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의 발발
1894년 2월 전라도 고부에서 조병갑의 탐학을 계기로 동학농민운동이 발발했다. 동학농민군이 파죽지세로 전주성을 함락하고 북상을 도모하자 고종은 홍계훈을 파견하여 평화적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청나라에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그해 6월, 청군이 아산을 통해 상륙하자 틈틈히 침략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일본은 갑신정변 당시 맺은 톈진조약을 빌미로 오시마 요시마사가 이끄는 대규모의 일본군 혼성여단이 서울에 들어와 급거 경복궁을 점령하고 친일정권을 수립했다.
7월 25일 일본군은 선전포고도 없이 청군을 공격하여 풍도, 성환, 평양전투에서 승리하고 베이양함대를 격파한후 청나라까지 처들어갔다. 뤼순과 다렌에서 민간인을 학살하였으며 조선에서 노동력과 식량을 징발했다. 이른바 청일전쟁이었다.
이후 일본은 조선 내정에 적극 간섭하면서 갑오개혁을 주도했고, 이에 대한 반발로 재집결한 동학농민군을 우금치에서 격파했다. 이어진 황해해전에서 청군을 물리친 일본군은 진저우성(랴오닝성 서부에 있는 도시)과 뤼순을 점령하였으며 청군은 대패했다.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타이완과 랴오둥반도를 이양 받았다.
아! 명성황후! 옥호루에 지다.
1895년 초부터 흥선대원군은 친일내각을 운영하던 김홍집, 유길준 등 급진적인 개화파와 내통하면서 온건적인 개화파를 이끌던 명성황후 제거를 도모했다. 그런데 그해 4월 삼국간섭으로 애써 얻은 랴오둥 반도에서 물러나면서 국제적으로 체면을 구긴 일본은 명성황후가 은밀하게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세력을 축출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녀를 살해하기로 결정했다. 이른바 ‘여우사냥’의 각본은 전 외상 이노우에 가오루, 실행은 신임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가 맡았다.
그해 8월 일본인 궁내부 고문관 오카모토 류우노스케는 공덕리 별장에 칩거하고 있던 대원군으로부터 명성황후 제거 관련 4개항의 각서에 서명을 받았다. 거사가 끝난 뒤 대원군이 고종을 보필하여 궁중을 감독하되 정사는 내각에 맡긴다는 내용이었다.
대원군은 당시 친필로 ‘민씨 척족이 권력을 잡고 갑오경장의 개혁을 무위로 돌려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있으니 이들을 척결해 버리겠다.’라는 내용의 고유문을 써서 서울 시내에 게시토록 했다. 그가 을미사변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운명의 8월 20일, 명성황후가 옥호루에서 일본 낭인들에게 살해될 당시 대원군은 경복궁 강령전에서 상황이 종료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그는 건청궁에서 고종을 만나 정권을 이양 받고 장남 이재면을 궁내부 대신으로 임명했다.
어둠 속에서 벌어진 일제의 만행은 한성부에 체재하고 있던 외국 공사들과 언론인들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려졌다. 궁지에 몰린 일본은 범인들을 체포해 본국으로 압송한 다음 재판에 회부했지만 모두가 형식적인 절차였다.
흥선대원군은 개인적으로 며느리이자 공식적으로 한 나라의 국모를 시해하는 만행에 협조했다는 혐의를 피할 수 없다. 임오군란 당시에 살아있는 명성황후의 장례식을 강제했던 그는 권력욕에 눈이 멀어 또 다시 그녀의 죽음을 협조 내지 방관했던 것이다.
그 후 대원군은 일본의 외면, 친일정권의 괄시, 백성들의 비난 속에 철저하게 고립되었다. 1896년 고종이 아관파천으로 일본의 마수에서 벗어나자 대원군은 서울을 떠나 양주 땅에 은거하면서 의기소침한 세월을 보냈다. 1898년 1월 여흥부대부인 민씨을 잃고 나서 한 달 뒤인 2월 운현궁 별장 아소당에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하였다.
구한말, 그후 120년. 작금의 상황을 바라보며
시대의 풍운아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일생을 돌아보며 동영상이 겹쳐지듯 떠오르는 것은 작금의 국내 상황이다. 구한말에는 러, 일, 미, 불, 독등 외세를 끌어들여 신속히 국정을 개혁하고 선진의 문물을 정착시켜 국력을 길러 외침을 막아내야 한다는 명성황후 중심의 개화파와, 조선의 국력은 너무 미약하고 지금 외세를 끌어들여 개국을 단행하는 것은 망국으로 가는 길이므로 쇄국의 문을 굳게 닫아걸고 그 사이에 국력과 군대를 육성하여 외침을 막아내야 한다는 보수파가 극한 대립 하였던 것이다.
그 1세기 후에 현재의 상황은 보수와 진보의 대립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일점도 변화없는 극한 대립의 연속인 것이다. 밥을 굶던 부황의 보릿고개에서 나라를 발전시켜 산업화에 성공하고 대한민국을 세계 11위 경제 대국으로 발전시킨 자유 만주주의 진영의 보수세력과, 산업화 과정의 독재를 무너뜨리고 민주화에 성공한 진보세력이 번갈아 정권을 잡으며 나라를 무한 대결의 장으로 질주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고통과 부담은 고스란히 일반 서민 국민에게 돌아오니 이 시련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는 참된 지도자는 정녕 나타나지 않는단 말인가. 당리당략에 빠져 끝없이 투쟁하는 위정자들을 바라보는 본좌의 가슴은 서럽기만 할 뿐이다. 부디 국민들의 의식이 성숙하여 안보와 경제의 위기를 극복하고 국민을 화합하여 미래 비젼으로 국가를 이끌어갈 지도자를 선택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하늘에 빌며 이 글을 마감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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