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정보기관은 정치 및 안보환경의 변화에 따라 복잡한 통폐합 과정을 겪어왔으며, 소련 시기부터 범세계적인 역량을 과시하였다. 러시아 최초의 공식 정보기관인 체카(CHEKA)는 1917년 제르진스키에 의해 공산혁명을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창설되었으며 악명을 떨쳤던 비밀경찰이다, 펠릭스 제르진스키는 폴란드 출신으로 볼셰비키혁명에 참여하였다. 1917년 12월. 혁명에 반대하는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체카(Cheka·반혁명, 사보타주 단속을 위한 비상위원회)를 만들었다.
제르진스키가 체카를 처음 출범시켰을 때 요원은 24명이었고 자체 건물도 없었다. 제르진스키는 모스크바 루비얀카 거리의 한 조그만 사무실을 본부로 삼고 블라디미르 레닌의 지시에 따라 반혁명분자를 색출, 제거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 체카의 건물은 이후 공포의 상징이 됐다. 이 건물에 들어간 사람은 결코 살아 나오지 못했다.
KGB(국가보안위원회)로 흡수될 때까지 체카는 정치상황에 따라 국가보안부, 내무부 등으로 흡수되거나 통합되었다. 1954년에 창설된 KGB는 세계 최대의 정보기관으로서 국내보안과 방첩,해외정보 등 기본적인 정보업무는 물론 군사보안,국경수비,요인경호 등 총체적인 정보업무를 수행하였다. 그리고 권력 실세인 공산당 정치국 직속의 막강한 기관으로 변모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KGB의장들은 거의 예외 없이 핵심 권력기구였던 공산당 내에서 권력투쟁을 하게 되었고, 1982년에는 당시 KGB의장이었던안드로포프가 역사상 처음으로 소련의 최고지도자가 되었던 것이다.
창설 당시 KGB는 10개 부서와 국경경비대를 관장하고, 첩보·방첩 활동을 비롯해 고위간부 및 중요 시설에 대한 경호, 군대 내의 보안활동 감시와 통제, 통신과 암호 해독, 경비 등 국가 안보와 관련된 모든 분야를 취급했다. 당시 정식요원만 70만명, 연간 예산 49억루블(22조700억원)이었던 KGB는 막강한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국가 내의 국가’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KGB는 현재 FSB(Federalinaya Sluzhba Bezopasnosti)라는 새로운 얼굴로 화려하게 부활
하였지만 옛 KGB 시대와 마찬가지로 그 모습은 외부로는 전혀 드러나지 않고 있다. 세계의 양대 국가 정보기관으로서 CIA와 마찬가지로 전세계에 걸친 작전 내용이나 규모등은 철저한 극한 비밀주의인 것이다.
최근에는 연방통신국(FAPSI)까지 흡수·통합하여 제반 통신 통신정보업무와 기능도 수행하면서 필요시 러시아 정보기구들을 통합 지휘도 하고 있어 러시아 최대의 정보기관이 되었다. 특히 FSB출신 푸틴 대통령이 또다시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최고의 영향력있는 기관이 된것이다.
SVR은 러시아의 중요 외교정책 결정에 큰 영향력을 미치며 미 CIA처럼 대통령에게 일일 정보보고를 하고 있다. FSB와 SVR 외에 해외군사 및 경제관련 정보활동을 하는 참모본부 산하의 정보총국(GRU)이 있다. GRU는 1918년 적군 제4국으로 출발하였으며 해외첩보분야에 있어서는 SVR못지않은 정보자원과 활동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평가 되고 있다.
대테러 훈련중인 러시아 FSB (연방보안국) 특수부대 Alpha Group
푸틴은 1960년대와 1970년대 KGB에 발탁된 엘리트 요원 중 한 명이었다. 1967년부터 1982년까지 KGB 의장을 역임한 유리 안드로포프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당시 소련을 이끌어갈 미래의 엘리트를 대거 KGB로 끌어들였다. KGB사상 가장 오랜 기간 의장을 역임한 안드로포프는 KGB만이 소련체제를 이끌어갈 수 있는 기구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그는 유능하고 똑똑한 젊은 청년을 발탁, 국가의 기둥으로 만든다는 프로젝트를 비밀리에 추진했다. 이들은 최고 교육기관에서 외국어 등 특수교육을 받고 새로운 엘리트로서 KGB의 중추를 책임질 임무를 부여 받고 중견 간부로 일해왔다. 그때 푸틴도 KGB 중령으로서 옛 동독의 드레스덴에서 근무했던 것이다.
파트루셰프 FSB 국장은 실세 중 실세로 불린다. FSB 국장은 장관급이면서 육군대장의 계급을 겸하는 강력한 권한이 부여되었다. 영장 없이 각종 단체나 기업의 조사는 물론 해외 정보활동을 위한 간첩침투, 기업이나 단체의 위장설립, 자체 특수부대를 운영하고 있다. 법적으로 다른 기관의 감독을 받지 않는 특권도 있다.
FSB의 예산과 인원 규모는 비밀이지만, 지난해 예산이 40%나 증액되었다. KGB 간부 출신인 알렉세이 콘다우로프 의원은 “푸틴 대통령을 제외하고 현재 FSB에 ‘니예트(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FSB의 막강한 권력을 지적했다. 특히 권력을 얻는 데 만족했던 KGB와는 달리 FSB는 권력과 부를 함께 누리고 있다. FSB의 예비역 장교들은 국영기업과 대기업에 파견돼 거액의 연봉을 받으며 회사의 의사결정이 ‘국익’과 일치하는지 감시한다. FSB는 어떤 의미에서 볼 때 국가 그 자체가 된 셈이다. FSB는 심지어 자신들의 후계자도 양성하고 있다. FSB가 운영하는 아카데미에서는 대부분 요원의 자녀들이 공부하고 있다. 이들은 이곳에서 교유하면서 결혼 등을 통해 두터운 인맥을 쌓는다.
그렇다면 FSB가 추구하는 목표는 무엇일까. 이들은 과거 KGB처럼 공산주의를 체제의 우선으로 보지 않는다. 시장경제의 수혜자인 이들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에 반대하지 않는다. 이들의 이념은 국가우선주의이다. 이들의 정신은 민족주의와 애국주의다. 이들은 러시아에 대한 최대 위험이 미국 등 서방에서 온다고 본다. 서방의 목표는 러시아를 약화시키고, 무질서를 조장하려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때문에 러시아에서 서방의 의도에 맞춰 활동하는 사람은 누구든 내부의 적이 된다. 이들의 반(反)서방주의는 러시아 국민의 정서에 부합하는 것이다.
러시아가 최근 들어 미국에 냉전적 사고방식으로 맞서는 것도 이런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의 최우선 목표는 강력한 러시아를 건설, 과거의 영광을 되찾는 것이다. 이들은 이를 위해 무엇보다 먼저 고도로 집중된 중앙권력을 통해 정치·경제적 힘을 축적하고 있다. FSB의 실로비키는 현재 정부의 법집행기관·정보기관·군부 등을 통제하고 있으며, 에너지부와 국세청도 손아귀에 넣고있다. 이와 함께 연방재산기금과 금융감독원 등은 물론 주요 국영은행도 장악하고 있다. 또 이들은 주요 기간산업을 운영하는 국영회사의 최고위직을 대부분 차지했다. 옛 소련 붕괴 과정에서 벼락부자가 된 올리가르히에 반감을 보이던 러시아 국민은 대부분 실로비키의 이런 권력 독점에 반대하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실로비키는 혼란을 초래한 민주적 절차보다는 법과 질서, 안정을 우선하는 정책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FSB는 67개국 104개의 정보 보안 법률 집행기관, 35개국 42개 국경 경비 기관들과 공식적인 교류 협력 관계를 유지 가장 긴밀하게 정보 교류를 하고 있으며 국가들로는 아제르바이잔 벨로루시 독일 영국 이스라엘 키르기스스탄 미국 우크라니아 우즈베키스탄 그리고 한국이 있다.
KGB 섹스스파이 3주간 성교기술 훈련
65년 당시 소련과 미국은 서로 군사대립관계를 유지해 나가고 있었다. 때문에 상대 군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군 정보를 쥐고 있는 ‘남자’들에게 보다 용이한 접근방식이 필요했다.
KGB는 남성이 여성에게 약하다는 점을 착안, 여성들을 상대로 '섹스스파이' 교육을 시작했고 상당한 성공을 거둬들였다. 다음은 65년 당시 KGB의 여성스파이 교육에 대해 기술한 중앙일보 기사원문중 일부내용이다.
KGB가 갖고 있는 특수무기는 뭐니 뭐니 해도 침실의 첩자 섹스스파이이다. 오늘도 미국의 거물인사들과 뉴욕의 아늑한 호텔 밀실에서 단꿈을 꿀 지도 모를 이 여간첩들은 모스크바에서 약 86킬로 떨어져 있는 한적한 도시 클린에 있는 사랑의 학교에서 훈련을 받는다. 각국에서 차출되어온 이들은 마지막으로 4주간의 단기교육을 받고 자기 출신국으로 사명을 띠고 배치된다.
교육 첫 주일은 파블로프의 조건반사이론을 습득, 나머지 3주는 지하실험실에서 남성유혹 및 성교기술을 실습한다. 실습교관과 여학생이 한데 얽혀 무아지경의 오르가슴에 도달했을 때 남자 교관의 등에 연결된 전선으로 순간적으로 전기가 통한다. 교관 몸을 통해 학생의 몸 깊숙이 파고드는 전율. KGB는 이렇게 하여 여자의 가장 약점인 사랑에 눈 어두울 순간 그의 사명을 일깨워 준다. 여 간첩들은 여자의 육체가 아니라 전투무기인 것을 알게 된다. [1965-10-19 중앙일보]
이렇게 양성된 KGB의 미녀 스파이들은 이후 상대국 군관계자들과 육체관계를 통한 유혹으로 정보를 빼돌리거나 ‘정사’사진을 빌미로 협박하는 방식으로 활동하게 된다.
영국대사 소련 하녀와 정사
68년 당시 주소영국대사로 근무했던 해리슨은 KGB의 작전에 걸려 대사관에 출입하던 소련하녀와 정사를 나눈 사실이 81년 2월 22일 영국 선데이 타임즈를 통해 드러나기도 했다. 그는 선데이 타임지와의 회견에서 “그녀는 젊고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나는 그녀가 KGB를 위해 일하고 있는지를 묻지는 않았지만 우리 대사관에서 일하고 있는 소련인 들은 모두 KGB의 고용원으로 여겨졌었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주소미국대사도 KGB의 미인계에 넘어가 여인과 정사
또 81년 당시 모스크바주재 미국대사관무관 제임즈 홀브루크 소령(41)이 미인계에 넘어가 KGB의 협박을 받을 위험에 처하기도 했다. 바르샤바 조약군이 기동훈련을 하고 있을 때 서방무관들과 파티에 참석한 그는 한 여인과 정사를 가진 뒤 KGB로 협박을 받다가 미국으로 소환됐었다. 하지만 스파이여성과 성관계를 가진 뒤 협박에 못 이겨 자살한 군인도 있었다.
위에서 고찰해본 바와 같이 붉은 제국 러시아의 국가 정보기관 FSB 는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초 거대 지하제국이다. 러시아라는 것은 보이는 나라이지만 요컨대 FSB는 그 러시아라는 나라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지하제국인 것이다. 북극에서 부터 남극까지 세계의 어느곳에서든지 러시아의 세계 제국 영광을 되찾기 위한 목표에 반하는 그어떤 국가나 국가 원수나 조직이나 개인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정보가 포착 되는 즉시 암살 폭격 전복등 수단 방범을 가리지않는 제거가 그들의 절대 목표인 것이다. 그러니 CIA와 마찬가지로 전세계 주요국의 국가원수 도 감청은 물론 개인에 이르기까지 필요하다면 즉시 비밀 내사하여 제거 여부를 결정하고 실행하는 것이 그들의 당연한 책무이다. 거기에 반문을 하거나 반항하는 것은 누구를 막론하고 결단코 허용치않는다. 반항한다는 것은 즉시사망과 동의어라고 보면 된다. 체첸사태나 최근의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병합등의 사태에서 세계인들은 명확히 그 실체를 느끼지 않았는가. 19세기도 아닌 첨단 과학과 인권의 가치가 최우선 되는 이 시대에 러시아의 무자비한 공격과 살상및 영토 탈취를 보면서도 세계는 말로는 떠벌렸지만 아무도 러시아를 제지하지 못했다. 그러한 냉혹한 국가 전략 전술의 보이지 않는 이면에는 FSB가 그 붉은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이다.
'★ Billy Soh 의 글,생각,의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스라엘의 국가 정보기관 모사드, 그 '살아있는 전설' (0) | 2015.09.06 |
---|---|
부상하는 중국의 정보기관 - 국가 안전부 (0) | 2015.08.28 |
조국광복 70주년을 맞으며 (0) | 2015.08.13 |
CIA (Central Intelligence Agency),<미국 중앙 정보국, 그 보이지 않는 세계제국> (0) | 2015.08.09 |
국정원의 해킹 프로그램 정치 싸움을 보고 - 1 (0) | 2015.07.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