代 ) 이래 단 한 차례의 전투에서 순식간에 3,000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냈다는 것을 그들은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일본군은 그제야 근대전이라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뼈저리게 깨달았지만 깨달았다는 것과 그것을 앞으로의 전투에 반영하느냐의 차이는 매우 큰 것이었고 당시 일본군의 입장에서는 반영하기를 기대한다는 것이 곤란했다.
하지만 일본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퇴각한 러시아군도 그다지 녹록한 입장은 아니었다. 뤼순 요새 사령관인 아나톨리 미하일로비치 스테셀 중장은 비록 벼락치기로 축성했다고는 하지만 위력적인 중포와 다른 서유럽 국가들보다 앞서 대량으로 도입한 M1893 맥심 기관총을 다수 배치했음에도 불구하고 금주성과 남산의 요새가 그토록 허망하게 함락되었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더욱이 외곽에 위치한 다롄에 주둔한 부대가 급하게 퇴각하는 통에 막대한 양의 군수물자를 파기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 이것은 이 막대한 양의 군수물자들이 일본군의 손아귀에 들어간다는 셈이었으니 러시아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죽쒀서 남주는 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나마 스테셀 중장에게 있어 다행인 것은 오쿠 야스카다 대장의 일본 제2군이 뤼순 요새 공략보다는 북진하여 요양에 위치한 러시아 육군의 주력과 대결전을 벌인다는 것이 기본 임무였다는 것이었고 금주성과 남산을 점령하자마자 곧 부대를 북쪽으로 진군시켰다는 점이다. 일본 육군 입장에서는 어디까지나 러시아 육군의 주력이 당면한 적이지 뤼순항에 틀어박힌 러시아 극동함대와 요새 수비대 따위는 포위해 아사시켜버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 이끄는 일본 연합함대를 위시한 일본 해군의 입장에서 뤼순항에 입항해 있는 극동함대는 분명 해양국가인 일본에게 있어 크나큰 위협이었고 실제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한 극동 분함대는 수시로 출동해 일본 육군 증원병력과 군수물자를 가득 실은 수송선들을 급습해 격침시키고 있었으므로 해군의 요청을 받은 육군은 점차 이 뤼순 요새 공략의 당위성에 고민을 하게 되었다.
“뤼순을 공격하는 것인가? 그렇게 되면 큰일인데”
청소년 시절부터 전장에서 세월을 보냈고 이후 타이완 총독과 육군장관까지 역임했으며 1905년이면 대장으로 진급할 예정이었던 육군 참모본부 차장( 陸謀本部 次長 ) 고다마 겐타로( 兒玉源太郎 ) 중장은 난색을 표했다. 안 그래도 200만이 넘는 병력을 보유한 러시아에 비해 일본은 그 10%인 20만명을 보유하고 있을 뿐이었다. 뤼순 요새를 공략하기 위해 안 그래도 부족한 병력을 또다시 분산시킨다는 것은 전략상 있을 수 없는 일!
하지만 당시의 전황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뤼순항의 극동함대가 황해로 튀어나와 일본 육군의 수송선을 습격하면 안 그래도 본토에서 물자를 수송해야하는 일본의 입장에서는 치명타가 되기 때문이었다. 결국 요양에서의 결전에 투입되어도 모자라는 전력인 제1, 9, 11 보병사단이 차출되어 제3군이 편성되었다.
“그래도 그다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겠지”
고다마 겐타로 중장은 그렇게 생각했다. 문제는 1904년의 뤼순은 1894년, 청·일전쟁 당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막강한 난공불락의 요새로 탈바꿈했다는 점이었지만……
《 콘크리트와 철조망, 중화기로 중무장한 난공불락의 요새, ‘포트 아르투르’ 뤼순!! 》
러시아가 포트 아르투르라 명명한 뤼순은 랴오둥 반도 전면의 금주 반도 첨단에 위치하고 있는 군항이다. 지금도 뤼순항을 감제하고 있는 고지군은 청 왕조 시절에는 독일인 설계 기사가 설계해 축성한 요새 외에 이렇다 할 방어 거점이 전무한 곳이었지만 러시아가 이곳을 조차한 후 ‘포트 아르투르’라 명명하면서 뤼순은 1894년 청·일전쟁 당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난공불락의 요새로 변해갔다.
이룡산( 二龍山 )과 동계관산( 東鷄冠山 ), 송수산을 위시한 주요 고지에는 견고한 콘크리트 보루로 보호받는 중포들이 포진한 견고한 포대들이 위치해 주위 고지로 기어오르는 적병들에게 강력한 포탄의 세례를 퍼부어줄 준비를 갖추고 있었고 고지로 향하는 저지대에는 전기식 철조망을 비롯한 두터운 철조망의 장벽이 가설되었다. 그리고 그 후방에는 콘크리트 벙커와 보루들이 일정 간격으로 배치되었는데 이 벙커가 뤼순 전투에서 숱한 일본군을 살육한 사신으로 등극했다.
그 원인은 바로 이 벙커와 보루에 2~3정씩 배치된 M1893 “맥심” 중기관총이었다. 러시아는 일찍이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대량의 맥심 기관총을 도입해 자국군에 배치했고 특히 극도로 험악해지는 일본과의 관계로 점차 일본이 도발할 가능성을 대비해 대량의 맥심 기관총과 중포를 극동으로 배치시킨 것이다.
특히 금주성과 남산의 방어선이 하루 만에 붕괴되자 충격을 받은 스테셀 중장은 각 포대와 보루를 보강했고 야전 축성의 달인 콘트라첸코 소장은 그 임무를 능숙하게 수행해 냈다. 각 포대와 보루는 콘크리트 옹벽으로 보호를 받으며 지하 공간까지 가설해 쉽사리 노출이 되지 않도록 높이가 낮춰졌고 각 포대와 보루 사이에 지하 통로까지 가설되었다. 이 때문에 일본군의 격렬한 포격에도 불구하고 벙커와 보루로 대피한 러시아 육군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 동안 일본 육군에서는 제3군 사령부의 편성을 완료했다. 사령관은 조슈 출신인 야마가타 아리토모 원수의 추천으로 노기 마레스케 중장이 임명되었다. 하지만 그는 근대전을 지휘하기에는 부적합한 인물이었고 이는 같은 조슈 출신인 고다마 겐타로 중장조차 염려하는 부분이었다. 이 때문에 제3군 참모장에 독일의 참모본부에 유학했던 포병과 출신의 이지치 고스케 소장이 배치되었는데 이 인사가 그야말로 최악이었던 것이다. 포병 출신인만큼 요새 공략에는 그보다 더 적합한 인물이 없었겠지만 바로 이 인사로 인해 일본 제3군은 뤼순 고지군에 시체의 산을 쌓았던 것이다.
일본 연합함대는 뤼순 요새를 봉쇄하면서 숱한 포대와 벙커들로 도배를 하다시피 한 고지군 중 유일하게 민둥산으로 남아있던 후석산 산정의 해발 203m의 고지, 바로 203 고지를 발견했고 제3군에게 “203 고지를 점령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이것은 이 민둥산이 단순히 아무런 방어거점이 없어서 그런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이 203 고지의 위치가 뤼순항을 손바닥 보듯 감제할 수 있다는 점이 더 컸기 때문이다. 연합함대 참모인 아키야마 사네유키 소좌는 왜 러시아 육군이 다른 고지들은 전부 벙커와 포대로 도배하면서 저 요충지를 그대로 놔두고 있는지 의아해했고 이를 상부에 보고했으며 당연히 해군은 제3군에게 다른 고지를 공략할 필요 없이 저 203 고지만 공략해 달라는 요청을 한 것이다. 문제는 바로 무능의 극치, 이지치 고스케 소장이 딱 잘라 거절해 버린 것이다.
"육군은 육군만의 작전이 있다. 굳이 해군에서 요청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저 요새를 효과적으로 함락시킬 작전을 세워둔 지 오래다."
그런데 하필 그 작전이라는 것이 러시아군이 요새화시킨 북쪽의 이룡산과 동북부에 위치한 동계관산 사이를 치고 들어가 여기를 돌파해 단숨에 뤼순 시내로 밀고 들어간다는 그야말로 허무맹랑하기 그지없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지치 고스케 소장은 러시아군이 뤼순 요새를 구성하는 각 보루와 포대, 벙커에 그토록 많은 M1893 맥심 중기관총과 중포들을 배치했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었고 이것은 앞으로 155일 이상에 걸친 대혈전을 암시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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