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성을 방문 하였다. 수원 화성으로도 부르는 이 성은 조선 왕조 22대 정조 대왕이 당쟁의 희생으로 뒤주 속에서 돌아가신 부친 사도세자를 추모하여 그 능을 수원의 화산에 조성하고 나아가 능이 보이는 곳에 새로운 수도를 세울 목적으로 축성하기 시작 하였다. 18세기 말에 다산 정약용 등에 명하여 2년이 걸려 축성한 곳이다. 그러나 성벽 까지 모두 완성되어 머지않아 곧 수도를 천도 하려는 차에 정조는 승하하여 천도는 이루어 지지 않았다.
정조는 얼마나 부친을 그리는 정이 간절하고 그 죽음을 애통해 하였는지 능행을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갈때 아버지의 능이 보이는 마지막 장소에 이르러서는 너무 피곤하다하여 도승지에 명해 행차를 멈추게하고 아버지의 능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슬퍼하였다 한다.
그러나 정조로서 아버지에 대한 추모는 물론 사실이었지만, 효도의 명분을 들어 그는 수도를 천도하고 그 과정을 통해 당쟁과 권력 투쟁을 종결 시키며 왕권을 강화 하고자 하는 목적이 컷다. 그러나 일찌기도 승하하여 그 목적을 이룰수 없었다. 당시 오랫동안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할아버지 영조 대왕에게 부친인 사도세자를 모함하여 죽음에 이르게한 노론 벽파에 대한 원한감을 정조는 한시도 가슴에서 잊어본 적이 없었다.
그들을 제거하고 남인을 등용코자 하는 정조의 숨은 의도는 노론 벽파에게는 목숨이 달린 위기였기에 그들이 정조를 먼저 제거하고자 독살 하였다는 의구심이 강하게 제기 되고 있다. 드라마 '이산'을 통해 많은 시청율을 올리기도 했지만 역사상의 사실은 확실히 규명 되지 않았다. 정조의 직접 사인이었던 전신에 번진 종기를 치료하기 위해 수은 요법으로 인한 중독사인지, 아니면 이미 그전에 뇌 혈관 질환을 앓고 있어서 그것이 원인이 되었는지 사학자들도 논란을 거듭하고 있다.
여하간 정조의 죽음은 조선의 역사뿐 아니라 그후의 우리나라 역사의 물줄기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일 정조가 죽지 않고 그 개혁 정책이 성공하여 실학자들의 주도아래 왕권과 국가의 기반이 강화 되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역사의 가정은 불가능한 것이라 하더라도, 우선 그후의 19세기 전반의 안동김씨 풍양조씨 가문의 60년 세도 정치는 출현 하지 못하지 않았을까. 그 시기에 국가가 제대로 경영 되었고 선각자 지도자들이 세계의 정세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 하였더라면 19세기 후반 철종, 대원군, 고종, 명성황후 대에 일본의 침략을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나는 강하게 하고 있다.
당쟁의 이전투구가 국가 기반을 얼마나 흔들고 약화 시켰으며 결국은 국가 멸망의 국면에 다다르게 했다는 역사상의 교훈을 오늘의 정치가들은
뼈저리게 반추해 보아야 할 때이다. <운향>
여의도 선착장에서 한강 유람선이 출항 하였다. 바람 소리가 너무 강하다.
북촌 한옥 마을을 돌아보며..
종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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