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문 해수욕장 / 출처 http://v.daum.net/link/30926897
해변으로 가요
키보이스
별이 쏟아지는 해변으로 가요
(해변으로 가요)
젊음이 넘치는 해변으로 가요
(해변으로 가요)
달콤한 사랑을 속삭여줘요
연인들의 해변으로 가요
(해변으로 가요)
사랑한다는말은 안해도
(말은 안해도)
나는 나는 행복에 묻힐꺼에요
붙타는 그입술 처음으로 느꼈네
사랑에 발자국 끝없이 남기며
별이 쏟아지는 해변으로가요
(해변으로가요)
젊음이 넘치는 해변으로가요
(해변으로가요)
달콤한 사랑을 속삭여 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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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보이스의 '해변으로 가요'는 우리 젊은 날의 노래이다. 여름이 오면 언제나 우리들의 설레는 마음을 바닷가로 인도해 주는 노래이다. 바다는 언제나 동경의 대상이었고 파도 소리는 가슴을 울리는 그리움의 소리였다. 하지만 가고 싶다한들 어디 그리 쉽사리 바다에 갈 수 있는 여유가 있을리 없었다. 그 동경의 바다를 드디어 마음껏 누릴 수 있었던 때가 22살의 여름이었다. 7월 초에 1학기말 시험이 끝나면 바로 방학에 들어간다. 야호 모든 스트레스를 날려 버리고 불타는 젊음의 여름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제주의 중문리 출신인 병훈이 형네 동네에 가기로 약속되어 있었으니 가슴은 이미 터질듯 환호하고 있었다. 하지만 변변한 준비는 하지도 못했다. 배낭엔 갈아 입을 옷 몇가지, 귤밭에서 일할 작업복, 제주 일주 할 때 필요한 코펠 과 버너, 숙박을 해결할 텐트와 담요 등 보름 동안의 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물건 정도였다.
저녁 9시에 친구와 함께 용산역에서 출발하는 목포행 완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역이란 역은 다 쉬어가며 느릿 느릿 달리는 호남선 열차는 다음날 아침이 되어도 목포에 닿지 않는다. 도착한 것은 이튿날 낮12시가 지나서였다. 지친몸이었지만 서둘러 허기진 점심을 해결하고 여객선 부두로 달려갔다. 곧 제주로 떠나는 가야호가 출발하는 시간이 가까워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겨우 허겁지겁 배에 올라 제일 싼 자리인 삼등실 바닥에 자리를 잡았다. 배멀미를 피하려고 누워서 잠을 청하였다. 파도에 심하게 흔들리는 뱃속에서 모두들 배멀미에 시달려 뒹굴곤 했다. 얼마후 잠에서 깨어보니 부두에 배가 닿고 있었다. 제주에 왔나보다 했지만 그곳은 제주가 아니라 추자도였다. 이렇게 6시간 정도에 겨우 다다른 곳이 제주항이었다. 이미 날은 어두워지고 엄청난 비가 쏟아지는데 중문까지 갈 수도 없을것 같고 여관에 갈 돈도 없었다.
무작정 찾아간 곳이 제주 농촌 지도소였다. 생쥐처럼 비에 젖어 찾아 들어온 서울 학생들이 측은 했는지 숙직실에서 자도록 자리를 챙겨주고 저녁까지 대접을 받았으니 그런 염치없는 일이 어디 있을까. 옷을 말리고 실컷 자고 아침에 일어나니 좀 살 수 있을것 같았다. 만 하루 반을 시달리며 제주까지 온것이다. 그런데 숙직 아저씨께서는 아침까지 사주셨으니 참 뻔뻔하기도 유분수 였다. 제주시 로타리의 식당 창만정 . 그 아침의 해장국처럼 맛있는 음식은 다시 먹어보기 어려우리라.
차비를 깎아서 버스를 얻어타고 중문에 내리니 점심때가 다 되었다. 이병훈 형네는 그래도 좀 사는 집안이라 서울까지 유학을 왔을 것이다. 물어 물어 찾아 들어가니 병훈이 형이 엄청 반갑게 맞아준다. 야 니들 여기까지 오느라고 고생 많았구나 하고 맞아주니 쌓인 피로도 다 풀리는듯하였다. 양푼에 가득 담아 내온 보리쌀 삶은 밥과 간장에 조린 감자 한가지가 점심이었다. 하지만 그런 꿀맛같은 점심은 또 없을 것이다.
그곳에서 일하며 일주일을 지냈다. 일이라고 해봐야 5년생 감귤나무에 열린 감귤은 따버리는 것이었다. 그래야 귤나무가 튼튼하게 자라기 때문이다. 가끔은 논에 나가 소가 끄는 쟁기질도 도왔다. 논의 폭이 2미터 정도 밖에 안되는 계단식 논이라서 쟁기를 끄는 소가 혼자서 방향을 돌기가 어려웠다. 그러니 나는 앞에서 소 쿠뚜레를 잡고 제자리에서 소가 반대 방향으로 돌도록 돕는 일을 하였다. 그다지 일답게 힘이 드는 일도 아니었지만 또 그렇게 돌려 주지 않으면 쟁기질을 할 수가 없었다. 그곳이 지금 중문의 롯데 호텔과 신라 호텔이 서있는 자리이다. 그당시에는 중문에 일찍 지었던 하이야트 호텔도 아직 서있기 전 시절이다.
그렇게 1주일 정도를 즐겁게 일하며 같이 보낸뒤 제주 일주 여행을 하려고 친구와 짐을 꾸려 떠났다. 짐은 주로 식량과 감자등 부식거리였다. 서귀포를 지나 남원 성산 방향으로 걷다가 트럭이 오면 손을 들어 얻어타고 버스가 오면 올라타 차비가 좀 없으니 태워 달라고 무작정 부탁했다. 어떤차는 잠시 태워주고 어떤 차는 아주 조금만 받았다. 그때만 해도 제주 인심은 그렇게 좋았다. 그러다가 날이 저물면 바닷가나 나무밑 등에 텐트를 치고 친구와 잤다.
아침되면 일어나 코펠에 밥이나 죽을 끓여 먹고 또 배낭을 싸서 떠나고.. 아무런 계획같은건 없었다. 어떤땐 끼니 때가 되어 어떤 시골 동네를 걸어가며 생선을 씻는 동네 아주머니 곁에서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면 아주머니가 이거 한마리 할래여 하고 묻기도 했다. 그럼 우리는 아유 너무 고맙지만 염치가 없어서요 하고 못이긴듯 받아서 찌개를 끓이곤 했다. 그렇게 편하고 아무런 걱정도 없이 댓짜고짜 떠나는 여행은 그전에도 그후에도 해본적이 없다. 돈 주고도 못살 젊음의 특권과 낭만이 아니었을까. 제주도 구석 구석을 돌아 열흘만에 다시 중문 해수욕장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중문 해수욕장은 파도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그러기에 바람이 조금 강해지면 바다에는 들어 갈 수가 없다. 또한 조금만 들어가면 급격히 수심이 깊어지므로 위험하기도 하다. 그러나 파도 타기의 줄거움은 중문만한 곳이 없을 것이다. 비오는 날에도 바다 속에 들어가 밀려오는 파도에 몸을 맡겨 출렁이는 것도 그때 이후에는 해보지 못했다. 얼마나 아름다운 젊음의 계절이었던가.
그렇게 세월은 흐르고.. 그후, 1990년 6월 1일. 다시 그곳 하이얏트 호텔을 찾았다. 200명 정도의 일본 로슈 관리자 미팅이 열리고 있었다. 그 회의에 같이 참여하여 전략과 경험을 같이 나누고 배우기위한 명분으로 참여 하였다, 그러나 나로서는 인생의 고비가 될 면접을 하기 위한 목적이 더 중요 하였다. 하이얏트의 방에까지 중문의 밤 파도소리가 밀려오고 있었다. 내일의 면접을 위한 그 긴장감속에서도 들려오던 그날밤의 그 파도 소리, 그것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고 귓전에 울리는 설레임의 소리이다.
그해 그렇게 그곳에서 일본 로슈의 토리이 본부장님 면접에 통과하고 흔쾌히 허가를 득하게 되어 모든 지원을 다 받아 누리며 일본에 진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국에 비해 비교가 되지 않는 높은 급여와 집은 물론 전기세 수도세 청소료
교통비등 모든 생활비까지도 전적인 지원을 해주시기로 그때의 면접에서 결정해 주셨다. 폭발하듯 피어 오르는 새하얀 여름의 뭉게 구름. 그렇게 한없이 꽃피던 인생의 성장과 전환점을 거침없이 맞아나가던 계절들이었다. 두려움 없이 빛나는 야망의 성채와 무지개빛 꿈의 계절들이었다. <운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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