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오스트리아로 이동하는 고속도로 아오토반. 아래와 같은 이야기를 듣고 눈물이 어른거림을 참을 수 없었다. 지금 50 이상된 분들은 모두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50년대 초등학교 시절 그리고 60년대 까지도 우리가 얼마나 가난했던가를 잊을 수 없다. 끼니를 제대로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었다는 이야기를 지금의 젊은 세대들에게 아무리 해봐야 이해를 기대하기는 어렵겠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불과 얼마 지나지도 않은 몇십년전의 일이다.
그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당시의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 개발을 위한 차관을 얻기 위해 독일의 뤼브케 대통령을 방문하였던 1964년의 일이다. 세계의 가장 가난한 나라 한국에 당시 돈을 빌려주고자 하는 나라는 없었다. 국내에서 우수한 대학을 나오고도 취직자리를 얻기는 하늘의 별따기 였기에 독일의 광부인력 모집 공고에 많은 대졸 우수 인력들이 지원하였다. 독일 경제 발전의 초석이 되었던 루르 탄광 지대에 한국 광부 3000명과 간호사 15000명이 파견 되었다. 당시 GNP는 필리핀이 170달러, 태국이 220달러, 한국은 79달러이던 시기였다. 그들이 지하 1000미터 이하 막장에서 탄가루를 시커멓게 뒤집어 쓰며 일하고 간호사들이 시체닦는 일을하며 벌어들인 외화가 조국 근대화와 경제 개발의 단초를 제공하였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아래 글은 1964년 12월 10일,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우리 광부 근로자들과 간호사들을 방문했을때 있었던 실화의 증언에 의한 이야기이다.
1964년 12월10일 박정희대통령 내외는 서독의 수도 본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함보른 광산으로 출발했다. 박 대통령과 뤼브케 서독 대통령이 한 차에 타고, 육영수 여사는 뤼브케 대통령 부인과 바로 뒤차에 탔다. 양국 정상을 태운 차량행렬과 경호차량은 거의 반 마일 이상 이어졌다. 오전 10시40분, 박대통령과 뤼브케 대통령이 탄 차가 탄광회사 본관 앞에 도착했다. 박 대통령 내외가 방문한다는 소식에 광부들은 양복 정장, 간호사들은 색동 저고리를 입고 입구 좌우에 줄을 서서 박정희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광산 악대가 주악을 울리는 가운데 박 대통령은 기다리고 있던 광부, 간호사들과 손을 잡았다. 『근무 중 이상 무!』 『각하, 안녕하십니까!』 광부들 대부분이 군에 다녀왔기 때문일까? 광부들은 군기가 잔뜩 든 군인들처럼 거수경례를 하며 큰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박 대통령도 거수경례로 그들의 인사에 답하고, 악수를 나눴다. 박 대통령보다10m쯤 뒤떨어져서 걷던 육영수 여사는 간호사들에게 일일이 말을 건넸다.
육 여사가 『고향이…』 하고 묻자 간호사들은 울기 시작했다. 『가족들에게서는 연락이 잘 옵니까』 『일은 고달프지 않습니까』 육 여사가 세 번째 간호사와 악수를 하면서 『고향이…』라며 말을 건넸다. 아마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육여사의 입에서 『고향』이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그 간호사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것이 신호가 돼서 간호사, 광부 할 것 없이 울기 시작했다. 음악을 연주하던 광산 악대도 꺽꺽거리며 울었다. 벌써 행사장인 강당 중간쯤에 가 있던 박대통령은 뒤를 돌아보며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간호사들에게 둘러싸인 육 여사는 몸을 가누지 못한 채 주저앉으려 했다. 주위에서 간신히 육 여사를 부축했다. 박대통령을 따라 강당 안으로 들어갔던 기자들은 이 광경을 취재하려고 밖으로 나왔다. 사진을 찍던 사진기자들은 카메라를 내려 놓고 함께 울었다. 취재기자들도 주저앉아 통곡했다. 독일인 광산회사 사장도 눈물을 훔쳤다. 그렇게 10분 이상이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박대통령 내외는 단상에 올랐다.
광부들로 구성된 악대가 애국가를 연주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선창으로 시작된 애국가는 뒤로 갈수록 제대로 이어지지를 못했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애국가가 후렴으로 넘어가는 대목에서 합창은 흐느낌으로 변했다. 마지막 소절인 『대한 사람 대한으로』에 이르러서는 가사가 들리지 않았다. 함보른 광산회사 테드 호르스트 영업부장이 환영사를 읽었다. 그는 『한 나라 국가원수가 이곳을 찾아 준 이 역사적 순간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라며 1년 전부터 이곳에서 일하고 있는 한국인 광부들의 근면함과 규율을 칭찬했다.
박 대통령이 연단으로 올라갔다. 박 대통령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코를 푼 다음 연설을 시작했다. 『후손을 위해 번영의 터전이라도 닦읍시다』 그의 차분한 환영사로 식장의 분위기가 겨우 진정됐다. 『여러분, 만리타향에서 이렇게 상봉하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조국을 떠나 이역만리 남의 나라 땅 밑에서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서독 정부의 초청으로 여러 나라 사람들이 이곳에 와 일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한국 사람들이 제일 잘하고 있다고 칭찬을 받고 있음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다시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원고를 덮어 버렸다. 박대통령은 자신의 마음에 떠오르는 이야기를 전하기 시작했다. 『광원 여러분, 간호사 여러분. 모국의 가족이나 고향 땅 생각에 괴로움이 많을 줄 생각되지만, 개개인이 무엇 때문에 이 먼 이국에 찾아왔던가를 명심하여 조국의 명예를 걸고 열심히 일합시다. 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을 위해 남들과 같은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닦아 놓읍시다』
흐느낌 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박 대통령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다가 결국 울고 말았다. 강당 안은 눈물바다가 됐다. 박 대통령은 광부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고 파고다 담배 500갑을 선물로 전했다. 30분 예정으로 함보른 광산에 들렀지만, 강당에서 행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는 데만 한 시간이 걸렸다. 박 대통령은 곧바로 발길을 돌릴 수 없었다. 강당 밖으로 나온 박 대통령 일행은 광부들 숙소를 돌아 봤다. 우리 광부들의 얼굴과 팔·다리 등에는 상처투성이였다. 채탄 작업 중 부러진 드릴이 튀어 오르는 바람에 입은 상처들이었다. 『지하 1000m 아래에서 채탄 작업을 하고 나서 갱 위로 올라와 한잔 마시는 것이 즐거움이지만, 한국인 광부들은 그 돈도 아껴 본국으로 송금한다』는 얘기를 박 대통령은 들었다.
탄가루 묻은 손을 내민 광부 대표 유계천씨는 『이국 땅에서 대통령 내외분을 뵈니 친부모를 만난 것처럼 기쁩니다』면서, 계약기간 만료 후에도 독일에 남아 일할 수 있게 주선해 줄 것을 요청했다. 박 대통령 내외가 함보른 광산을 떠나려는데 한국인 광부들이 다시 몰려들었다. 갓 막장에서 나와 검은 탄가루를 뒤집어 쓴 작업복 차림의 광부들이 많았다. 그들은 박 대통령에게 손을 내밀었다. 『각하, 손 한번 쥐게 해 주세요』
박 대통령 일행을 태운 차는 한국인 광부들에게 가로막혀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차 안의 박 대통령은 계속 울고 있었다. 옆자리에 앉았던 뤼브케 서독 대통령은 『울지 마세요. 우리가 도와줄 테니 울지 마세요』라며 박 대통령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본의 숙소에 도착한 박 대통령 내외는 한국일보의 정광모 (한국소비자연맹 회장역임) 기자를 방으로 불렀다. 박 대통령과 육 여사는 하도 울어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정 기자가 『울지 마세요. 저녁에 파티가 있는데 우시면 어떻게 합니까』라며 대통령 내외를 위로했다.
그러자 박 대통령 내외는 정 기자를 붙들고 펑펑 눈물을 쏟았다. 한참만에 눈물을 그친 박장희 대통령은 정 기자에게 두 가지 다짐을 했다. 『기왕에 정해진 동남아 순방만 마치고 나면, 우리 국민들이 밥술깨나 들게 될 때까지는 외국에는 나가지 않겠다』 『우리 국민들이 밥이라도 제대로 먹게 만들어야겠다』
당시 통역관으로 박 대통령을 수행했던 백영훈 (전 중앙대 교수. 9·10대 국회의원)씨는 『그때 박 대통령이 광부, 간호사들과 함께 흘린 눈물이 조국 근대화의 시발점이었다』고 말한다.
조선일보 기자로 당시 박 대통령을 수행했던 이자헌 전 체신부 장관은 함보른 광산에서의 일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1964년 12월11일자 조선일보 1면에 쓴 기사의 제목은 "후손 위해 번영의 터전을」 - 모두 눈물 적시며 감격의 한때" 였다 . 『눈물바다였어요. 간호사들이 육 여사를 붙들고 울고, 육 여사가 통곡을 했어요. 취재하던 기자들도 울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의 일은 내 인생에서 아주 충격적인 사건으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함보른 광산에서 박 대통령 내외를 만난 광부와 간호사들은 조국의 처참한 가난이 서러워서, 돈을 벌러 이역만리에서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자신들의 처지가 서러워 눈물을 흘렸다. 광부 출신 교민 황만섭씨는 『광산에서 일하면서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외로움이었다』며 『독일에 간 후 처음으로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국제전화가 됐을 때, 전화기를 붙잡고 몇 시간 동안 울기만 하다가 월급의 3분의 1을 전화요금으로 날렸다』고 했다.
1963년부터 1977년까지 7만9000여 명의 광부와 1만여 명의 간호사들이 독일로 파송됐다. 수십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선발된 광부들 가운데는 상당수의 대학졸업자들이 포함돼 있었다. 정광모씨는 『당시 독일에 간 광부들 가운데 진짜 광부 출신은 소수였고, 공과대학 등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면서 『첫 번째로 나가는 사람들이 잘해야 앞으로도 계속 광부들을 내보낼 수 있다고 해서 「배운 사람들」을 이력서 위조해서 광부라고 내보냈다』고 했다.
1962년 10월 한국이 서독으로부터 최초로 들여온 1억5000만 마르크의 차관은 바로 이들 광부와 간호사들의 급여를 담보로 들여온 것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독일 정부 차관은 우리나라에 대한 공공차관이 중단된 1982년까지 총 5억9000만 마르크에 이르렀다. 독일에 돈을 벌러 간 광부와 간호사들의 희생은 적지 않았다. 광부 출신 재독 교포들 모임의 이름은 「글뤽 아우프」, 우리 말로 「무사히 위로 올라가세요」이다. 이곳에서 발간한 「파독 광부 30년사」에 따르면, 1963년에서 1979년까지 광부 65명, 간호사 44명, 기능공 8명이 사망했다. 그 중에는 작업 중 사망한 광부가 27명, 자살한 광부가 4명, 자살한 간호사가 19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