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illy Soh 의 글,생각,의견

공산주의 협상전략에 대한 이해- 2 (미국과 월남의 평화협상 과정을 중심으로)

Billy Soh 雲 響 2019. 2. 11. 21:27

베트남 전쟁의 경과와 평화협상 과정

1964년 8월 2일

베트남 근해의 통킹 만에서 미국 제7함대 소속 구축함 매덕스호와 C. 터너조이호가 북베트남군의 어뢰정으로부터 공격을 당했다는 통킹만 사건이 발생하였다. 존슨대통령이 즉시 보복 폭격을 지시하였다.


1964년 8월 5일

미 해군 항공모함 전폭기들이 북베트남 해군 어뢰정 기지와 석유저장시설을 폭격하여 본격 전쟁에 돌입하였다.


1966년 6월 29일

미 공군이 하노이, 하이퐁 유류저장고를 폭격하여 전쟁이 확산 되었다.


1966년 7월 17일

북베트남은 전 국민과 군대에 비상동원령을 선포하였다.


1966년 8

남베트남 주둔 미군이 30만여 명으로 크게 증원되었다. 미군 화력이 압도적이어서 상황이 조기에 종료될것으로 예측 했으나 실상황에서는 반대로 장기전이 전개되었다. 펜타곤은 전차와 비행기로 밀어붙이는 재래식 전쟁에는 능숙했으나, 베트남에서의 게릴라전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전투였다. 전투가 정글에서 펼쳐지는 탓에 전차 등 중장비는 제대로 활용할 방법이 없었고, 보병이 홀로 정글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1969년 1월

반전여론의 영향으로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리처드 닉슨은 취임 직후 베트남에서의 단계적인 철군과 아시아 주둔 미군을 대폭적으로 감축시키겠다는 이른바 닉슨독트린을 발표하였다.


1971년말

미군 지상군 전투부대의 대부분은 철수하였다.


1972년 3월

북베트남의 춘계공세가 한창일 때 미국은 지상군 재파병이 아닌 공군과 해군의 항공력을 재소집하여 대응하고 지상군은 그대로 철수하였다. 같은 해에 닉슨이 재선에 성공하고, 단계적인 철군은 계속 이어졌다.


1972년 8월

닉슨의 국가 안보 자문이었던 헨리 키신저와 북베트남의 레둑토는 비밀리에 정전협상을 추진하고 있었다. 키신저와 레둑토는 합의에 도달하였지만 남베트남의 티우 대통령은 평화협정 내용의 수정을 요청하였다. 그런 와중에 북베트남이 협정 내용을 공표하자 닉슨 행정부는 북베트남이 기만 전술을 사용하고 있다는 비난과 함께 협상을 중단했다.

 

1972년 12월 18일-29일까지

닉슨은 남베트남에 대한 계속적인 지지와 협상에서의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하노이와

하이퐁을 무차별 폭격하였다.

 

1973년 1월 15일

닉슨은 북베트남에 대한 공격을 중지한다고 발표

 하였다.


1973년 1월 27일

프랑스 파리에서 1973년 1월 27일 남베트남(월남), 북베트남(월맹), 남베트남 해방전선(베트콩)의 외무장관과 미국무장관이 만나 베트남전 종식을 위한 파리평화협정에 조인하여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을 공식적으로 종결 시켰다.


파리 평화협정의 내용

1. 조인 후 60일 이내에 미군은 철수 할것 

2. 포로를 상호 석방 할것

3. 남베트남 정부, 남베트남 해방전선(베트콩), 제3세력 참여에 의한 민족화해전국평의회

    를 설치 할것.

4. 미국은 월맹에 40억 달러(20억 달러는 미국 직접원조, 20억 달러는 IBRD 차관)

    원조를 제공 할것. 

5. 휴전감시위원단인 캐나다, 이란, 헝가리, 폴란드 4개국이 동시 참여 서명 할것.

6. 월맹은 하반라우 외무차관을 150명 고문단과 함께 사이공에 체류 시킬것(인질형식).


이와같이 완벽한 협상이었다. 이로서 미국은 베트남전에 투입했던 천문학적 전비를 1300억 달러로 마감하고, 사망한  미군을 44천명, 중경상자를 303천명으로 마감하는 대 평화협상을 체결하였던 것이다.


파리평화협상 성사의 주인공은 북베트남의 레둑토 수상(우)과 닉슨의 국가안보 자문 헨리 키신저(좌)였다. 이 두사람은 협상의 공로를 인정받아 1973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레둑토는 아직 베트남에 평화가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상을 거부했고 키신저는 수상을 허락했지만 시상식에 나타나지 않았다. 1975년 북베트남이 승리하여 공산 통일된 이후 노벨평화상을 반납하고자 했으나 거부당했다. 이 사건으로 노벨위원회 위원 2명이 위원직을 사임했다.



이토록 대단하고 완벽했던 미국과  북베트남의 평화협상, 회담 당사국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튼튼하게 보장된 장치였던 이 평화협상은 그로부터 정확히 2년후에 북부 월맹 정권에 의해 완벽히 깨어지고 1975년 2월 월맹군의 구정 공세 50여일만에 자유 월남은 함락되어 지구상에서 그 존재가 사라지고 말았다.


남북으로 갈린 베트남. 북쪽은 사회주의 월맹. 남쪽은 자본주의 월남. 월맹은 미군이 철수하기를 바랬고, 민족화해를 부르짖었다. 외세가 다 물러가면 우리 민족끼리 못할 일이 무엇이냐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평화를 약속했지만 이를 이행하지 않았다. 평화조약은 표면이었고 이면에선 월남 침공 전략을 연구하고 있었다. 월맹의 치밀한 전략대로 자유 월남을 침공하여 1975년 4월 30일 월남은 멸망하고 영원히 역사속으로 사라져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남부 월남을 적화 통일한 후 월맹이 즉각적으로 시작한 일은 피의 숙청이었다. 숙청 대상 1호는, 아이러니하게도 월남에서 맹렬하게 활동한 반정부주의자, 친 월맹주의자들과, 반월남 좌파의 거두 5만명 이상을 학살하였는데, 그 이유는 월남에서 반정부 활동을 한 것 보면 우리 정부에게도 그럴 것이다는 것과 어찌됐든 자본주의에 살면서 그 반동의 물이 들었으니 미래를 위해서는 제거해야 된다는 논리였다.



이 좌파들을 모두 제거한 후, 월맹 점령군은 월남을 추종하던 국민 900만명을 추려내어 무참히 학살하는 피의 대숙청을 시작하였다. 군출신, 공무원출신, 대학교수, 기업체 간부, 부자등을 인민의 적이라는 이름으로 처형하였다. 간신히 죽음을 피해 자유를 찾아 망망대해 조각배 어선에 몸을 싣고 적화통일 된 베트남을 탈출한 이른바 보트피플만도 100만명 이상이었다.



월남은 미군이 준 막대한 군사무기를 보유하고, 군사력, 경제력, 인구 규모 등 모든면에 월맹을 압도하였으나 월남전체 인구의 0.2%에 해당하는 수많은 간첩들의 활동에 의해 내부부터 붕괴되고 있었다. 그중에는 대학교수, 법조인, 국회의원, 방송언론인, 종교인, 교육자 등으로 위장하여 활동하고 심지어 부통령까지도 월맹측의 간첩이었던 것으로 사후에 밝혀 졌으니 그 핵심 좌파 10만명의 선동과 국론 분열책에 의해 남부 월남은 이미 전쟁 시작하기도 전에 패망하였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좌파 세력들은 월남이 패망하고 월맹치하 적화통일이 되면 모두가 차별없이 살기좋은 이상사회가 올것으로 기대했을 것이다. 새로운 공산 정권하에서 내가 이정도 반정부 투쟁 공적이 있으니 높은자리 하나는 당연히 차지하리라 확신하고 있었을것이다. 그들을 하나의 적화 도구로 사용하고 혁명 사업이 완수되고 나면 모조리 숙청해버리는 것이 공산주의의 무자비한 전략인줄을 그들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목숨 걸고 반정부 좌파 운동하다가 스스로의 환상에 속아 무자비하게 학살 당하는 순간 그들은 가슴을 찢으며 후회해도 이미 돌이킬수 없는 개죽음이었다. 어찌 눈을 편히 감았을 것인가.                (3편 계속)          

<운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