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illy의 국내여행 Domestic Tour

판문점으로 가는길 13227

Billy Soh 雲 響 2013. 3. 3. 23:05

2013년 2월 27일 아침. 오두산 통일 전망대는 짙은 안개에 휩싸여 앞을 보기 어려웠다. 이곳은 한강과 임진강의 합류지점으로 안개가 심한 지역이다. 모든것이 얼어붙는 아주 추운 겨울이나 아주 더운 여름은 안개가 많지 않으나 어름이 녹는 이른 봄부터는 햇빛에 따라 수면의 증기가 발생하므로 안개가 극심하게 되는 것이다.

 

전방의 북한지역에 대한 중국어 영어 일본어 우리말의 영상 자료가 소개된다.

 

우리말 해설

 

이곳 오두산 지역은 삼국시대 부터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전략적 요충이다. 고구려와 백제가 사력을 다해 싸웠던 관미성이 바로 이곳이다. 삼국 초기에는 한강변에 건국하엿던 백제가 이곳을 장악 하였으나 고구려의 남진 정책으로 고구려에 넘어갔다. 고구려가 쌓았던 석성터갸 지금 남아있다. 그후 신라 진흥왕 대에 이르러서는 한강변을 장악한 신라가 점령하여 중국과의 직접 교역을 가능케 하였다.

 

분단된 한민족의 한이 서린 판문점. 조선 시대에는 널문이라하여 이름없는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던 곳이다. 6.25 한국전쟁후 이곳에서 휴전회담이 진행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세계의 이목이 집중 되는 곳이 되었다. 정면에 보이는 흰색 건물은 북한측 건물인 판문각이다. 군사 분계선 상에는 5동의 건물이 있는데 2동의 흰색 건물은 북한측 건물이며 3동의 파란색 건물은 한국측 건물이다.

 

우리 측에서 보아 맨 오른쪽의 흰색 건물은 남북간의 회담이 있을시 북한의 경비병들이 대기하는 장소이며 2번째의 파란색 건물은 우리측 건물로서 영관급 회담이 열리는 장소이다. 세번째 파란건물이 맨 중앙으로서 남북한의 장성급 대표회담이 열리는 장소이다. 네번째는 우리측 준비 장소, 다섯번째의 흰건물은 북한측의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대표들이 사용하였던 건물이나 북한 측이 이들 대표들을 철수 시킨후에는 현재 사용되지 않고 있다.

 

맨 중앙의 남북한 대표 회담장 안에는 긴 탁자가 놓여있고 탁자 중앙에 마이크의 선이 놓여있다. 이 마이크 선의 저쪽은 북한이며 이쪽은 우리 한국이다. 그러나 이 회담장 안에서는 자유로이 이동이 가능하도록 규정 되어있다. 그러므로 마이크선 저쪽에서도 서서 사진을 찍었으니 사실은 북한측에 서서  찍게 된것이다. 마이크의 전선은 건물 외부의 군사분계선과 일치 되어있다.

 

1974년 부터 1976년까지 나는 이지역에서 대한민국의 육군 중위로서 근무하였다. 나의 청춘의 날들은 가고 사람은 변하였지만 살벌한 이곳의 분위기만은 아무것도 변한것이 없다. 나와 교환 소대장으로 근무하였던 미군의 동료 Collier 중위는 어떻게 변하여 어디에서 살고 있을까. 겨울 막사안의 페치카앞에서 나누던 그와의 얘기가 어제 같기만 하다.

 

한편 내가 전역한 1976년 6월 30일 직후 8월 18일에 이곳 판문점에서 발생했던 사건이 바로 8.18 도끼만행 사건이다. 당시 판문점 공동 경비 구역내의 미군측 제4초소는 북한측 세개 초소에 둘러쌓여 안전이 위협받는 상황이었다. 저 앞에 보이는 제 3초소에서는 언제나 낮은 곳에 위치한 제4 초소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두 초소의 사이에 커다란 미류나무가 있어서 여름이면 무성한 그 이파리로 인해 시계가 가리므로 사건 당일 아침 10시경 미류나무 가치를 치기위한 작업이 진행되었다,

 

물론 이 작업은 북한측에 통보되었으며 매년 진행해 오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날 1976년 8월 18일에는 가지치기 작업이 사작 되어 10시 30분쯤 되었을때 갑자기 북한측의 박철 중위와 경비병 30명 정도가 몰려나와 지휘하던 미군 장교 보니파스 대위와 마크렛 배럿 중위등 두명을 무참히 도끼로 살해 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전쟁발발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갔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후 그 미류나무는 아예 우리측  박희도 준장의 특전사 1여단에 의해 제거 작전이 수행 되었으며 공동 경비구역 내 군사분계선 남측에 위치해 있던 북한측 3개 초소도 모두 파괴하는데 성공하였다. 작전중에는 미군의 AH-1 공격용 헬기 7대와 다목적 헬기 20대가 엄호하고 있었으나 미군과의 합동 작전은 미류나무를 절단하는 것 까지 였었다. 초소를 파괴한것은 여단장 박희도 준장의 단독 판단이었다는것을 후에 본인이 술회 증언 하였다.

 

현재 개성 공단에서 생산하고 있는 화장품

 

의류도 생산하고 있다.

 

 

개성 공단 개발 과정

 

개성 공단 지도

 

통일 염원 서예 경진대회 입선작

 

정부의 역대 고위 공직자들의 통일 염원 휘호이나 이 간단한 휘호속에 쓰신분의 사고 방식과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고 생각하였다. 우리 나라가 원하는 것은 통일이 아니다. 우리는 자유 민주주의의 통일을 원하는 것이다. 권오기 전 부총리는 "바탕위' 라는 표현을 사용 함으로서 정확히 우리가 원하는 통일의 형태와 염원을 담고있다.

 

이수성 전 국무총리의 염원은 약간 애매모호하다. 평화와 통일이란 북한에서도 부르짖는 것이다.

 

정원식  전 국무 총리의 사고는 어떤 사고와 사상인지 전혀 알수 없는 표현이다. 북괴 당국자들도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등 3대를 물려 통일의 과업을 수행해야 한다고 부르짖고 있다. 그럼  정원식 전 총리도 북괴와 똑같은 주장을 하는 것인가. 남북 양측이 그토록 통일을 부르짖는데도 전쟁을 격어도 아직도 통일을 못하고 있는 것은 그럼 무슨 이유라는 말인가.

 

그 해답은 남북한이 주장하는 통일의 궁극적 목적은 같으나 방법이 반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유 민주주의 정치 제도와 자본주의 경제 체제하에서의 통일을 원하나 북괴측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통일을 원하는 반대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통일이라는 표현을 쓴다고 해서 무조건 같은게 아니라 정 반대의 뜻인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수백만의 목숨을 희생하고 전쟁을 해도 통일이 안되는 것이다. 그것을 정확히 지적하지않고 그냥 단순히 통일 염원이라고만 표현하는 것은 참 국무총리로서는 쓸 수 없는 표현을 쓴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소위, 북괴가 말하는 '반도의 남녁 바다에 다다를때 까지' 라는 표현은 북측 인민의 최후 한사람이 남는다 하더라도 최후까지 원수놈들(한국과 미국을 위시한 자유 우방국)을 박살내고 한국을 집어삼켜 공산주의 적화 통일을 이룩하자는 것이다. '우리민족끼리" 라고 상투적으로 쓰는 용어는 어서 미국등 우방국을 쫏아내는데 남한 국민들이 앞장서서 투쟁하여 적화 통일을 앞당기자는 의미이다. 이 기회에 통일이라는 똑같은 용어속에 포함된 남북한의 정반대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사용하였으면 좋겠다. 정원식 전 총리처럼 댓짜고짜 남북 통일 염원이라고 북괴가 쓰는 것과 같은 말을 쓰면 안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자유민주 통일염원'이다.

 

참고로.. 만일 적화 통일이 되었을 경우 어떤 사태가 일어날까하는 것을 정확히 짚어주고 싶다. 우선 총살을 당해야 하는 대상자 명단이다. 고위직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우리 정부의 녹을 먹고 일했던 공무원 출신, 군인과 군인 출신, 교사들, 회사의 간부들과 관리직들, 의사, 변호사, 각종 사회단체의 지도자와 임원, 탤런트, 문학가 시인등 등단한 예술가, 자영업자 사업가, 과학자, 고위 기술자로 한국 발전에 기여한자.. 등등 소위 저들이 말하는 '반동분자'들은 거의가 일단은 총살 대상이다. 나는 설마 괜찬겠지 하고 생각하는 것은 무지의 망상일 뿐이다. 국민의 대부분은 소유를 몰수 당하고 총살 당한다. 다행히 총살에서 제외된 자들은 전국의 초대형 정치범 수용소에 수용되어 끔찍한 고문과 강제노역및 극심한 굶주림등으로 서서히 죽어가게 하는것이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북괴의 방법이다.

 

이것은 과도한 개인적 상상이나 예측이 아니라 북괴 정권이 수립된후 또는 6.25 한국 전쟁후에 저들이 납치하여 자행하였던 살아있는 역사적 사실인 것이다. 요컨대 저들이 말하듯 '반동에 물이든 자들'은 살려 둘 수 없고 살려둬도 무방한것은 무산 계급, 즉, 집도 직장도 벌이도 없이 떠돌았던 최하층 인민, 최저 임금 수준의 노동자와 일용직들 정도인 것이다. 우리는 무작정 통일의 환상에 젖어 있어서는 안된다. 전 국민이 어떤 통일? 즉 자유민주 통일 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흔들림 없이 갖고 있어야만 우리 미래사의 주인될 자격이 있을 것이다.

 

2010년 말 북괴의 포격으로 불타고 있는 연평도의 민가

 

 

역대 대통령들의 사상과 사고 체계가 잘 표현 되어있다.

 

 

오두산 통일 전망대와 북측의 거리는 불과 2100m 이다.

 

 

관미성, 즉 오두산성의 역사

 

 

 

 

 

 

 

 

북측의 의복들

 

 

북측의 화폐들

 

 

 

 

담배 술 속옷 화장품 우표들

 

 

 

 

 

판문점 회담장 앞에서. 뒤쪽의 흰건물은 북측 건물인 판문각이다.

 

 

 

 

남북 회담장 안에서 경비 헌병들과

 

판문점 공동 경비구역 내에서는 북측 경비병들을 쳐다보거나 말이나 손짓을 하거나 비웃는 행위등은 엄금이다. 실탄을 언제나 장전하고 있으므로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우리측 제4초소앞. 8.18 도끼만행 사건이 유발 되었던 미류나무가 서있던 자리의 표지석. 둥근 원은 미류나무 밑둥의 크기이다.

 

제4초소에서 올려다본 제3초소.

 

공동 경비 구역내의 덤풀 숲

 

제3초소

 

제3초소 옆의 돌아오지 않는 다리(The Never Return Bridge). 이 다리를 통하여 6.25 한국 전쟁후 전쟁 포로 교환이 이루어 졌다. 국군측에 억류 되었다가 이북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하여 이 다리를 건너간 사람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였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다리 이름이다.

 

이곳 JSA 안보 견학관에서 8.18 도끼만행사건의 실태나 최근의 북괴 도발에 대한 영상 자료를 감상하였다.

 

 

1953년 7월 27일에 조인된 휴전 협정 조인서. 북괴측 대표 남일, 중공측 대표 팽덕회(펭 더 후아이), 미국측 대표 마크 클라크 장군의 서명이 보인다. 우리 한국군은 대표로서 휴전협정에 참여하지 못한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협정이 조인된후의 미군측의 크라크 장군과 휴전 협정 대표단. 한국군 제1사단장이었던 당시의 백선엽 소장이 유일한 업져버로서 회담에 참여하였을 뿐이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정예 1사단의 쌍용부대 출신으로서 남다른 자부심을 갖고있다. 쌍용부대는 9.28 서울 수복후 북진 공격시 북괴 수도 평양을 최초 탈환하여 입성하였던 용맹무쌍 국군의 최선봉 부대이다.)

 

북괴측 대표단. 중앙이 남일 대표이다.

 

 

 

 

 

 

 

 

 

8.18 도끼만행 사건의 모형

 

도끼 만행 사건후 우리측 특수부대가 미류나무 절단 작전을 수행하고 있다.

 

 

 

JSA 내의 한국군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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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과 휴전선은 어떻게 다른가? 
지난 27일 판문점을 견학하였던 30여명 정도의 우리 그룹중에 30대 이하의 젊은 분들은 의외로 남북 분단 국가로서의 우리 현대사에 대한 이해가 너무나 부족하였다. 남북한이 왜 분단 되었는지, 38선과 휴전선이 왜 생기고 어떻게 다른지도 잘 모르고 있는 것을 보았기에 차제에 분단 관련 현대사에 대하여 명확히 정리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것 같다.

 

남북한 분단과 통한의 38선

38선이란 미·소 양국이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나누었던 분할 점령 군사 분계선이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우리조국이 해방된 직후 38선을 경계로 북쪽은 소련이 진주하여 일본군의 항복과 무장해제를 담당하고 남쪽은 미군이 일본군의 항복을 받고 무장 해제를 수행하기로 하였던 미소간의 정치적 군사적 분계선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이 임박하였음을 미리 내다본 미국·영국·소련 등 3개 연합국측 수뇌들은 1945년 2월 4일부터 11일까지 얄타에서 회합하고 전후처리에 관한 협정을 맺었는데, 이 회담에서 소련의 대일참전이 약속되었다. 그리고 이 협정에서는 한국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이 언급되었다.

첫째, 적절한 시기에 한국은 자주독립국이 될 것을 협약한 카이로선언을 재확인하고, 둘째, 어느 단일국가에 의한 한국의 군사점령은 심한 정치적 반응을 야기할 우려가 있으므로 한국을 구분된 지역이 아니라 단일국가 체제로 취급하여 중앙집권제행정원칙에 입각한 군정청을 조직할 것 등의 내용이 논의되었다.

 

그러나 그후 연합군 참모장 공동회의에서 전후의 한반도는 미군과 소련군이 분담하여 점령하기로 약정되었다. 1945년 8월 10일 일본이 비로소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여 무조건 항복할 뜻을 밝히자, 미국 국방성은 한반도는 38도선을 기준으로 이남은 미군이, 이북은 소련군이 주한 일본군의 항복과 무장해제 문제를 담당할 것을 제의하여 미국 정부안으로 확정되었고 소련측과 합의되었다.

즉, 군사분계선으로서의 38선이 책정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문서상으로 나타난 것은 1945년 9월 2일의 연합국 최고사령부 지시 제1호이다. 여기서 북위 38도선 이북의 한국에 있는 일본군은 소비에트 극동군 최고사령관에게, 그리고 38도선 이남의 일본군은 미합중국 육군부대 총사령관에게 항복할 것이 지시되었다.

단순히 일시적인 군사작전상의 업무분담을 위한 분계선인 38선이, 세계적화를 노리는 소련 스탈린의 정치적 야심으로 남북 분단의 정치적 경계선으로 바뀜으로써 우리 민족에게는 더없는 비극의 씨앗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수천 년간 단일 생활권을 형성하였던 우리 민족은 일시에 두 개의 이질적인 생활영역으로 분할되어, 부모 형제간의 생이별은 물론 그 밖의 수많은 고통을 강요당해야 하였다.

휴전선

그러나 급기야 소련과 중공의 대대적인 군사 지원을 받은 북괴의 지도자 김일성은 5년동안 전쟁을 준비하여 1950년 6월 25일 미명 04:00를 기하여 38선 전역에 걸쳐서 대대적인 남침을 감행하였다. 서울이 3일만에 함락되고 부산을 제외한 한국의 전지역이 한달내에 공산치하에 들어갔다. 그 동족상잔의 민족적 참상과 비극은 그야말로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강물처럼 흘러가는 필설로 표현 할 수도 없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당시 UN의 신속한 결의에 따라 맥아더장군 지휘하의 UN군 16개국이 참전하고 인천 상륙 작전을 성공 시킴으으로써 전황을 역전시켜 압록강까지 진군하였다. 그러나 통일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중국군의 개입으로 다시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다가 마침내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3년간의 피미린내 나는 전쟁을 격고 1953년 7월 27일, 이 휴전협정 제2조에 따라 설정된 군사분계선(DML, Military Demarcation LIne)이 바로 휴전선이다. 휴전선은 서쪽으로 예성강과 한강 어귀의 교동도에서부터 개성 남방의 판문점을 지나 중부의 철원·금화를 거쳐 동해안 고성의 명호리까지 이르는 248km(155마일)의 길이로 한반도를 가로지르고 있다. 이는 전쟁이전의 38선에 비해 서해안의 옹진군이 북한으로, 그리고 중동부의 철원, 금화, 인제, 고성군의 일부가 한국으로 넘어온채 다시 국경아닌 국경선이 되어 국토를 분할하고 있다. 

 

또한 군사분계선(MDL)남북으로 각각 2Km 씩 전 휴전선 248Km 에 이어지는 4Km 폭의 지역이 비무장지대(DMZ, Demiliterized Zone)이다. 2Km의 북쪽 선이 북방 한계선이며 남쪽 선이 남방 한계선이다. 전쟁후 60년 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이곳 비무장지대에는 천혜의 자연 그대로가 회복되어 민가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수많은 동식물들이 자라고 있는 그린 에코 지역이 되었다.                            <운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