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을 장악한 대원군은 우선 조정의 요직에 대한 탕평 인사를 실시하여 안동 김씨 세도정치하에서 철저히 배격 되었던 풍양 조씨 세력을 등용하여 조대비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자 하였으며 조선 건국이래 차별 되었던 평안도등 서북 세력과 종친들까지도 요직에 임명하여 요컨대 정.군을 직접 장악하였다.
당시의 가장 심각한 사회 문제는 전국에 산재한 서원이었다. 조선 건국이래 유교는 통치철학이었으며 덕과 인을 근본으로하는 사대부들의 덕목이었으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서원은 점차 타락하여 양반 유림들의 기득권을 옹호하기위한 조직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자신들에 불리한 개혁이나 제도에 대하여는 사사건건 국정에 브레이크를 걸었고 왕권을 견제하였다. 뿐만 아니라 관직의 인사에까지 직접 관여하여 서원의 눈치를 보느라 관장들은 제대로 직무를 수행 할 수도 없었다.
대원군은 이러한 적폐를 일소하기 위해 강력한 적정으로 서원 철폐령을 내리고 전국에 40여개만 남겨두게 했다. 유림은 극한 반발 하였으나 대원군의 후퇴없는 강력한 추진과 민심의 원성 앞에서는 그들도 어쩌지 못하여 결국은 꼬리를 내리고 대원군을 국태공으로 호칭하기도하였다.
이렇듯 집권 초기부터 대원군이 수백년 동안 해결하지 못한 국가의 문제점과 사회 병폐를 과감히 밀어부쳐 개혁한 공은 어느 통치자에 비하여도 손색 없다 할 것이다. 그는 이러한 개혁의 과정을 통하여 허약해진 왕권을 강화하여 국기를 바로 세우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대원군 통치의 고난은 경복궁 중건으로부터 너타나기 시작하였다. 경복궁은 1592년 임진왜란때 불타버린후 삼백년 가까이 폐허로 남아있던 곳이었다.
대원군에게 있어서 경복궁 중건은 왕권바로세우기 전략의 달성을 위해 극복하지 않으면 안될 프로젝트였다. 물론 그도 그 엄청난 재정의 부담때문에 망설이고 있었지만 1865년 4월 중건이 시작된후에는 세도정치에 시달린 민심이 호전되어 오히려 헌납금이 쇄도하고 지방별로 건축 인력이 대거 자원 상경하여 분위기는 지극히 좋았다. 그러나 준공을 앞둔 이듬해 반대파의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가 일어나 모든 전각과 자재마져도 불타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힘들게 재개한 공사중 영건도감에서 또다시 불이 나 모든 자재들마져 재가 되고 말았다.
이 두 차례의 화재가 정적들의 방화라고 판단한 대원군은 자금이 바닥이 났는데도 공사를 밀어붙였다. 관리들과 부자들에게 원납전을 강요했고, 악성화폐인 당백전을 발행하여 유통시켰다. 4대문과 4소문에서 문세라는 통행세까지 거두었다. 그러자 백성들의 원성이 들끓었지만 철혈 같은 대원군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1867년 11월, 온갖 우여곡절을 헤치고 경복궁이 완공되었다. 정궁인 근정전과 수정전을 비롯하여 광화문, 흥례문까지 단장을 마쳤다. 광화문 좌우측에 궁전 출입을 감시하는 동십자각과 서십자각도 세워졌다. 공사를 시작한 지 2년 6개월 만의 결실이었다. 오늘날 조선의 법궁으로서 관광 일번지가 된 경복궁은 그렇듯 150년 전 흥선대원군의 단안으로 3백여 년 만에 중건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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