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4일, 벼르던 동유럽 여행을 드디어 출발하는 날이 왔다. 자주 드나드는 인천공항이지만 손님이 되어 여행을 떠나는 느낌은 전혀 다른것이다. 오늘의 항공기는 독일 국적의 루프트한자 LH 719 편이다. 체크인 카운터에서 탑승 수속을 마치고 짐을 부친후 탑승장 출입구로 들어가 검색대를 통과 하였다. 다음은 출국 심사이다. 세계 모든 나라를 다녀도 현재의 인천공항 처럼 빠른 출국 심사는 없을 것이다. 미국 등의 공항에서 그 까다로운 검색대와 출국 심사를 받으며 기분이 상해본 경험을 가진분 이라면 우리나라의 인천공항이 얼마나 고객의 편리를 위한 시스템인지 실감하고도 남을 것이다.
특히 나는 자동 출국 신고에 등록을 해 놓았기 때문에 여권을 터치하고 오른손 검지 손가락 지문만 올려 놓으면 문이 척 열린다. 거의 걸어 가는 수준의 시간으로 전혀 기다릴 필요도 없는 것이다. 출국 심사를 마치고 면세 구역에서 자유로히 시간을 보내다가 드디어 항공기 탑승 안내 방송에 따라 기내에 탑승하였다.
한국 시간으로 13:30분에 인천 국제공항을 이륙하여 12시간 반 정도의 지루한 비행 끝에 독일 남부의 주요 도시인 뮌헨 국제 공항에 착륙하였다. 도착지 독일 현지 시간으로는 17:25분이다. 한국 시간으로는 한밤중 02:00이니 잠을 못자고 내려서 눈이 꾹꾹 찌르는 느낌이다. 우나라의 국적기는 서비스등의 면에서 훌륭하지만 항공사의 크기 면에서는 루프트한자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루프트 한자는 1926년에 이미 설립되어 운항하다가 2차 대전후 운항이 중지되었다. 1953년에 독일 연방정부등에의해 합작 재 설립 되어 1994년에 민영화 된 항공사이다. 700대 이상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전세계에 걸쳐 10만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으며 운송 여객수는 세계6위, 전세계 100개국 200개 도시로 운항하며 또한 파트너 그룹과 함께 세계의 410개 도시로 운항하고있는 초 거대 항공사이다.
또한, 위리나라의 인천 국제 공항은 지난 8년동안 세계 국제 공항 평가에서 1위를 차지하고있는 세계 최고의 공항이다. 그것은 주로 시설면에서 최신의 시설이며 깨끗하고 자재또한 고급이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입국및 출국 수속에 소요되는 시간도 아주 짧고 간결하기 때문에 고객의 편의성은 명실공히 세계 최고의 수준이다.
그러나 엄청난 재원을 투입하여 동북아의 허브(중심축)공항으로서의 역할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이용 항공기의 대수나 운송 승객과 물량, 항공기의 국적수 등의 관점에서는 허브 공항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너무나 미흡하다. 즉, 투자 재원에 비하여 페이백의 결과는 아직 너무나 부족한 것이다. 거기에 샹하이의 푸동 공항이나 오오사카의 칸사이 공항, 북경의 서우두 공항이나 홍콩의 첵납콕 공항등 주변의 주요 공항과의 경쟁과 견제에 밀려 허브공항으로서의 역할을 확립하는게 여간 어려운 입장이 아니다.
공항 시설이나 편의성, 청사의 자재나 청결도 등에서 뮌헨 공항은 인천공항에 비해 훨신 낡고 부족한것 처럼 보이지만 허브 공항으로서의 역할은 인천 공항과 비교할 바가 역시 아니다. 중남동부 유럽으로 향하는 수많은 승객들 대부분이 뮌헨 공항을 거치고 있으니 그 승객 규모와 물동량과 이용 항공기수 등은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을 생각할 때 부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언제 우리의 인천 공항이 동북아에서 뮌헨 공항과 같은 허브 역할을 하는 날이 올것인가.. 아쉬움과 부러운 생각에 젖으며 출국장으로 이동하였다.
뮌헨 공항에서 모든 출국 수속을 마치고 나와 대기하고 있는 버스를 만나 출발하니 벌써 어두운 밤이다. 오늘의 첫 숙박지인 멜링겐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멜링겐은 체코 가까이에 있는 국경도시로서 아우토반 고속도로를 달려 약 3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독일 고속도로 아우토반은 속도 무제한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현재는 무제한 구간도 있고 구간에 따라 제한속도도 정하여져 있다. 그러나 우리 버스는 다른 차량과는 관계 없이 100킬로 정도로 계속 달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아우토반은 끝이 없이 이어진다.
오늘은 2013년 3월 25일 아침이다. 어제밤 이곳에 도착하여 1박한 멜링겐의 Cascade Hotel의 아침 모습이다. 전통을 중시하는 유럽의 호텔들은 보통 100년 내지 150년 이상된 호텔들이다. 욕조가 없는 호텔이 많고 간단한 샤워 부츠만 있으며 아침식사 또한 간략한 컨티넨탈 조식이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호텔도 있고 수동식으로 조작하는 목제 엘리베이터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보는 으리으리한 미국식 대형 체인 호텔을 상상하고 투숙한다면 많은 문화의 차이를 느끼게 될것이다.
멜링겐의 카스케이드 호텔에서 조식후 베를린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도중에서 수많은 풍력 발전기가 가동되고 있는 곳을 보았다. 무공해 산업인 풍력 발전이 이토록 발달하여 있는 것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이 풍력 발전기가 한국의 삼성 제품이라하니 그것은 대단한 놀라움이었다. 한국의 발전 기술이 아렇게 까지 발전되어 있었던가. 그것은 기술의 나라 독일 땅에서 느낄 수 있는 뿌듯한 자부심이었다.
나는 베를린은 5년전쯤에 방문한 적이 있었고 이번은 두번째이나 베를린의 상징인 카이져 빌헬름 교회에서 느끼는 독일 사람들의 합리적 사고 방식은 언제나 대단하다고 느낀다.
카이져 빌헬름 교회의 내부이다. 이 교회는 독일 제국을 통일하였던 초대 황제 카이져 빌헬름 황제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손자였던 카이져 빌헬름 2세가 건축한 교회이다. 2차대전시 연합국의 폭격으로 교회의 대부분이 붕괴되고 그 일부만 남아있는 것이 이 교회의 현재 모습이다. 히틀러가 죽고 2차 대전이 끝난후 이 교회를 재건축 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베를린 시민들은 전쟁의 처참함을 후세에 전해주기 위하여 폭격 상태의 그대로 보존키로 결정하였다. 구 교회는 그대로 남겨두고 신 교회는 뒷면에 신축하여 실제 예배는 그곳에서 드려지고 있다.
폭격 당하기 전의 카이져 빌핼름 교회의 모습 미니어쳐이다. 지금은 없는 모습이지만 원래의 아름다운 교회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이사진은 1895년 9월 1일에 진행되었던 카이져 빌헬름 교회의 봉헌식 광경이다. 또 한장의 사진은 1904년도의 이 교회 앞 거리의 풍경이다. 이토록 아름다웠던 풍경이 전쟁을 맞아 처참한 폭격의 광경으로 변하였던 것이다.
이 사진은 카이져 빌헬름 황제의 전승 기록과 훈장의 모습이다.
신교회 내부에 들어갔다. 베를린 시민들의 결정에 의해 파괴된 구 교회는 그대로 남겨두고 전후 새로 신축한 교회이다. 지금 막 주일 예배가 끝나고 있었다. 오늘은 주일이니 멀리 떠나온 여행지의 교회에서나마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부란덴부르그 문앞에 다시와 섰다. 통일전 동서 독일의 국경 분단선이 돌로 박혀 표시되어있다. 이곳에 오면 분단된 국가의 통일을 이룬 독일 국민의 위대한 정신이 느껴진다. 전쟁과 외세에 의해 동서로 나뉘어 졌지만 독일 국민의 하나된 게르만 민족 정신마져 갈라 놓을 수는 없었었나 보다. 본래 이 부란덴부르그 문은 프로이센 왕궁의 입구가 되었던 문이다.
동독 지역이었던 부란덴부르그 문 안쪽 이 거리의 이름은 '운터 데르 링겐'이다. 이 거리가 끝나는 끝 부분에 프로이센 왕궁이 있었다. 왕이 사냥을 나가거나 병사들이 출정하고 개선할 때는 언제나 이 문을 통하여 나고 들었던 곳이다. 2차 대전후에는 첨예한 동서 냉전의 현장이었던 곳이므로 전승국이었던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대사관이 모두 이곳에 위치하여 있고 EU대사관의 깃발도 휘날리고 있다.
프로이센의 영광을 상징하던 이 문도 프로이센이 프랑스의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황제에게 대패함으로서 지배를 받게 되었고 승리한 나폴레옹은 부란덴부르그 문 위의 말을 떼어 파리로 가져갔다. 후에 나폴레옹군을 격파한 프로이센이 그 말을 다시 가져다가 원래대로 부란덴부르그 문 위에 설치하였다. 그 위의 장식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전쟁의 신 나이키를 상징하는 것이다.
병사의 복장을 하고 관광객을 상대로 사진모델을 해주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재미있다.
부란덴부르그 장벽앞에와 다시 섰다. 이 장벽은 1961년 8월13일 동독 주민의 서독으로의 탈출을 막기 위하여 동독 정부에서 설치한 장벽이었다. 아직도 동서 분단 독일의 상징물로서 보존하고 있다. 그 하부의 작은 장벽은 2차대전 당시 히틀러가 구축하였던 장벽이다. 그러니 이곳은 별도의 신구 두개 장벽이 공존하여 있는 곳이다.
부란덴부르그 장벽 바로 옆에 있는 박물관에 입장하였다. 마침 2차 대전시 히틀러 정부의 유태인 학살 사진 자료와 관련 인물과 당시 정부 조직에 관한 사진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패전으로 연합국 측에 항복하였던 독일은 전쟁후 철저하게 자신들의 죄상을 파헤쳐 자백하고 계속적으로 피해자들에게 사죄를 구하는 것이 새로운 정부 지도자가 될때마다 행하는 철저한 의식이다.
최근 아베신조나 아소타로등 일본 자민당 정권의 한국이나 인접국 침략 부인 망언과 비교해 볼때 실로 엄청난 민족성의 차이를 실감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전쟁후에 독일은 히틀러가 자살하여 대표적 전쟁범죄자가 단죄를 당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항거하였던 정파가 정권을 장악하여 철저하게 전범들을 체포하였으며 일본은 침략과 전쟁을 수행하였던 최고 책임자 히로히토 천왕이 맥아더의 건의로 면죄부를 받아 1946년의 동경에서 열렸던 전범 재판정에 서지 않았다.
또한 전후의 일본 내각은 제국 내각의 후손들인 자민당이 다시 정권을 장악하였기때문에 침략 전쟁에 대한 현재의 관점은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자민당은 태생적으로 제국주의로의 회귀를 원하는 극우 정파이며 그들이 아시아에서의 침략을 긍정하고 사죄한다는 것은 자신들의 조상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전후 도래한 냉전체제 속에서 동북아의 전략상 일본의 중요성만을 감안하여 천왕제를 유지시키고 그 동조 일파들을 내세워 전후 복구를 지원하였던 미국의 책임도 또한 크다고 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베를린을 뒤로하고 드레스덴에 도착하였다. 작센 왕국의 수도였던 드레스덴 광장의 모습이다. 이곳은 이번 여행에 나도 처음 와보는 곳중의 한곳이다.
작센 왕궁의 성벽에 그려저있는 군주 행열도이다. 그러나 이 벽화는 그림 물감으로 그린것이 아니라 25000개의 도자기 타일로 만든 아름다운 벽화이다. 작센 왕국의 번성과 병사들의 용맹함을 나타내고 있다.
성의 내부로 들어오니 옛날의 모습이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그러난 이날은 영하 15도 이하로 너무 추워서 돌아보기도 힘들었다. 이 지역은 위도상 북위 40도에서 45도사이에 위치하여 있기 때문에 아직도 한겨울 추위이다.
노란 전차가 운행중인 엘베강의 아름다움도 한겨울의 추위속에서 얼어 붙는듯하다. 17세기에 건축하였던 작센 왕국의 다리 모습이다.
작센의 최대 교회에서 지금도 종소리가 울린다. 얼어붙는 추의의 어듬속으로 전차가 달려간다.
작센 왕국의 유명한 테라스 가든의 내부이다. 당시의 건축 양식과 아름다움이 그대로 간직되어있는 웅장한 크기이다.
저녁시간의 뮌헨 공항 청사 내부
멜링겐의 카스케이드 호텔에서 맛있는 아침식사를 했던 자그마한 호텔 식당 내부이다. 독일의 소세지 맛은 일품이다.
멜링겐에서 베를린으로 가는 도중의 설경
베를린의 거리 모습. 도심지는 아니고 약간 외곽의 거리이다. 이 부근에서 점심을 먹었다.
드레스덴의 엘베강을 뒤로하고. 얼마나 추웠던지 이번여행은 이 검정 오리털 점퍼 하나로 버텼다. 이거 안가져 갔으면 여행도 중단해야했을 것이다. 이거 외에는 봄옷만 가져 갔는데 한번도 못입었다.
드레스덴의 광장에서
어둠이 내린 드레스덴의 거리
통독이전의 부란덴 부르그 문의 사진. 오른쪽은 서독이고 왼쪽은 동독이다.
부란덴부르그 문의 모습
다시한번 이곳에 서다.
기념품점의 머그컵들은 전부 중국제이다.
폭격당한 전쟁의 상처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모습. 이것이 독일 정신이다.
부란덴부르그 장벽 앞에서
나치 정부의 조직과 수뇌들
연설하는 히틀러 사진. "1차대전의 전쟁 배상금은 더이상 지불을 거부한다. 독일 국민은 다시 일어서야 한다"고 외쳤던 것이다. 그러니 당시 피폐했던 독일 국민들이 혹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치 독일군 모습
나치 독일군의 사열 모습
드레스덴의 작센 왕궁 앞에서
테라스 정원에서
독일은 현재 GDP 46000달러의 나라이다. 우리 나라의 2배가 넘는다. 잘사는 원인은 전 국가적인 근검 절약이다. 이렇게 잘사는 나라인데도 여름에 가정에서는 거의 에어컨을 켜지 않는다. 세상에 공짜로 잘사는 나라나 개인이 어디 있겠는가. 쇼핑센터에서는 선풍기를 2시간 돌리고 4시간 끈다. 휴대폰은 필요한 나이에 필요한 사람만 쓴다. 카톡등 현실에 그다지 필수적이 아닌 미디어는 사용치 않는다. 이것이 그 철저한 독일 정신인 것이다. 우리가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것은 무엇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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