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illy Soh 의 글,생각,의견

제2차 한국 전쟁을 예언한다. - 한국인들이여! 잊었는가, 그날의 비극을!

Billy Soh 雲 響 2010. 6. 9. 19:26

 

잊었는가, 그날의 비극을 !  

 

6.25의 노래

                               
                                              작사: 박두진     작곡: 김동진
 

1.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짖밟아 오던 날을

 

맨 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했던 날을

 

<후렴>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례

 


2.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불의의 역도들을 멧도적 오랑케를

 

하늘의 힘을 빌어 모조리 쳐부수어 흘려온 값진 피의 원한을 씻으리

 


3.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정의는 이기는 것 이기고야 마는 것

 

자유를 위하여서 싸우고 또 싸워서 다시는 이런 날이 오지 않게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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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한국 전쟁을 예언하며

 

역사의 순환은 좋은 것이든 나쁜것이든 행했던 원인의 양과 질에 따라 엄격하게 상응하는 댓가를 받

거나 지불하게 되는것이 진리라고 나는 믿고있다. 동양 서양 옛날 현재를 막론하고 수많은 역사적 사

실들이 그  진리를 우리 눈앞에서 증명해 보이고 있다는 것을 지성인이라면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국가나 민족이나 종족이나 가문이나 가족이나 개인이나 회사나 단체나 재단이나 종교나.. 세상 만물에

차별 없이 공평하게 적용된다. 그것이 조물주의 법칙이다. 세상 헌법이나 법율은 시대에 따라 변하고

개정 할 수도 있지만 이 조물주의 법칙은 만세 불변이며 어떤 인간도 요인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러니 이처럼 무서운 법율은 없다.

 

누군가는 말하길 인생은 운칠기삼 運七氣三 이니, 그 사람은 운이 틔었다느니, 그 집안은 망할 운이

끼었다느니 하고 말들을 한다.  그러나 이표현은 행위 주체의 진로를 자신이 아닌 외부적 요건에 의존한다

는 지극히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의미이다. 세상에 '운', '팔자' 등의 단어는 어휘로는 존재하나 실체는 없는

허구적 추상 명사이다. 그 표현은 결과물이 없거나 잘못된 결과물을 만든 시람을 위로하기 위하여 만들어

말이거나, 그 국가나 가문이나 개인이 비굴하게 변명하는데 쓰도록 만들어준 어휘이다. "운이 나뻣죠",

"그런 팔자니 어떡해요" 그런 말이라도 하도록 한쪽 귀퉁이를 열어놓는데 소요되는 말이라는 것이다.

 

운은 철두철미하게 자기가 만드는 것이다. 세상에 먼지 한점도 공짜는 없으니 조물주로 부터 받은 머리와

육신의 건강함과 다른 객체의 반대와 장애물에 쉽게 포기하지 않는 배짱과 강철같은 확신으로 국가나

개인의 역사의 주도권을 스스로 장악해 나가야 한다. 그런 사람들은 점쟁이 한테 갈 필요가 없다. 점성

주술가도 필요없다. 점성가 점쟁이 주술가는 말도 꺼내기 전에 운명 주도자의 기에 눌려 튀겨져 나가

깨져 버릴 것이다.

 

각설하고.., 금년이 한국전쟁 60주년이다. 인간의 시간으로 본다면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역사

시간으로는 빗방울 하나가 길가에 튀기는 시간 보다도 더 짧은 순간이다. 밥술이나 좀 먹게 되었다

어떻게 불과 60년전의 일을 그리 쉽게 잊어버린다는 말인가. 아니, 밥술이나 좀 뜨고 옷 벌이나 좀 두

르고 다닌게 얼마나 되었는가. 그 세월이 수백년이라도 흘렀는가. 1980년 부터 조금씩 나아지게 되었다

생각해도 고작 30년이다.  1970년 내가 대학 1학년이 되었을 때만해도 겨울 아침에 살곶이 다리를

건너 뚝방천을 걸어가면 게딱지처럼 붙은 판자촌에 판자 사이가 삐끔히 보이는 공동화장실 앞에는 아줌

아가씨 아저씨 총각 할 것 없이 수십미터식 줄이 늘어서있곤 했다. 몇걸음 더 걸어가면 어제밤 얼어

죽은 시체위에 누군가가 가마니 거적을 덮어높은 시체의 발이 삐죽이 나와있곤 했다. 6.25의 폐허와 5.

16 후에 그토록 경제개발을 외쳤지만 아직 그 발전이 피부로 느껴지기 전이었던 것이다

 

그 후에 우리들 목숨 걸고 치열하게 살아서 밥이나 먹게 되었다. 그런데, 그 전쟁의 처절했던 비극과

전후의 비참했던 삶들을 불과 60년 동안에 잊어가는 민족이 된단 말인가. 우리 자식들을 어떻게 가르쳤

길래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따르는 주사파가 난무하고, 막스 레닌의 ML계니 뭐니 하는 자들이 독버섯

처럼 피어나는 것을 허용한단 말인가. 그들은 이제 정부 부처내, 국회, 대학교수, 중고등학교 교사, 지방

정부 심지어 군부내 까지도 막론하고 사회의 각계각층에 파고들어 피로지킨 이나라를 뒤집어 엎으려고

갖은 교활한 언변으로 꿀을발라 군중을 혼미토록 선동 기망하고있다. 민중의 세상으로 뒤집어 엎으면 모든

사람이 잘살게 된다는 것이다. 해방후 김일성이 진주하여 폈던 논리와 일점 일획도 차이가 없이

일치한다. 아주 나라를 말아먹으려고 혈안이 되어 전쟁 광신자들을 맞받아 부르고 있다. 망국의 운명을

스스로 조성하기 위해 첩경의 길을 찾아 헤매고 있는것이다.

 

그런데 더욱 기가찰 문제 현상은 이들의 설득력이 너무 우수하여 점차 그 무리의 지평을 넓혀 나가고 있

다는 사실이다. 국회에서 까지 '북한이 동족인데 왜 헐뜯느냐' 하고 있으니 통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저 동족이라는 말이면 다 정당화 되고 내심을 속일수 있다고 날뛰는 무리들이다.  그자들을 모조리

색출하여 전방으로 보내 그들이 그렇게 사모하는 북한의 기관포 앞에 세우면 어떨가 생각해 보지만

그도 어려운일이라 그 독버섯을  방치하고 있으니 그 독버섯 무리들은 점차 그 개체 수가 늘어나기만 한다.

실제로 사회에서 얘기를 나누다 보면 "전쟁이나 터져서 세상 확 뒤집어 버리면 좋겠다"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만나니  그 무리수가 일정수준을 넘어서는 날, 그들이 기다리는 기회가 점점 성숙해 가는 그

어느날  '제2차 한국 전쟁'은 발발하게 될 것이다. 새로운 그 전쟁의 결과는 아마도 민족 멸족에 버금가는

수준이 될것이다.

 

한국인 들이여!

모두가 혼미해진 지성과 판단력을 회복해야 한다. 60년의 평화가 우리의 뇌를 병들게하여 너나없이

무뇌아 생활을 해왔다. 밥술이나 먹는게 엄청 대단한듯 너나없이 건방을 떨고 꺽둥거리며 눈을 감고

살았다. 앞의 적은 60년을 한결같이 지하에 풀섶에 총부리를 은폐하여 겨누고 있는데 독버섯들이

마음대로 핑핑지껄이는 꿀바른 감언이설에 '혹시나' 하고 넘어가 백치같은 생활을 하였다. 이것이

정확히 제2차 한국전쟁원인 조성 행위이다. 자신을  모르고 건방 떨고 꺽둥거리던 역사상의 모든

나라들은 단 하나도 예외없이 그 함정의 지름길로 찾아들었다. 콩심은데 정확히 콩나고 팥심은데 정확히

팥난다. 현재 처럼 가면 분명히 전쟁으로 간다. 로마, 칭기스칸 제국, 쇠퇴한 대영제국, 쭈그러진 스페인,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국, 러시아 제국, 명, 청, 일본 제국.. 그예는 수도 없다.

 

6.25 ! 잊었는가 그날의 비극, 처참한 피의 절규.. 모두가 자식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60돌이다. 집권

세력은 강대국 사이의 소강국 정책을 집요하게 실행해 나가야 한다. 국민을 통합할 정책을 하루속히

펴나가 대한민국 하나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그 사이사이에 수도 없이 박혀있는 독버섯을 가려낼 

프로젝트가 가동 되어야 한다.  지난날의 피흘린 역사를 지금 돌아보고 잘못된 핸들을 바로잡을 기회를

놓친다면 전쟁의 구름은 결코 공짜로는걷어질수 없다는 점을 국민 모두의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이다.

피로 싸워 평화를 얻었던 선열들에게로 돌아갔을때 질책과 부끄러움은 면해야 할 것 아닌가 !!

 

2010 6 9  雲響齊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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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인용;NARA(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미국 국립 기록 보관청)자료
 

1950. 10. 22. 평양, 북한 주민의 학살 현장



1950. 11. 2. 트럭에 실려 고아원으로 가고 있는 거리에 버려진 아이들



1950. 11. 11. 바지 저고리들의 포로

 


1950. 11. 13. 함흥 덕산광산, 482명을 생매장한 갱도에서 꺼내 놓은 시신중 아들을 찾고 있는 한 아버지


1950. 11. 13. 남편이 생매장된 갱도 어귀에서 오열하는 아내


1950. 8. 12. 북한군 포로


1950. 8. 10. 폭격으로 불타는 마을


1950. 8. 10. 핫바지들을 인솔하는 미 해병대


1950. 7. 29. 경북 영덕, 포화에 쫓기는 피난민


1950. 7. 29. 경북 영덕, 남자는 등에 지고 여자는 머리에 이고 지향없이 떠나는 피난민 행렬



1950. 7. 29. 경북 영덕, 논두렁에 머리를 처박고 죽은 북한군 병사


1950. 7. 29.  부상당한 전우를 업어가고 있는 한 병사


1950. 7. 29. 마을 소년들이 주먹밥을 만들어 군인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1950. 7. 29. 야간전투후 주간 취침


1950. 7. 29. 취침 후 병기 손질


1950. 8. 4. 피난민들의 보금자리 산동네 판자촌


1950. 8. 8. 누가 이 아이를 버리게 했을까


1950. 8. 8. 다리 아래 피난민 움막


1950. 8. 9. 임시 포로수용소


1950. 8. 2. 금강철교


1950. 8. 3. 뙤약볕 속에 전선으로 가는 국군 행렬


1950. 8. 3. 한국전쟁 무렵의 부산항, 멀리 영도가 환히 보인다


1950. 7. 29. 경남 진주 부근에서 생포한 빨치산(?). 원문은 포로로 되어 있다


1950. 12. 16. 흥남부두. 후퇴하려고 수송선을 기다리는 병사들


1950. 12. 18. 흥남에서 묵호(동해)로 후퇴한 후 수송선에서 내리는 병사들


1950. 12 24. 유엔군 후퇴 후 텅 빈 흥남부두


1950. 12. 24. 유엔군 후퇴 후 불타는 흥남항


1950. 12. 26. 전차도 후퇴대열에. 흥남항에서 출발해 부산항에 도착하고 있다


1950. 12. 27. 인천항에서 출발해 부산항에 도착한 피난민들


1950. 1. 3. 1·4 후퇴를 앞두고 불타고 있는 서울 시가지


1951. 1. 5. 1.4 후퇴 피난민 행렬


1951. 1. 5. 언 한강을 피난민들이 걸어서 건너고 있다



1951. 1.4. 한강나루터에서 건너야 할 강을 바라보는 피난민 아이들


1951. 1. 4. 한강 임시 부교


1950. 12. 29. 양평 , 생포된 포로들


1950. 11. 29. 최전방의 간호사들


1951. 1. 6. 수원역에서 남행열차를 기다리는 피난민들


1951. 1. 5. 한미 합작의 한국군 병사 장비. 신발, 겉옷 , 모자 : 한국제. 코트, 소총, 탄환


1951. 1. 5.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고 미군 부대에 몰려온 한국의 노무자들


1951. 1. 4. 무개화차에 몰린 피난민들


1950. 12. 1. 부산 임시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를 등록하려고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1951. 1. 16. 대구 근교 신병훈련소에서 신병들이 M1 소총 사격 교육을 받고 있다


1951. 1. 4. 대구 근교 신병훈련소에서 신병들이 PRI(사격술 예비훈련)을 받고 있다


1950. 11. 5. 국군과 유엔군이 수복한 북한의 어느 지역(평산)에서 주민들이 지역 대표와 치안대장을 뽑고 있다. 그들 대표는 무슨 색깔의 완장을 찼을까?


1951. 1. 5. 서울. 꽁꽁 언 한강을 피난민들이 조심조심 건너 남하하고 있다


1950. 9. 22. 전쟁에는 2등이 없다. 포로가 되는 순간부터 치욕이다. 미군들이 생포된 포로의 온 몸을 수색하고 있다


1950. 9. 20. 미군이 인민군 포로들을 발가벗긴 채 수색하고 있다.


1950. 9. 17 인천. 유엔군 인천상륙작전 후 함포사격 포화에 무너지고 그을린 인천시가지


1950. 9. 18. 인천에 상륙하기 위해 전함에서 병사들이 하선하고 있다.


1951. 5. 28. 38선 부근 6마일 남쪽 마을에서 탱크의 포화소리에 귀를 막는 소년들. 이들의 누더기 바지 차림이 그 무렵 소년들의 대표적 옷차림이다.


1950. 8. 18. 애송이 북한군 소년 포로를 미군 포로심문관이 취조하고 있다. 곁에는 통역 겸 여비서


1950. 8. 18. 임시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의 신상명세서를 만들고 있다


1950. 8. 18. 포로수용소 전경


1950. 8. 18. 포로수용소 천막 안에서 밥을 먹고 있다


1950. 8. 18. 포로들이 줄을 서서 밥을 타고 있다


1950. 8. 11.피난민들의 움막


1950. 8. 13. 잠깐의 휴식시간에 LMG(기관총) 병기 손질을 하고 있다


1950. 8. 13. 박격포 사격 훈련


1950. 8. 15. 피난민 행열


1950. 8. 15. 창녕 남지철교. 국군의 최후 방어선으로 핏빛으로 강물이 물들 만큼 피아 희생을 치렀던 격전의 현장


1950. 8. 24. 모정 무한, 젖을 먹이는 어머니


1950. 8. 23. 머리에 이고 등에 업고 앞에 붙들고... 고단한 피난 행렬


1950. 8. 18. 낙동강 전선에서 쌕쌕들이 폭격을 가하고 있다


1950. 8. 25. 폭격에 불타고 기총소사에 죽어가다


1950. 8. 15. 마산 부근, 피난민들이 배를 기다리고 있다


1950. 8. 15. 전란으로 폐허가 된 마을


1950. 8. 22. 불을 뿜는 전함


쌕쌕이의 융단 폭격으로 초토가 된 경북 왜관


1951. 1. 2. 부산 임시 포로수용소에서의 북한 여군 포로


1950. 8. 포항 부근의 한 마을이 포화에 불타고 있다


1950.9. 15. 인천상륙작전을 함상에서 진두 지휘하는 맥아더 장군


1950. 9. 15. 인천 월미도로 상륙하는 함정들


1950. 9. 16. 인천에 상륙한 후 시가지를 활보하는 유엔군들


1950. 9. 16. 인천부두로 상륙하는 맥아더 장군


1950. 9. 16. 인천시가지에서 생포한 북한군들


1950. 9. 16. 월미도에 나뒹구는 북한군 시신들


1950. 9. 15. 인천에서 생포한 포로들


1950. 9. 17. 서울 진격 작전


1950. 9. 23. 서울 탈환을 눈앞에 둔 노량진에서 바라본 끊어진 한강 철교


1950. 9. 25. 한강 도하 작전


1950. 9. 29. 미군 전차가 서울 시내 중심가로 들어오고 있다


1950. 9. 27. 경인가도에서 국군 수복을 환영하는 흰옷 입은 사람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북한군이 내려왔을 때는 또 다른 깃발을 흔들어야 했던 불쌍한 백성들


1950. 10. 1. 서울 시청 일대


1950. 10. 1. 소공동 일대


1950. 10. 1. 남대문에서 바라본 서울역


1950. 10. 1. 반도호텔(지금의 롯데호텔)에서 바라본 서울 시가지, 멀리 중앙청이 보인다


1950. 10. 1. 반도호텔에서 바라본 을지로


1950. 9. 30. 서울의 아침, 폐허가 된 시가지에 사람들이 부산하게 오가고 있다


1950. 9. 29. 서울 탈환 환영대회 직전의 중앙청 홀, 이승만 대통령 내외와 맥아더 장군


1950. 9. 29. 유엔 깃발로 펄럭이는 중앙청 광장, 서울 탈환 환영대회가 끝난 직후 바로 옆 건물이 불타고 있다


1945. 9. 9. 미군이 서울에 입성하고 있다


1945. 9. 9. 미군들이 서울시민들의 환영 인파에 싸여 있다


1945. 9. 9. 조선총독이 총독부 홀에서 미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1945. 10. 12. 부산항 부두에서 일본군인들이 본국으로 떠나기 전 미군들에게 철저하게 검색을 당하고 있다


1946. 1. 16.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측 대표가 기조 연설을 하고 있다


1947. 5. 25. 개성 인근의 38선 미군 초소, 그때만 해도 요란한 철조망은 없었다


1948. 5. 8. 다가올 5. 10 총선거를 앞두고 경찰들이 선거 방해를 염려하여 죽창을 거둬들이고 있다


1948. 5. 10.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실시된 5. 10 총선거에 유권자들이 투표하고 있다


1948. 5. 10. 선거 방해 사범으로 체포된 5인, 맨 왼쪽 여인은 장택상을 암살하려다가 체포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1948. 5. 31. 국회 개원식 날 국회 의사당 앞에서 서북청년단들이 소련 철수를 주장하는 데모를 하고 있다

                     6.25 후 1970년대까지의 궁핍했던 생활상


문종이를 바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