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illy의 좋아하는 詩

별 헤는 밤 The Night I Count the Stars

Billy Soh 雲 響 2008. 10. 31. 10:12

별 헤는 밤                   윤동주
The Night I Count the Stars     
Dongju Yoon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The sky through which  seasons pass

Is full of autumn.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듯 합니다.

Without any worries

I could possibly count all the stars in autumn.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 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The reasons I cannot count all of the stars

Which are carved into my heart one by one are

Because the morning is soon to arrive

Because tommorrow night is yet to come, and

Because my youth has yet to end.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To a star memory

To a star love

To a star loneliness

To a star yearning

To a star poem

To a star mother, mother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Mother, I whisper a beautiful word to a star.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Names of the friends who sat next to me in elementary school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Names of foreign girls like Pae, Kyoung, Ok

벌써 아기 어머니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Names of the girls who are already mothers now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Names of my poor neighbors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Names like dove, puppy, bunny, mule, roe deer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Names of poets like Francis Jam, Rainer Maria Rilke, I whisper them.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They are too far away.
별이 아스라이 멀 듯이.

As far as the stars.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Mother,

And you are far in the Northern Gando.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Yearning for something,

I wrote my name

On this hill full of the star lights

And I covered it with dirt.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A bug buzzes over night

Because it laments its shameful name in its own way.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거외다.

But when the winter is over and the spring comes to my star

Just like green grass covers a tomb

The grass will flourish proudly

On the hill where my name is bur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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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윤동주 시인 최후의 사진

쿄토 우지강에서 열린 윤동주 송별회 사진. 현존하는 윤동주 최후의 사진으로 알려져 있다.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윤동주. 이 사진으로 윤동주와 인연을 맺은 우지시의 시민들은 인근 우지공원에 윤 시인의 기념비를 세우고자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2009.7.3 연합 뉴스에서 발췌

 

 

윤동주의 스물아홉 생애는 지금도 찬란히 빛나고 있다. 너무 일찍 별이 되어 떠난 시인 윤동주는 '서시'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고 생각하며 그 강박감과 현실의 어려움 사이에서 고뇌하고 갈등하며 부끄러워하였다.

 

윤리적 자기완성을 끝없이 추구하며, 진실한 내면의 길을 걷기에 부단히 힘쓰던 시인의 모습을 우리는 그의 순결한 영혼과 아름다운 시를 통해 알고있다.

 

윤동주는 어두운 일제 식민지 시대의 마지막 암흑기를 지키다 사라져 간 시인이다. 그는 1917년 12월 30일, 북간도 명동촌에서 기독교 장로이며 소학교 교사인 아버지 영석(永錫)과 어머니 김룡(金龍) 사이의 7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유년시절을 보낸 명동촌은 1900년대에 들어 선각자들이 이주해오면서 종교와 교육, 그리고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어있었다. 그의 집안은 다분히 학구적인 데가 있었고 애국정신이 강하였다.

 

9세 때 윤동주의 외삼촌 김약연 선생이 설립한 명동학교에 입학하였는데, 명동학교는 조선역사와 조선어 교과목을 가장 중시하였고, 만주사변이 일어난 1931년까지도 태극기를 게양하고 애국가를 부를 정도로 민족의식이 투철한 학교였다. 그의 고향, 그의 집안, 그의 학교는 윤동주에게 민족혼을 일깨워줄 수 있는 배경이 되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윤동주가 강한 애착을 갖고 있는 고향이 민족적 분위기가 매우 강한 곳으로 그의 역사의식, 민족의식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는 늘 떠나온 고향 북간도에 대한 회상이나 추억의 이미지, 소년 시절의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다.시 '별헤는 밤'은 윤동주가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다니던 1941년11월 5일에 씌어진 작품으로 고향 북간도와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나타낸 시이다. 이 시의 핵심적 이미지는 "별"이다. 별은 언제나 우리에게 순수와 동경, 이상과 같은 의미로 다가온다.별은 어둡고 불안한 밤의 이미지와는 대조적으로 밝고 아름다운 이상의 세계를 상징한다. 이러한 별의 이미지인 과거의 추억은 아름다웠던 회상의 세계이다.이상의 세계가 멀 듯이, 현실은 식민지적 상황으로 북간도처럼 멀고 어두운 실향의 세계이다. 윤동주는 이런 현실을 절감하며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부끄러운 자신의 이름자를 흙으로 덮어 버리고 그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정서는 결코 감상이나 절망에 빠지지 않고 자연의 순환적 질서를 통한 재생의 의미에 따라 희망으로 반전 되는 것이다. 

 

윤동주는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할 때, 졸업기념으로 19편의 자작시를 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판하려 하였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필시집 3부를 만들어 은사 이양하 선생과 후배 정병욱에게 1부씩 주고 자신이 1부를 가졌다 한다. 그는 1942년 토오쿄오에 있는 릿쿄대학 영문과에 입학 하였다가 1학기를 마치고 쿄오토에 있는 도시샤대학 영문과에 편입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1943년 7월 독립운동 혐의로 송몽규와 함께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각각 2, 3년 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송몽규는 3월 10일에 29세의 젊은 나이로 해방의 그날을 6개월 앞두고 옥사하였다.

 

내가 이 시와 영역을 소개 한것은 윤동주가 간직하였던 나라를 잃은 민족의 애닲은 설움, 또한 그 통한의 아픔을 내면의 아름다움으로 승화 시켰던 그의 순수한 영혼을 나의 많은 일본인 친구들과 또 세계의 지성들과 나누고 공감하고 싶어서이다.

 

용정 자택에서 치러진 시인 윤동주의 장례식 모습. 시인은 광복을 불과 6개월 남겨두고

일제의 모진 악형을 견디다 못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9살의 나이로 순국했다

                                       (1945년 3월 6일 용정 자택)

 

1930년대 평양 숭실중학교 시절 교복을 입은 윤동주(뒷줄 오른쪽)와    문익환(뒷줄 가운데)

모습.

 



명동교회의 1910년대 모습. 당시 명동교회의 교인들은 5백명이 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