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북한 관계의 요약
1945년 ; 한국의 해방과 동시에 남북한은 분단되고 남한측은 미군정 실시 되었다.
1948년 ; 1948년 2월에 김일성은 조선인민군을 창설했다.
1949년 ; 3월 김일성은 소련을 방문하여 스탈린에게 남침 지원 가능성을 타진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의 남침 제의를 거부하고 그 대신 대규모의 군사원조를 약속했다.
1949년 중국은 북한의 요청에 따라 중공군에 구성되었던 조선족 3개 사단, 약 5만 명을 북
한으로 보내어 북한의 군사력 증강에 크게 지원하였다.
1950년 ; 1950년 1월 스탈린은 과거의 입장을 바꾸어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승인했다. 그 배
경은, 1949년 8월에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하여, 미국의 핵 독점체제가 무너졌다.
또한, 그해 10월 중국에서 공산혁명이 성공함으로써 스탈린은 동북아 지역의 정세
가 공산주의 국제세력에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기때문에 북한을 지원하면 무력 남침
통일이 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애치슨 미국 국무장관의 태평양방위
선 발표에서 한반도가 빠져 있었다는 사실은 김일성과 스탈린이 정세를 오판하
는데 더욱 크게 일조했다. 전쟁 개시 전까지 소련은 북한에 신형 소련제 탱크를 비
롯하여 대규모의 군사원조를 제공했다.
1950년 ; 북한의 남한 침공으로 6.25 한국전쟁이 발발되고 6월 25일 당일 오후 소집된 UN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에 따라 미국을 중심으로한 16개 회원국이 즉시 전쟁에 개입
하였다.
1950년 ; 9월 15일. 대구 부산 지역을 제외한 전국토가 인민군에게 유린당한 상황에서 맥아
더 사령관의 결단으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여 북진을 시작하였다.
1950년 ; 10월말 중공군 350만명의 엄청난 부대가 한국전에 진입하였다.
1953년 ; 한국전쟁 휴전협정이 조인된후 양측은 비무장지대에서 군사 활동을 감시할 군사정
전위원회 설치에 합의했다. 비무장지대는 남방경계선과 북방경계선을 각각 2km로
정하여 폭을 4km로 설정했다. 그러나 북한은 비무장지대내에 160개의 GP를 설치
하고 약 10000명의 병력을 주둔 시켰다. 이에 대해 남한측은 60개의 GP에 1800명
의 병사를 주둔 시켰다. 미국은 북한을 즉시 적국으로 규정하고 제재를 가하였다.
1968년 ; 북한이 미국 해군 전함 푸에블로호를 납치하였다.
1988년 ; 미국이 북한을 테러 지원국으로 지정하였다.
1969년 ; 북한이 미국 해군 정찰기를 격추하였다.
1994년 ; 미국과 북한이 북한의 핵무기 개발 방지를 위한 제네바 협상에 조인하였다.
1998년 ; 북한이 첫번째 장거리 미사일을 시험 발사하였다.
1999년 ; 북한이 미사일 발사 유예를 선언하고, 미국은 대북 제재를 완화하였다.
2000년 ;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하였다.
2002년 ; 미국은 1994년의 제네바 핵활동 동결 합의를 위반한 북한을 '악의축'으로 지정하였
다.
2006년 ;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은 북한의 김정일을 '폭군, 정치적 얼간이'라고 비난하였
다.
2008년 ; 미국은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하였다.
2011년 ; 북한은 김정은이 권력을 승계하고 핵개발을 가속화하였다.
2018년 ;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이 1차 회담하고 핵실험 및 개발 중
단에 합의하였다.
2019년 ;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진후 2월 27일 2차 트럼프, 김정은 회담이 발표되었다.
휴전협정 이후 북한의 대한민국에 대한 주요 도발사
1958년 2월 16일 ; 대한민국 KNA 민간 항공기 '창랑호' 납치.
1968년 1월 21일 ; 김신조 등 무장간첩 31명이 청와대 습격 기도.
1968년 10월 30일 ; 무장 공비 120명 울진. 삼척 지역 침투.
1969년 12월 11일 ; 간첩 조창희가 강릉발 서울행 KAL기 납북.
1970년 6월 22일 ; 간첩 2명이 정부 요인 암살 목적으로 국립묘지 현충문 폭파.
1974년 8월 15일 ; 간첩 문세광이 박정희 대통령 저격 미수하고 육영수 여사 서거.
1976년 8월 18일 ;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1983년 10월 9일 ; 미얀마 아웅산 폭탄 테러, 우리 정부 각료들과 기자 17명이 사망하고
13명이 부상. 미얀마는 북한 요원 범인 체포.
1986년 9월 14일 ; 김포공항 폭탄 테러.
1987년 11월 29일 ; KAL858기 폭탄 테러 격추.
1996년 9월 18일 ; 잠수함을 이용하여 무장 공비 강릉 침투.
1998년 6월 22일 ; 북한 잠수정 속초해안 침투.
1998년 12월 17일 ; 북한 반잠수정 전남 여수해안 침투.
1995년 8월 15일 ; 제1연평해전.
2002년 6월 29일 ; 제2연평해전.
2009년 11월 9일 ; 대청해전.
2010년 3월 26일 ; 천안함 폭침.
2010년 11월 23일 ; 연평도 포격.
2015년 8월 4일 ; DMZ 지뢰 매설 폭발.
2015년 8월 20일 ; 연천에 로켓포 포격
상기 내용은 주요 도발사만을 정리 한 것이다. 소규모 도발은 수천건에 이른다.
1994년 10월 17일 미북 제네바 협상의 주요내용
1. 핵 특별사찰을 통한 핵 의혹문제를 해소한다.
2. 핵 동결과 관련시설을 해체한다.
3.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의한 감사를 보장한다.
4. 핵확산금지조약(NPT)에 복귀하고 핵연료봉을 폐기처리한다.
5. 미국은 경수로 건설을 지원하고 대체에너지를 제공한다.
이 협약에 따라 80억 달러가 소요된 100MW 용량의 경수로 2기 건설과 산업용 중유 50만톤이
북한에 제공되었다.
북한의 핵 개발사
상기와 같이 북한은 미국과 핵개발을 중단한다고 협상에 서명하고 막대한 댓가를 확보하였지만 내부의 핵개발에대한 정책은 아래와 같이 완전히 별개로 60년 동안 중단없이 진행 되었다.
이것이 바로 북한의 철저한 Two Track 전략 이다.
사진출처 http://rotckorea.or.kr/bbs/view.php?tn=data&cate=&id=1&q=tn%3Ddata
제1기(1950년대~1980년대): 예비 단계
김일성은 6.25 한국전쟁후 미국의 엄청난 전쟁수행능력과 2차대전말 일본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위력을 절감하고 핵개발을 국가의 최우선 지속 전략으로 설정했다.
1956. 3: 소련과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협정 체결
1963. 6: 소련으로부터 소형 연구용 원자로 IRT-2000 도입
1974. 9: 국제원자력기구(IAEA) 가입
1985. 12: 핵비확산조약(NPT) 가입
제2기(1990년대): 착수 단계
1991. 12: 한국ㆍ북한 간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 합의
1992. 5~1992. 6: IAEA가 북한에 대하여 임시사찰 실시
1993. 3: 핵비확산조약(NPT) 탈퇴 선언
1994. 6: 국제원자력기구(IAEA) 탈퇴 선언
1994. 10: 미ㆍ북 간 “제네바 기본합의서” 체결
1995. 12: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ㆍ북한 간 “경수로 공급 협정” 체결
제3기(2000년~2009년): 진전 단계
2002. 9: 도널드 럼즈펠드 미 국방부 장관, “북 핵무기 보유” 주장
2002. 12: 핵 동결 해제 발표
2003. 1: 핵비확산조약 탈퇴 선언
2005. 2: 핵무기 보유 선언
2005. 9: “9.19공동성명” 채택
2006. 10: 제1차 핵실험 실시
2007. 2: “2.13합의” 채택
2009. 5: 제2차 핵실험 실시
제4기(2010년~1017년): 성취 단계
2013. 3: 제3차 핵실험 실시
2016. 1: 제4차 핵실험 실시
2016. 9: 제5차 핵실험 실시
2017. 9: 제6차 핵실험 실시
북한 정권 3대에 걸친 불굴의 Two Track 전략 추진 결과로 북한은 핵보유국이 되었다. 핵뿐 아니라, 그 핵을 탑재할 수 있는 미사일 또한 끊임없이 개발하여 드디어 대륙간탄도탄(ICBM) 마저도 시험발사에 성공하였다. 그들은 이제 더이상 핵이나 미사일을 시험 할 필요성이 없어졌다. 이미 보유한 핵 만으로도 미국을 포함한 지구촌 어디든 공격할 수 있는 핵무력을 갖추게 된것이다. 이러한 위기감이 바로 미북 트럼프 김정은 정상회담이 열리게된 배경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집권층은 그들이 견지해온 사상에 따라 민족의 화해라는 이름아래 대북 유화책을 정부의 주요 시책으로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미국의 정책에 대해서는 정말 이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 큰 초 강대국이 한국전쟁에서도 근근히 휴전을 이끌어낸것은 재론할 필요도 없거니와 과거 70년 동안 수도없는 도발을 당하고도 북한 하나를 어쩌지 못하고 쩔쩔 매고 있으니 어찌된 전략이란 말인가.
북한은 제네바 협상을 조인하고 나서 그 댓가로 천문학적 지원을 받고도 눈섭하나 까딱하지 않고 핵개발을 지속하여 드디어 핵개발 국이 되고 만것이다. UN을 리드하여 강력한 경제제재를 가하였지만 북한의 김정은은 끄떡도 없이 경제 개발에도 집중하여 한국보다 높은4퍼센트대 성장을 하고 있다. 미국의 완벽하고 검증 가능하고 되돌릴수 없는 핵폐기를 조건으로 한다(CVID)는 보도에 김정은은 속으로 코웃음을 치고 있을 것이다.
드디어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도 CVID의 불호령은 간곳없이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며 2월 27일의 하노이 협상에 응하는 눈치이다. 핵 폐기는 단기간에 하지 않아도 된다니 수도없이 당했던 그 협상을 또다시 되풀이 하겠다는 셈인가. 답답한 가슴을 하소연 할 곳이 없다. 북핵 해결은 다른 방법이 없다. 로마의 시저가 이미 해답을 명확히 주지 않았던가. 한미의 지도자들은 역사의 교훈을 외면하고 있다는 말인가,
<운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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