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군 이하응은 비운의 사도세자와 궁녀 사이에서 태어난 은신군의 양자인 남연군과 부인 여흥 민씨의 넷째 아들로서 1820년(순조 20년) 11월 16일 한성부 종로방 안국동에서 태어났다. 당시의 국내 정세는 1800년 정조의 갑작스런 승하후 정권을 잡은 안동 김씨(신 안동)들의 천하였다. 왕가의 종친중 누구든 똑똑한체 하거나 왕위를 넘보는 사람은 안동 김씨 권력의 손에 걸려 죽음을 면치 못하였다. 철종 당시 유력한 왕위 계승 후보였던 도정궁 이하전이 제주도에 안치되었다가 죽임을 당한것이나 경평군 이승응이 탐학을 구실로 유배형에 처해진 것은 이와 같은 경우이다.
17세에 아버지가 별세하자 가장의 자리를 이어받게된 이하응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칼날을 피하고 가문을 보존하기 위하여 자신의 내면을 철저히 숨기고 시정의 파락호들과 어울려 난봉꾼의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안동김씨 가문의 잔치집이나 상가집에 들어가 던져주는 음식이나 술을 게걸스럽게 먹기도하고 술에 취해 투전을 일삼으며 철저히 자신을 위장하였다. 그러는 중에도 그는 큰아들 이재면을 교육하고 특히 둘째아들 이재황(후의 고종)에게는 때를 기다리며 남몰래 제왕학을 가르쳤다. 생계를 위해 난초를 그려 내다 팔았고 상가집 개라는 모욕에도 그는 못들은체 했다.
철종이 33세의 젊은 나이에 1863년 12월 8일 후사도 없이 승하하였다. 그때 흥선 대원군 이하응은 신속히 움직여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던 헌종비 조대비에게 자신의 차남 이재황을 보위로 삼으라는 요청을 하였다. 조 대비는 안동김씨의 세력을 억누르고 풍양조씨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던차에 그 제안을 받아들여 안동김씨가 반대할 시간적 여유를 주지않고 즉시 12세의 이재황을 보위에 올리고 자신이 수렴청정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안동김씨 그룹은 조대비의 조치에 의구심을 가졌으나 흥선대원군이 워낙 형편없는 인물이라고 생각하여 그대로 받아들이고 말았다.
그러나 이는 안동김씨 일문이 대원군의 철저한 위장술에 속아 넘어간 것이었다. 1863년 12월 13일 이렇게 이재황이 조선의 26대 임금으로서 즉위하니 파란의 고종 시대가 열린 것이다.조대비는 초기에 안동김씨 실세들을 조정에서 몰아내고 수렴의 실권을 장악하였으나 정치를 할 수있는 역량과 안목이 없었으므로 1866년 왕비 초간택을 마친후 정권의 운영을 흥선 대원군 이하응에게 인계하니 이로서 임금도 아닌 대원군은 44세에 조선의 통치자가 되었던 것이다.
대원군은 취임 초부터 엄청난 야망과 실행력으로 개혁을 밀어붙여 왕권의 강화에 주력하였다, 왕조 400년가까이 최고 의결 기구로 군림했던 비변사를 대폭 축소하고 의정부로 권력을 이전 시켰다. 또한 종친과 무신을 우대하고 등용하였으며 후에 비변사는 아예 해체시켜 버렸다.
또한 뿌리깊은 무신 하대 차별을 없애기 위해 병조판서에 무신을 기용하도록 규정을 바꾸고 각 군영의 대장직에는 무신들을 등용하였다. 가혹한 세제도 개혁하여 호포제를 실시해 양반에게도 군포를 징수하고 환곡제를 사창제로 바꾸어 지방 수령들의 부정을 방지하고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탐관오리들을 색출해 강도높게 처벌하였다. <계속>
'★ Billy의 한국사 이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대의 풍운아 흥선대원군 이하응 - 3 (0) | 2018.10.28 |
---|---|
시대의 풍운아 흥선대원군 이하응 - 2 (0) | 2018.10.04 |
여말선초 삼봉 정도전의 주인의식과 자기위치 (0) | 2018.07.02 |
차라리 내 목을 쳐라 - 3 (0) | 2017.05.06 |
차라리 내 목을 쳐라 - 2 (0) | 2017.03.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