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illy의 한국사 이해

시대의 풍운아 흥선대원군 이하응 - 4

Billy Soh 雲 響 2018. 11. 7. 14:29


출처 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E&nNewsNumb=201601100059

쇄국정책을 추진한 흥선 대원군


1873년 11월, 국왕 고종이 명성황후의 조언에 따라 친정을 선언하면서 흥선대원군은 10년 동안의 권세를 접고 운현궁으로 물러났다. 그때부터 고종은 단계적으로 철폐된 서원을 부활시키고 조정에서 남인과 북인 인사들을 축출했다. 이에 앙심을 품은 대원군 일파는 명성황후를 적대시하면서 그녀의 오빠 민승호를 폭살하는 등 거칠게 대응했다.


그 무렵 정계의 전면에 나선 명성황후는 과거 안동 김씨나 흥선대원군과 달리 남편 고종을 보좌하여 왕권을 강화시켰다. 그녀의 정치적 식견을 존중하고 신뢰했던 고종은 대원군이 시행했던 쇄국정책을 백지화하고 개방정책을 추구했다.


1876년 조선은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했고, 이후 청나라의 도움을 받아 미국, 영국, 프랑스 등과 연이어 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아울러 군국기무를 총괄하는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조직하는 등 대내외적으로 활발한 개혁조치를 취했다. 바야흐로 조선에 근대화의 바람이 불어 닥치기 시작했다.


대원군의 시각에는 섣부른 조선의 개항이 마른 흙바닥에 장작을 지피는 것만 같았다. 열강들의 횡포를 견디지 못하고 변침을 거듭하고 있는 청나라가 눈에 선했다. 과연 조선에 들어온 열강들은 각종 이권 쟁탈전에 나섰다. 그러자 유림은 개화를 주도한 명성황후를 비판하면서 대원군의 정계 복귀를 강력하게 종용했다.


1881년 9월에는 안기영 등이 흥선대원군의 서장자 이재선을 옹립하려다 발각되어 두 사람이 처형당했다. 배후로 밝혀진 흥선대원군은 국왕의 생부라는 이유로 문책은 당하지 않았지만, 감시가 강화되면서 행보를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의기소침해 있던 흥선대원군은 1882년 6월에 발생한 임오군란을 계기로 사면초가 신세가 된 고종에게 전권을 위임받아 재집권에 성공했다. 당시 명성황후는 부대부인 민씨와 무예별감 홍계훈의 도움으로 폭도들의 포위망을 뚫고 여주로 도피했다. 정권을 장악한 대원군은 조선을 개항 이전으로 되돌리려 했지만 갑작스런 청나라의 군사 개입으로 톈진에 납치되어 4년 동안 보정부에 유폐되고 말았다.


1885년부터 조선이 러시아, 일본과 가까워지자 내정을 간섭하던 청나라의 위안스카이는 대원군을 귀국시켜 민씨 정권을 견제했다. 대원군은 1887년부터 고종을 폐위하고 이재면이나 이준용을 보위에 올리려 했지만 명성황후의 벽에 막혀 실패하고 말았다. 그때부터 대원군과 명성황후는 더욱 극단적인 대립 양상을 보였다.


1893년 2월, 일단의 동학교도들이 경복궁 앞에서 교주 최제우의 신원과 폐정개혁, 탐관오리 처벌 등을 요구하며 복합 상소를 벌였다. 한 달 뒤인 1893년 3월, 1만여 명의 동학교도들이 보은의 원평 들판에서 집회를 열고 ‘척왜양' 기치를 높이 들었다.


당시 세간에는 흥선대원군이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사주하고 있다는 풍문이 나돌았다. 그 실상은 1894년 2월에 주일본 러시아 공사 미하일 히트로포가 주조선 러시아 공사 베베르에게 보낸 아래의 서한에 낱낱이 드러나 있다.


‘첩보에 따르면 조선에서 대원군이 중대한 폭동을 조성하고 있는데, 오는 여름이나 가을 이전에 폭발할 것이다. 공모자와 대리인들이 일본과 중국에서 무기를 구입하고 있는데 이미 4천여정의 소총을 구매했다. 그 중 일부는 일본에서 나왔고 소수의 일본인이 가담하여 일을 함께 꾸미고 있다. 이 음모에 대해 일본 정부는 전혀 모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