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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통령의 공적과 과오에 대한 고찰 - 노무현 대통령

Billy Soh 雲 響 2012. 10. 16. 13:17

대통령 재임 시절의 노무현(2004년)

대통령 재임 시절의 노무현(2004)

 


Offenbach - Les larmes du Jacqueline (7:16)

출처 http://cafe.daum.net/jdhsin/HsWv/23


 

노무현은 김해 진영 봉하마을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중학교를 제대로 졸업 하기도 힘들었다. 그의 중학교 학적부에는 '두뇌가 명석하고 판단력이 뛰어나나 비타협적인 성격' 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러한 성격은 그의 생애를 통하여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누구 보다도 가난의 고통을 뼈저리게 느끼고 자랐으며 근근히 부산상고를 졸업한후 막일 노동을 하면서 독학으로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그는 판사생활 1년 정도후에 변호사로 전직하였고 높은 수임료 덕분에 요트 취미등 윤택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후 인권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김영삼과의 인연으로 정계에 입문해 부산에서 국회의원이 되었으나 김영삼의 3당 합당에 반대하며 김영삼과 결별하였다.

 

이후 김대중이 총재로 있던 새정치 국민회의에 입당하여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에 기여하였고 2002년 대선에서 노풍으로 여당 후보가되어 이회창을 물리치고 제 1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2003년 새정치 국민회의의 후신인 새천년 민주당을 탈당하고 탈당 세력들과 함께 열린 우리당을 창당하였다.  그는 자신의 우수한 개인적 능력으로 자수성가하여 대통령까지 되었으나 중앙의 정치 무대에서는 아무런 전통과 기반도 없는 가난한 변방 출신이며 고졸 학력이라는 운명적 자의식에서는 벗어나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그는 대통령 재임중에 일국의 수장으로서 "강남, 재벌, 서울대출신.. 이것들은 내가 꼭 없애 버릴거다." 라며 특정지역이나 계층을 증오하는 한풀이적 발언을 서슴치 않았다. 그러나 서민의 입장에서 지역주의나 권위주의를 타파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는 평가도 있다.

 

그는 권위를 앞세워 권세를 누렸던 기득권층을 무너 뜨리려는 노력을 하였다. 다만 국가의 위기상황에서도 국민에게 태산처럼 흔들림 없는 권위와 신뢰를 보여 주어야 했던 국가 원수라는 막중한 직책자로서 좌충우돌 기존의 세력과 충돌하며 "대통령 못해 먹겠네" 등의 공개적 발언을 하였다. 급기야는 역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 소추까지 받았던 것은 최고 지도자로서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 권위와 위상까지 무너뜨렸던 것으로 어떤 역사적 평가를 받을지는 좀더 시간이 흘러봐야할것으로 생각한다.

 

노무현은 퇴임 이후에는 서민답게 임대주택에서 살겠다는 임기 중 약속과 달리 봉하마을로 귀향했다. 그러나 2009년 검찰의 박연차 정관계 로비사건 수사가 전방위로 확대되며 측근 세력들이 수사 대상에 오르고 가족들도 박연차의 금전을 받은 것으로 부인 권양숙여시가 수사를 받게되고 노무현도 '포괄적 뇌물죄' 혐의로 검찰 소환 조사를 받기에 이르렀다. 검찰로부터 "부인이 돈을 받았는데 대통령도 알았던것 아닙니까" 라고 추궁 수사를 받고 돌아온 노무현은 그 수모와 충격을 이기지 못해 2009년 5월 23일 아침 자택 뒷산 부엉이 바위에서 몸을 던져 자살 하였다.

 

노무현 대통령의 공적;

1. 인터넷 선거혁명을 통해 그 자신이 집권에 성공한후 '온라인 국민 참여 포털'을 구축함.

2. 역대 대통령의 관행이었던 국정원장 독대 보고를 없애고 강금실 법무, 김영란 대법관등 뿌리깊은 사법부의 기수

   파괴를 통해 권위주의 타파를 위해 노력함.

3. 선거 공영제를 확대해 돈들지 않는 선거제 확립을 위해 노력함.

4. 대한 민국의 전시 작전 통제권 회수를 추진하여 자주국가의 주권 신장.

5. 김대중의 햇볕정책에 이어 대북 포용정책을 계승하여 평화 번영에 공헌.

 

노무현 대통령의 과오;

1. 새천년 민주당을 탈당해 열린 우리당을 창당했으나 기존 세력과의 타협과 리더십이 부족해 탄핵사태를 맞음.

2. 현충일에 일본에 가서 '김구 주석은 실패한 정치인'이라하고 독도를 타케시마라고 발언해 국민상식에 어긋난

   외교를 함.

3. 지도자의 도덕성을 주장하는 한편에서 황우석 사기 사건에 책임이 있는 박기영 정보과학기술 보좌관을 큰 문제

   아니라고 두둔하며 재기용.

4. 수시로 참여 정부의 높은 도덕성을 주장하였지만 ("노무현이 대통령 되면 이제 더이상 대통령의 의혹 사건

   을 가지고 국회에서 밤낮 조사하자, 이렇게 싸우는 일은 없어질 것입니다. 부정부패 없어야 합니다. 정치 지도

   자들의 부정부패 문제가 국회 일의 절반을 넘습니다." 등) 형 노건평, 최측근 안희정 최도술 이광재 등의 비리를 막

   지 못함.

5. NLL은 안보상의 실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어릴적 땅따먹기처럼 정서적인 문제 라고 발언. 국토 수호의 최고 책임

   자로서 확신에 의구심이 제기됨. 

 

P.S

노무현은 2003년 대통령이 되면서 자신이 창당한 열린 우리당의 당내 동료들로부터 임기의 마지막해인 2007년에 가혹한 공격과 배신을 당하고 말았다. 당내 거의 모든 지도자들과 동지들이 그를 버리고 떠난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힘이 아직 미미했던 노무현 초기, 처음 지지를 선언했던 천정배가 힘빠진 노무현에게 "열린우리당은 희망이 없다"며 이번에도 가장 먼저 손가락질을 하며 떠났다.

 

다음, 김한길은 자신이 먹고 살던 당을 "열린 우리당은 이제 발버등 쳐도 소용없다" 며 23명의 떼를 몰고 노무현을 배신했다. 당시 열우당 의장이었던 정세균은 "열우당은 리더십이 없었으며 국민과 소통도 실패했다"며  노무현의 실패를 기정사실화했다. 노무현과 함께 창당을 주도했고 가장 중용을 받았던 정동영은 "열우당은 국민의 삶을 개선시키지 못한 업보다" 하고, 국무총리까지 지낸 한명숙은 "정책추진에서 열우당은 합의가 미진하고 소통도 부족했다" 했으며 역시 국무총리를 지낸 이해찬은 "비통한 심정, 죄송한 마음' 운운 하며 당 해체에 참여했다.

 

노무현은 그가 아끼던 당 최고 지도자들에 의해 이렇게 등뒤에서 칼을 맞고 당은 공중폭발 분해 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임기말까지 배신감에 시달리며 격정에 사로잡힌 불안한 정서적 생활이었다. 그후 노무현은 부엉이 바위에서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지만 5년밖에 흐르지 않은 지금, 당시의 배신자들은 여전히 당권을 잡고 잘먹고 잘살고 있다. 이해찬은 옷을 갈아입은 민주통합당의 대표, 김한길은 서열 2위 최고위원, 정동영은 문재인 후보의 남북경제 연합위원회 위원장 등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망각의 천재라고 국제사회에서 때로 조롱을 받는다. 자신의 이익을 따라 책임은 철저히 회피하고 배신도 정당화하던 무리들이 이제 또 모여서 지난날 일은 없었던것 처럼 씨익 음험한 미소를 보이며 지금 잘해 볼테니까 밀어달라한다. 그러면 사오백만의 건망증 환자들이 또 그들을 밀어줄 것이다. 어제까지 그들이 한것은 깡그리 다 잊어버렸으니까.                           <운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