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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들이여, 심각해 가는 나라의 좌경화를 어찌 경계하지 않는가 - 1

Billy Soh 雲 響 2011. 8. 19. 22:54

1945년 8월 15일. 우리의 강산을 짓밟은 침략자 일본제국이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함으로서 우리 조국은 꿈에도 그리던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진정한 해방을 맞지 못하였다. 북쪽에는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고, 남한에는 이승만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 비극적인 민족의 분열을 막으려고 상해 임시정부를 이끄셨던 김구 주석께서는 김일성과 담판을 짓기 위해 평양행 까지 감행 하셨다.

 

그러나 김구 선생께서는 일제에 대항해 민족의 해방을 쟁취하려고 풍찬노숙의 한평생을 보내셨지만 외람된 말씀이나 세계 정세의 변화나 공산주의의 본질에 대해서는 다소 이해가 부족하시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만일 다가오는 세계의 이념 대결이나 잔혹하고 끈질긴 공산주의, 마지막 한사람의 생명이 남을때까지 피의 투쟁을 멈추지 않는 그들의 혁명 이데올로기를 이해 하셨더라면 결코 김일성을 만나기 위해 평양까지 올라 가는 헛걸음은 않으셨을 것이다.

 

독립의 준비가 되지않은 상태에서 갑작스레 맞게된 우리나라의 해방정국 하에서 민족을 이끄셨던 지도자들 가운데 세계 정세의 변화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고 공산주의 혁명 투쟁을 냉철하게 꿰뚫어 보고 계셨던 분은 이승만 대통령 한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 부분이나 장기 집권으로 인한 국가 체제의 해이등 부정적인 평가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더라도 수 없는 남한내 지하 공산주의자들의 준동을 극복하고 반공을 이념으로하는 자유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했다고 하는 공적은 우리 민족의 현대사에서 결코 과소 평가하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이승만 대통령의 옹고집같은 강철의 추진력과 영도력이 아니었다면 구체적으로 어느분이 그 일을 짊어 질수 있었을지 가정하기가 쉽지 않다.

 

그때 갈라진 남북의 대결은 물론 피로 물들인 전쟁의 비극을 겪기도 하였지만 그후 60년이 흐른 오늘의 시점에서 남북의 차이는 자연적으로는 극복하기가 불가능한 정도로 극심해 젔다. 남한은 세계의 10위 강국이 되었고 북한은 아사자가 속출하는 나라가 되었다.

 

지난 겨울에는 북한에서 아사는 물론 동사자가 많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그것도 그들의 수도인 평양 시내에서다. 시골에서는 그나마 어떻게든 땔 나무가지를 주워다가 부엌에 지펴 얼어죽지는 않는다고 하나 평양 시내에서는 아파트나 공동 주택이 중앙 난방식으로 되어 있는데 기름이 전혀 배급되지 않으니 혹독한 북한의 추위속에 겨울내내 보일러를 지피는 일이 없다한다.

 

그러니 평양 시내 아파트에서는 방안에 조그마한 비닐 하우스를 만들어 놓고 그안에 백열등 한두개를 켜서 그 열로 웅크리고 밤을 지새는 일이 대부분이라 한다. 그러니 젊은 사람은 좀 견딜지 모르나 노약자는 동사자가 속출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거기에 최근엔 인민군 탈영병들이 증가하고 있다한다. 군인들도 굶주림을 참아 내는게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그런데 이 탈영병들을 체포하러 보낸 체포조가 또 돌아오지 않는 사례가 빈번해지고 있다하니 이런 남북의 차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운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