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1864년(고종 1년) 2월 28일, 흥선대원군은 러시아인이 함경도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는 서신을 냈다. 서방의 강국 러시아의 남하 조짐에 경각심을 느낀 그는 천주교도인 남종삼을 통해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했지만 그 조짐을 눈치 챈 유림과 조정 대신들이 척화양이를 종용하자 정치적 안정을 위해 태도를 바꾸었다. 1866년정월, 흥선대원군의 명에 따라 베르누 신부를 비롯한 9명의 프랑스 신부와 홍봉주·남종삼·홍봉주 등 천주교도들이 대거 체포되었다. 이어서 오가작통법에 따라 천주교도들과 가까운 사람들까지 굴비 엮이듯 잡혀왔다.
조선 방방곡곡에서 천주교 서적과 십자가, 마리아상이 불태워졌다. 이른바 병인사옥이었다.이 갑작스런 종교 탄압으로 인하여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은 황해도 옹진, 풍천, 장연 지방과 홍성, 해미 등 충청도의 내포 주변 고을이었다. 천주교사에는 8천여 명, 황현의 매천야록에서는 2만여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가까스로 화를 피해 탈출한 리델 주교로부터 상황을 전해들은 북경 주재 프랑스 함대사령관 로즈 제독은 그해 11월 함대 7척과 군사 600명을 이끌고 강화도를 침공했다. 이른바 병인양요였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양헌수가 이끄는 조선군의 반격을 받아 패배하고 급히 철수해 버렸다. 기세가 오른 대원군은 그때부터 외국과의 교류 자체를 부정하는 고강도의 쇄국정책을 단행했다.
그 무렵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영국 상선을 타고 충청도 근해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했지만 역시 거절당하자 물러났다. 얼마 후 그는 재차 도래하여 덕산에 있는 남연군묘 도굴을 시도했다. 이에 분개한 대원군은 전국 요처에 척화비를 세우고 외국인과의 접촉 자체를 틀어막았다. 오페르트 도굴 사건은 부장품을 노린 것이 아니라 조선의 개항을 강요하기 위한 수단이었지만, 그들은 조선에서 묘를 훼손한다는 것이 충효의 개념을 무너뜨리는 최악의 만행으로 규정된다는 점을 파악하지 못한 악수였다.
1868년에는 미국 상인 프레스톤이 이끄는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던 도중 주민들과 충돌이 일어나 배가 불타고 선원들이 전원 사망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871년 4월 미국 함대가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강화도를 침공했다. 신미앙요로 기록된 이때의 싸움에서 미군은 군사적으로 승리했지만 조선 조정의 쇄국의지가 굳건함을 알고 후일을 기약하며 철수했다.
그처럼 흥선대원군은 대내적으로 각종 개혁 조치를 단행했고, 대외적으로 외세의 진입을 봉쇄함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누렸다. 그 무렵 외부와 통하는 조선의 공식 통로는 청나라 쪽으로 의주와 연결되는 책문과 두만강가의 경원, 일본 쪽으로 동래의 왜관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강압적이고 독단적인 통치 방식은 유림은 물론 처가인 민씨 일족의 반발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장차의 파란을 예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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