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립 장군 영정
원형 중원 고구려 비는 현재 보존을 위한 수리 중이고 다른 것은 그대로 조각한 모형물이다.
충주는 악성 우륵의 고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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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 실로 오랫만에 유서깊은 역사의 고장 충주를 다시 찾았다. 충주는 예로 부터 나라의 중앙에 위치하여 부침했던 역사상 세력들의 각축장이 되었던 곳이다. 우리 나라의 중심부에 위치한 중원의 충주 지방에는 내륙을 관통하는 남한강과 금강이 흐르고 특히 석회암지대가 널리 발달되어 동굴과 바위그늘이 많아 구석기시대의 생활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또한 강안대지에서 신석기 문화층도 발견되고 있다. 유적은 동량면 조동리, 지동리, 하천리, 산척면 명서리 등의 남한강 중류에서 발견되고 있다.
삼국시대 이전에 충주는 마한의 일부였으나, 후에 백제의 영역 확장으로 근초고왕 5년 A.D 350년경에는 백제에 편입 되어 낭자곡성으로 불리웠다. 그후, 북방 고구려의 남진 정책으로 장수왕 63년, A.D 475년에 고구려에 귀속되어 국원성이라 칭하여 남진의 전진 기지가 되었다. 6세기에 들어서며 강대해진 신라는 북진 정책을 실시하며 진흥왕 14년, A.D 553년 충주를 공략하여 신라에 편입시켰다.
진흥왕은 충주 지역을 점령하며 수운이 편리하고 전략적으로 중요하다는 이점때문에 국원소경을 설치하고 신라의 귀족자제와 6부 호민및 가야의 귀족 등을 이주시켜 실질적인 부도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게 하였다. 진흥왕 34년 A.D 573년에는 소경부 또는 사천성이라 칭하여 대번영을 이루었고, 경덕왕 원년 A.D 742년에 중원경 또는 태원이라 칭하여 신라의 중앙임을 표방하였다.
당시 충주는 삼국 시대의 중요한 요충으로서 백제, 고구려, 신라에 의해 빈번한 교체 및 점유가 있어 왔기 때문에 문화 양상이 삼국의 혼합적 특색을 나타내는 곳으로 중원 문화의 특색을 대변해 준다고 볼 수 있다. 중원 지방에 위치한 죽령,조령,이화령의 3대관문은 남북으로 왕래하는 군사적,교통로상의 요충으로 북방 문화 및 남방 문화의 전입이 이루어지는 중요한 지역이었던 것이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태조 왕건은 A.D 924년에 중원경을 충주로 개칭하였다. 고려 성종 14년 A.D 995년에는 현 앙성면 용대리에 중원도를 설치하고 절도사 및 창화군 300명을 배치하였으며, 고려 충렬왕 3년 A.D 1281년에는 충주성을 개축할 때 성벽에 연꽃을 조각하였으므로 예성이라 부르게 되었다.
조선 태조 원년 A.D 1392년에는 고려시대의 군명 예성을 그대로 존치하고 목사를 배치하였고, 세종 31년A.D 1449년에는 행정구역을 변경하여 충청도라 개칭하고 좌감사를 배치하였으며, 세조 3년 A.D 1457년에 충주진영이라 개칭하고 전국을 7도로 분할하여 충주영장으로 하여금 단양, 영춘, 제천, 청풍, 괴산, 연풍, 음성, 청안등 8군의 군정 사무를 장악토록 하였다. 명종 5년 A.D 1550에는 유신현으로 강등하였으나, 선조원년에 다시 충주진영으로 회복되었다.
선조 25년 임진왜란을 당하자 신립 장군은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8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왜적과 대적하였으나 애석하게도 패전하고, 이 후 542년동안 내우외환을 간접적으로 받으면서 충원현, 또는 충주목으로 불렀다. 고종32년 행정및 지방제도를 개정시 충주목사를 폐하고 관찰사를 배치하여 충청도의 중심을 이루더니, 도청 소재지로 된지 14년만에 교통의 불편을 이유로 순종 융희3년 5월에 도청을 청주로 이전하고, 충주는 군청 소재지로 군수를 배치하였다.
한일합병 이후 1913년 군면 폐합으로 충주는 충주군 읍내면에 속하다가 1917년 충주면으로 개칭하고, 1931년 5월에 지방제도의 개정에 의하여 충주읍으로 승격한 후,1945년 8월15일 해방을 맞게 된다. 해방된지 12년만인 1956년 7월8일 충주읍은 충주시로 승격되고, 살미면, 이류면, 주덕면, 신니면, 노은면, 앙성면, 가금면, 금가면, 동량면, 산척면, 엄정면, 소태면의 12개면은 충주군에서 중원군으로 개칭되었다.
1963년 1월1일 행정구역 변경 조치에 의하여 괴산군,상모면이 중원군에 편입되었고, 1973년 7월1일 행정구역 변경조치에 따라 이류면, 하문리는 괴산군으로, 신니면, 광월리의 일부는 음성군으로 편입되었다. 현재는 중원군이 충주시로 통합되었다.
위와 같이 삼한시대 이래 충주는 역사적으로 수많은 변화와 소속된 국가의 변천을 겪어 왔다. 마한으로 부터 백제, 고구려, 신라, 고려, 조선, 일제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 까지 언제 또다른 국가 세력의 소속이 될지 예측 하기 어려운 지역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나라의 중앙에 위치하여 한반도에서 발흥한 어떤 세력에게도 필히 확보 하지 않으면 안될 중요한 전략적 요충이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충주인의 독특한 기질 문화의 형성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예컨대 충주인들은 중용의 예를 중요시 하며 양극의 선택을 하지 않으려는 성향이 있어 보인다. 충주인들과 비지니스를 하려면 그 속 마음을 읽는데 신중하여야 한다. 그들이 'No' 라고 했을때, 또는 'Yes'라고 했을때 속 마음과는 다른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속마음을 열어 보이는것에 신중하다는 말이다. <운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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