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딜수 없었던 36년,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과 압제로부터 해방되어 나라가 하나 되자마자 한반도의 허리는 전승국의 이해에 따라 분단되어 오천년을 살아온 한민족은 둘로 나뉘어 지고 말았다. 해방과 함께 개편된 건국 준비 위원회는 통일된 국가를 세워보려고 노력하였지만 그또한 헛된 꿈으로 돌아가 버렸다. 수많은 선열들이 피를 흘려 독립을 위해 싸웠지만 해방은 우리만의 힘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일본을 패망시킨 주요 전승국인 미국은 세계 경영과 극동에서의 전략상 한반도는 더 이상 중요할 수 없는 의미의 거점이었다. 그 점에 있어서 소련도 똑 같은 입장이었다. 수백년의 역사 속에서 소련은 끊임없이 극동에서의 남하정책을 추구해 왔으며 한반도에서의 부동항의 확보는 태평양으로의 진출과 미국의 견제를 위해 단연코 포기할 수 없는 국가전략이었다. 이 두 거대국과 그들이 이끄는 민주와 공산의 양진영이 가장 처절하개 대립했던 지역이 바로 한반도였다. 민족 내부의 신국가 건설의 준비가 미비한채로 맞았던 해방과 혼란속에서 우리 민족은 자의적으로 미래를 선택할 권한을 실제적으로는 갖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광복절 노래
그러나 남한에서나마 이승만의 민주 자본주의 정부가 출범하였던 것만도 얼마나 다행이었던 일인가. 북한은 김일성 정권이 진주해 스탈린의 지도에 따라 공산주의의 조선 인민 공화국 정권을 수립하고 각 마을 단위까지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어제까지 머슴을 살던 사람들이 인민위원회 완장을 차고 주인을 묶어 꿇어 앉히고 낫과 죽창으로 협박 위협하였다. 주인들은 모든 땅문서 집문서를 다 내놓고 애원하여 겨우 목슴을 구하거나 아니면 죽창에 찔려 죽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북한의 모든 토지는 국유화 하였고 공산 정권에 조금이라도 반대하거나 걸림이 되는 사람들은 인민 재판에 의하여 가차없이 처참한 복수와 피의 숙청을 자행하였다.
생각해보면 김구선생의 민족을 하나로 만들려던 노력은 얼마나 숭고한 꿈이었던가. 왜 그러지 않으셨을까. 평생을 조국 해방제단에 몸을 바쳐 대륙을 풍찬노숙하던 선생으로서는 통일 조국은 생명을 바쳐서라도 이룩해야할 피맺힌 절규였으리라. 그러기에 어떻게 해서라도 분단을 막아보고자 홀홀단신 평양으로 가셔서 김일성을 만났던 것이다. 민족의 피맺힌 염원을 두고 호소하면 아무리 김일성이라 해도 통하는 길이 있을것이라고 생각 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선생께서는 얼마나 순진 무구한 민족주의자였던 것인가. 그는 아직 공산주의자에 대해 너무 모르셨던 것이리라. 공산주의자들이 그들의 적화 목표를 위해 얼마나 지독하고 끈질긴 자들인지 그 정도를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북쪽의 상대는 동족이 수십만이든 수백만이든 굶어 죽고 살이 찢어지고 뼈가 가루가 되어 부서지더라도 공산주의 사회의 건설과 이른바 민족 해방이라는 적화 통일을 위해서는 그 모든것들은 기쁘게 치뤄야할 하찮은 대가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이었다는것까지는 몰랐을 것이다.
그러한 공산 철학의 실현을 위해 목숨을 내던져 철두철미한 교육을 받고 강철 처럼 정신 무장한 전사들이었다는 것을 몰랐으리라. 설마 그렇게까지는 이해를 못하셨을 것이다. 북쪽인들이 골수에 새긴 그들의 목표를 알고서야 평양으로 가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김구선생과 김일성과의 회담은 당연히 박살이 나고 선생은 허무한 마음으로 내려 오셨던 것이다. <운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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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왕 히로히토가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미영중소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을 발표한 1945년 8월15일 정오, 서울 광화문 네거리로 나와 환호하는 서울 시민들의 모습.
1945년 8월15일, 무조건 항복한다는 일왕의 육성방송을 듣고 있는 서울의 일본인들.
8.15 조국 해방은 옥중 독립투사들에게 더욱 감격스러운 것이었다. 사진은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풀려 나와 해방 만세를 외치는 출옥 애국인사들과 이를 환영하는 시민들의 모습. (1945년 8월15일)
조국의 해방을 환호하는 서울역 광장과 남대문로 일대의 인파. 만나는 이마다 서로 부둥켜 안고 목이 터져라 해방 만세를 외치며 밤이 되어도 흩어질 줄을 모르는 군중.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고 환호하는 서울역 앞의 시민들
시민환영 받는 건국 준비위원회 몽양 여운형 선생 - 45년8월16일 휘문고 교정에서 연설하기에 앞서 시민들의 환영을 받고 있는 몽양(앞쪽 가운데).
백범 김구선생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의 귀국 .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중경을 떠나는 김구일행. 왼쪽으로부터 이청천장군. 안미생(김구선생의 자부) 김구.
임시 정부 귀국 환영 꽃전차.
36년 압제로부터 광복을 맞아 감격어린 표정으로 귀국하는 임시정부의 김구주석과 뜨겁게 영접하는 동포들.
조국으로 돌아온 임정요인들 - 왼쪽 세번째가 법무위원이었던 이시영, 다음이 주석 김구, 부주석 김규식, 외무부장 조소앙, 내무부장 신익희 순.
총독부 광장의 게양대에서 일장기가 내려지고 있다.(1945년 9월9일)
조선총독이 주한미군사령관에게 항복한 직후인 1945년 9월9일 오후 철수하고 있는 일본군.
1945년 10월27의 해방경축 종합경기대회. 해방후의 첫 전국체전에서 태극기를 들고 감격에 벅차 눈물을 닦고 있는 손기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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