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illy의 좋아하는 산문, 단편

창랑정기 (滄浪亭記)· -유진오-

Billy Soh 雲 響 2009. 2. 26. 19:25

 1

 

「해만 저물면 바닷물처럼 짭조름히 향수가 저려든다」고 시인 C군은 노래하였지만 사실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란 짭짤하고도 달콤하며 아름답고도 안타까우며 기쁘고도 서러우며 제 몸 속에 있는 것이로되 정체를 잡을 수 없고 그러면서도 혹 우리가 무엇에 낙심하거나 실패하거나 해서 몸과 마음이 고달픈 때면은 그야말로 바닷물 같이 오장육부 속으로 저려 들어와 지나간 기억을 분홍의 한 빛깔로 물칠해 버리고 소년 시절을 보내던 시골 집 소나무 우거진 동산이며 한 글방에서 공부하고 겨울이면 같이 닭서리 해다 먹던 수남이 복동.

  이들이 그리워서 앉도 서도 못하도록 우리의 몸을 달게 만드는 이상한 힘을 가진 감정이다. 향수란 그러나 반드시 사람의 심사를 산란케만 해 주는 것은 아니고 우리가 그렇게 할 마음의 여유만 갖는다 면은 우리의 거칠대로 거칠어진 정서의 거친 벌을 다시 곱게 빗질해 줄 수도 있는 것이며 또는 갈기갈기 흩어진 어지러운 생각을 외바닥 길로 인도해 주는 수도 있는 것이다. 가령 여기 젊어서 청운의 큰 뜻을 품고 만리 타향에 나갔던 사람이 있다 하자. 바람 비 거친 몇 십 년을 지낸 뒤 이마에 주름살이 깊어 가고 은 빛 흰 머리카락이 나날이 늘어갈 때 달 밝은 어느 밤 그가고향을 그리는 마음에 이리 딩굴 저리 딩굴하며 잠을 이루지 못한다면.

  언뜻 생각하면 향수란 놈은 사람의 마음을 재리재리하게 좀먹어 들어가는 우수의 사자인 것 같기도 하나 다시 생각하면 그가 젊어서 품었던 청운의 뜻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을 때 또는 처음 뜻대로 이루어졌다 해도 그 소위 청운의 큰 뜻이라는 것이 결국은 인생이란 것을 분홍 빛 베일을 통해서만 볼 줄 알던 젊었을 때의 일시의 헛된 꿈이요 사람의 마음과 몸을 영원히 안식시켜 줄 깊고도 높고 또 튼튼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의지할 바를 잃은 그의 심정을 부드러운 손길로 쓰다듬어 주어 위대한 안심의 길로 인도해 주는 거룩한 어머니의 손길이야말로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청운의 큰 뜻」을 이룬 사람에게나 못 이룬 사람에게나 향수란 다 같이 최후의 도착점이 아닐 것인가. 옛날 〈귀거래사〉의 시인은 「새는 날다 고달프면 돌아올 줄을 안다」고 읊었고 〈영원의 청춘〉을 누리던 〈괴테〉도 서른 한 살의 젊음으로써 이미 「모든 산봉우리에 휴식이 있느니라」고 노래했거니와 이것은 즉 그들이 남다른 직관과 감수력으로 이 향수의 구슬프고도 깊은 의미를 몸으로써 느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을 경개 아름다운 시골서 보낸 사람은 이런 의미에서 대단히 행복된 사람이다. 그는 몸이나 마음이 고달플 때마다 찾아 들어갈 따뜻한 어머니의 품속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회에서 나고 도회에서 자라고 몇 해에 한 번씩 또는 한 해에도 몇 번씩 이 골목에서 저 골목으로 이사를 돌아다니는 사람은 그리워하려도 그리워할 고향이 없으므로 대단히 불행한 사람이다. 그리워할 고향이 없으면 아무 것도 그리워하지 말고 항상 앞날만을 바라보고 나가면 그만 아니냐고 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나 사람의 마음이란 그렇게 꺾으면 부러질 듯이 일상 꼿꼿하게 뻗쳐만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니 긴장의 뒤에는 반드시 해이가 오는 것이요 해이는 새로운 큰 긴장의 전주곡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누구를 물론하고 다같이 향수를 가지고 있다.

  그리워할 고향이 있는 경우에는 물론 이어니와 그런 것이 없는 때에도 사람은 항상 무엇인가를 그리워하며 그 때문에 슬퍼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 고향 없는 향수의 대상은 혹은 소년 시대의 어느날 저녁 우연히 꿈에 본 산천일 수도 있는 것이요 또는 꿈에나마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생판 공상의 소녀이기도 할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종교가는 네가 말하는 향수란 결국 거룩하신 하느님의 품을 의미하는 것이니 사람은 지혜의 열매를 따먹고〈에덴〉의 동산을 쫓겨나을 때 벌써 숙명적으로 그런 향수를 지닌 것이라고 할는지도 모르나 종교가가 무엇이라고 하든 간에 사람이란 항상 무엇인가를 그리워 하면서만 그의 생존의 의미를 느끼는 것임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서울서 나서 서울서 자라난 나는 남들과 같이 가끔 가끔 가슴을 졸이며 그리워할 아름다운 고향을 갖고 있지 못하다. 내가 나서 세 살이 될 때까지 살았었다는 가회동 꼭대기 집은 어느 새에 흔적도 없이 없어지고 지금은 낯모르는 문화주택이 들어섰을 뿐이다. 그러나 나에게도 내 마음이 고달플 때 그 마음을 가져갈 고향의 기억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니 하나는 여섯 살 때부터 열네 살 되던 해까지 살던 계동집의 기억이 그것이요 하나는 이 곳에 기록하려는 창랑정의 기억이 그것이다.


2

 

  창랑정이란 대원군 집정시대에 선전관으로 이조판서 벼슬까지 지내던 나의 삼종 증조부 되는 서강대신 김종호가 세상이 뜻과 같지 않아 쇄국의 꿈이 부서지고 대원군도 세도를 잃게 되자 자기도 벼슬을 내놓고 서강-지금의 당인정 부근-강가에 있는 옛날 어떤 대관의 별장을 사 가지고 스스로 창랑정이라 이름 붙인 후 울울한 말년을 보내던 정자 이름이다. 내가 처음 창랑정을 갔던 것은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으나 일곱 살이나 잘 해야 여덟 살 먹었을 적이었으니까 이럭저럭 스물일여덟 해 전 일이다.

  이른 봄--봄이라도 냉이 순이 파릇파릇 내밀 무렵이었으니까 삼월 중순이나 하순께 쯤이었을까. 나는 아버지를 따라 그곳에 가서 며칠 동안을 지낸 것이었다. 그 며칠 동안에 보고 듣고 한 기억이 이상스레도 어린 머릿속에 깊이 새겨져서 거의 삼십 년이란 긴 세월이 흘러간 지금까지도 가끔 내 추억의 나라 속을 왕래하며 때로는 달디 단 일종의 향수가 되어 내 마음을 안타깝게 까지도 하는 것이다. 창랑정은 서강이라 해도 당인리 편으로 가까운 강가 솔 숲 우거진 조그만 봉우리가 강으로 향해 비스듬히 얕아지다가 별안간 깍아지른 듯이 낭떠러지가 된 바로 그 위에 있는 칠십 간이 넘는 큰 집 이었다. 서강 동네를 지나 강가에 나서서 서편을 바라보면 보통 때는 물 한 방울 없는 개울 건너 저편 언덕 위에 좌우로 줄행랑이 늘어서고 가운데 소슬 대문이 우뚝 솟은 큰집이 보인다.

『자 인제 다 왔다. 저기 저 집이 창랑정-서강 할아버지 댁이다.』

  왼손으로 타박거리는 내 바른편 손을 붙들고 아버지는 바른편 손으로 단장을 들어 개 건너 큰집을 가리키셨다. 저녁 해를 비스듬히 받은 그 큰집의 인상이 얼마나 이상스러웠던지 처음으로 아버지가 그 집을 서강 할아버지 댁이라고 가르쳐 주시던 그 순간의 광경이 바로 엊그제 일 같이 지금도 내 눈에 선하다. 가까이 가보니 창랑정은 멀리서 볼 때와는 달리 지은 지 몇 백 년이나 됐는지 행각 기둥이 이리저리 기울고 쓰러진 아주 퇴락한 옛집이었다. 화방도 군데군데 무너지고 어떤 데는 큰 소라도 드나듬직하게 구멍이 뚫려 있었다. 언덕을 올라가 대문간을 들어서니 시꺼먼 늙은 은행나무가 무서운 악몽같이 앞을 가로막는다. 이것은 뒤에 들은 이야기거니와 그 은행나무에는 귀신이 접했다 해서 동네 집에서 고사를 지내면 반드시 그 곳부터 갖다 지내고 동네서 무슨 불길한 일이 일어나도 그 나무에 동티가 난 것이라 하여 무서워들 하는 것이었다.

   은행나무를 지나면 또 급한 언덕이요 그 언덕 위에 사랑으로 들어가는 중대문이 있다. 중대문 안은 편편한 마당이요 좌우에 작은사랑이 있고 강으로 향한 정면 높은 축대 위에 서강대신이 거처하는 큰사랑이 있는 것이다. 마당 앞은 불과 두서너 자 밖에 안되는 얕은 담이요 돌을 딛고 올라서서 담 너머로 넘겨다보면 담 밖은 바로 낭떠러지여서 까맣게 내려다보이는 저 밑에 검푸른 강물이 출렁거리는 것이었다. 서강대신은 병석에 누워 계셨다. 서남으로 터진 마루에는 양명한 저녁 햇빛이 환하게 비치고 있었지만 문을 열고 큰사랑에 처음 들어섰을 때는 방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캄캄했다. 아버지는 아랫목 편으로 가서 누워 있는 대신에게 절을 하시고 난 뒤 나더러도 절을 하라 하신다. 시키는 대로 절을 하고 무릎을 꿇고 앉으니까,

『제 자식이올시다.』

  하고 나를 설명하신다.

『오 그 놈 잘 생겼구나.』

서강대신은 일부러 일어나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몇 살이냐?』 하고 묻는다.

『일곱 살이올시다. 』

『음 자식이나 똑똑히 낳야지-.』

  그제서야 내 눈에는 방안의 것이 똑똑히 보이기 시작하였다. 서강대신은 그때 나이 벌써 팔십이나 되고 거기다가 오래 병석에 누워 있을 때라 몹시 수척하기는 했으나 기름한 얼굴 , 흰 살결, 은 빛 같은 수염 모든 것이 과연 어린 내 마음에도 갖은 풍상을 다 겪은 귀인의 풍모 같이 보였다. 아버지와 서강대신이 무엇인지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에 나는 차례 차례로 방안을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그때까지 계동 우리집 간반 방 사랑 밖에 모르던 나에게는 진기하기 짝이 없었다. 마루로 향한 미닫이에는 갑창을 굳게 닫은 위로 또다시 짙은 자주 빛 방장이 드리워 있고 그 반대편에는 구름을 타고 물결 위에 노니는 신선을 그린 큰 병풍이 삼간 벽을 꽉 채우고 있었다. 방구석에 놓인 사방탁자와 대신의 머리맡에 놓인 한 쌍 화류문갑 위에는 커다란 옛날 책들이 길길이 쌓여 있었다. 벼룻집 위에 놓인 용을 새긴 붓꽂이, 그 옆에 있는 범을 새긴 대리석 도장, 벽에 걸린 옛날 명필의 글씨, 흰 말 꽁지로 만든 총채‥‥‥ 아 그 모든 신비스럽고 호화롭던 방 장식은 지금도 내 눈에 보이는 듯하다.

 

3

 

  얼마 있더니 문이 열리며 스무 살이 될락 말락 해 보이는 상투 짠 젊은 사람이 들어왔다. 아버지가,

『일어나 형님께 절해라.』 고 하신다.

  시키는 대로 나는 또 일어나 절을 하였다. 그것이 그 집 젊은 주인 서강대신의 증손자 나의 열두촌 형님 김종근이었다. 서강대신은 아들도 손자도 일찍 여의고 단지 이 어린 증손 하나를 대를 물릴 귀한 자손으로 애지중지해 거느리고 있던 것이다. 아버지와 서강대신과는 종근을 옆에 앉히어 놓고 또 무슨 이야기 인지 길게 하기 시작하였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학교니 무엇이니 하는 말이 자꾸 나오던 것으로 보아 서강대신은 종근을 학교에다 보낼까 말까에 대해 아버지에게 상의하던 것인가 싶다.

  다른 일이면 상의할 사람이 얼마든지 있었겠지 만은 신식개화에 대해서는 멀고 가까운 것을 물론하고 집안에 나의 아버지 밖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때 아버지는 한국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 유학을 갔다 와서 탁지부로 내각 제도국으로 벼슬을 다니다가 합방이 된 후에도 그대로 계속해 다니고 계셨던 것이다. 서강대신과 아버지가 그때 하던 이야기가 종근에게 공부를 시킬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었음은 그 후에 아버지가 일상 서강대신이 완고해서 종근에게 학교 공부를 안 시킨 것이라고 원망하던 것으로 짐작이 된다.

  생각컨대 서강대신은 대원군 시절에 가장 맹렬하게 양이-서양 오랑캐들을 물리치기를 주장하던 분이라 세상이 날로 그의 생각과는 달라감을 보자 하나 밖에 없는 귀한 자손에게 신식 공부를 시킬 필요를 느끼고 아버지 하고까지 의논을 한 것이었으나 끝끝내는 자기의 신념에 충실해서 종근을 학교에 보내지 않았던 것인가 싶다. 어른들의 이야기가 너무 오래 계속되므로 나는 갑갑함을 참다 못해가만히 자리를 일어나서 웃목 두껍닫이를 열고 누마루로 나갔다. 누마루도 문은 사방으로 다 닫혔으나 저녁 햇볕을 받아 정신이 번쩍나게 환하게 밝았다.

  장식은 별로 없으나 이곳에도 가뜩 쌓인 책과 대들보에 걸린 〈滄浪亭〉이라는 현판이 역시 나의 호기심을 끌었다, 나는 창랑정이라는 현판을 한참이나 쳐다보고 옳지 창랑정 창랑정 하더니 찰 滄자 물결 浪자 정자 亭자로구나 하고 그것을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이 몹시 기쁘고 뽐내고 싶었다. 현판은 서강대신이 스스로 쓴 것이어서 끝에는 〈濤庵〉이라는 서명까지 있었다. 한참이나 현판을 쳐다보다가 나는 마룻가로 가서 강 편으로 향한 덧문을 밀어 보았다. 의외에도 덧문은 소리도 없이 스르르 열리며 예기하지 못했던 창랑정의 웅대한 풍경이 눈앞에 전개되었다. 아! 그 일순간에 소리도 없이 내 눈 속으로 확 달려들던 창랑정의 대관, 그것도 역시 내 눈에 선하다.

  바로 눈 아래 보이는 검푸른 물결. 물결 건너로 눈에 가득하게 들어오는 넓고 넓은 백사장, 그 백사장 저편 끝으로 멀리 멀리 하늘 끝 단 데까지 바닷물결 치듯 울멍줄멍한 아득한 산과 산-나는 그 장대한 풍경에 정신이 팔려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그 곳에 섰었다. 얼마나 지났는지 그 장대한 풍경에 별안간 영롱한 빛이 비치어 정신 차려보니 저녁 노을이 뜨기 시작한 것이었다. 저녁 노을이라는 것은 차츰차츰 뜨기 시작하는 것이로되 보는 사람에게는 별안간 뜬 것 같이 보이는 것이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 삼월달인데도 공교롭게 하늘에는 층층이 갖은 형상을 다한 구름이 겹쳐 떠 있었다. 연기같이 가로 길게 꼬리를 끄는 구름, 가를 은빛으로 빛내며 풀 솜처럼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구름, 거대한 맹수의 싸움처럼 보고 있는 동안에 산 같이 솟았다가는 파도 같이 무너지는 구름, 저 맨 위에 아련히 생선 비늘 같이 엷게 입히어 움직이지 않는 구름, 그 가지가지 구름이 혹은 누렇게 혹은 붉게 혹은 분홍으로 혹은 자주로 혹은 오렌지 빛으로 제 각각 물들여져 간간히 내다보이는 푸른 하늘과 한데 되어 오색이 영롱한 요지경을 이룬 것이다.

  그 오색찬란한 하늘이 다시 물위에 거꾸로 비치어 하늘과 땅이 함께 어우러져 장대 화려한 꽃밭을 이룬 황홀한 광경은 일곱 살의 소년 아니라도 누구나 한 번 보면 한 평생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자연보다도 한층 내 어린 기억에 지워지지 않는 인상을 준 사건이 곧 일어났다. 황홀한 노을 뜬 풍경에 팔려 나는 내 발 밑 누마루 앞마당에 누가 왔는지 누가 갔는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는데 어쩌다가 언뜻 눈앞을 내려다보니 언제 온 것인지 열두서너 살 먹어 보이는 소녀가 앞마당에 와 서서 방긋방긋 웃으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희화나무 꽃씨로 물들인 「호야 노랑」저고리에 잇 다홍치마를 입은 소녀는 오색이 영롱한 저녁 노을을 등지고 서서 방긋방긋 웃으며 나를 쳐다보는 것이다. 나는 곧 그 소녀에게 몸이 잦아지는 것 같은 호감을 느꼈다. 그래 나도 모르는 동안에 빙긋이 웃었더니 소녀는 이리 오라 이리 오라고 나에게 손짓을 하였다.

 

4


  나는 고개를 끄덕하고 마당으로 내려가려고 큰사랑으로 들어갔다. 그랬더니 어디 가 있었느냐고 아버지가 꾸중을 하시면서 인제 안으로 들어가 할머니를 뵈어야 할 테니 거기 가만있으라고 하셨다. 마당에 있는 소녀가 궁금해 좀이 쑤시어 죽겠으나 하는 수 없이 아버지 옆에 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안채는 사랑채보다도 더 드높고 더 뼈대가 굵었다. 윤간 대청을 가운데 끼고-퇴까지 합하면 여덟 간이나 된다-서편으로 안방, 동편으로 건넌방, 안방 머리에는 마루방, 건넌방 머리에는 목방, 거기서 꺾여 뒷방, 뜰 아래로 뜰아랫방이 둘-이렇게 적어 오면 굉장히 으리으리한 것 같으나 원체 후락한 집이라 몹시 충충한 데다가 서까래가 썩어 유착한 지붕 끝이 아래로 축 늘어진 것이 무슨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폐절(廢寺) 같았다. 지붕에는 작년에 났던 망초 마른 것이 어수선하고-.

  안 대문을 들어서자 음식 냄새가 코를 찌르고 대청과 부엌에 사람들이 득실득실 했다. 떡시루를 들고 왔다갔다 하는 사람, 부침개질을 하는 바람, 가랫대를 들고 도끼로 내리찍는 사람, 도라지를 쪼개는 사람, 콩나물을 다듬는 사람, 고기를 재는 사람, 그 충충한 큰집이 온통 떠들썩하다. 대가집이라 사는 번새가 그런가 하고 속으로 생각하노라니,

『내일이 노할머니 생신이란다. 나는 저녁 먹고 집으로 갈 테니 너 혼자 여기서 종근형하고 같이 자고 며칠 놀다가 오너라. 내일 아침에는 어머니가 나오신다.』

  하고 아버지가 말씀하신다. 아버지는 기침을 에헴에헴 하시며 나를 데리고 정경 부인 누워 계신 안방으로 들어가셨다. 대청에 있는 젊은이들은 더러 피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안방에는 나이 많은 분들이 가득 앉아서 아버지가 들어가셔도 피하기는커녕

『영감 왔소.』

『자네 왔나.』

  하면서 아버지를 백줴 아이 취급이다. 정경부인은 아랫목에 누워 계신데 아버지와 내가 번갈아 절을 해도 누렇게 들뜬 얼굴을 조금 돌렸을 뿐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정경부인께 절을 한 뒤 아버지와 나와는 무슨 할머니다 무슨 아주머니다 하는 방 안 노인들께 돌아가며 절을 하느라고 혼이 났다. 절이 한 바퀴 끝난 뒤 울멍줄멍한 이상한 천정-그것이 소라반자 라는 것이었다-을 쳐다보며 한숨 돌리고 앉았는데 방안이 또 수선수선 하더니 문이 열리며 달덩이 같은-정말 그때 나에게는 달덩이 같이 환하게 보였다-새색시가 눈을 내리깔고 방으로 들어 왔다. 새색시는 아버지께 공손히 절을 한다. 아버지도 당황한 듯이 반쯤 일어나 절을 받으신다, 청대반물 치마에 호야 노랑 저고리를 맵시 있게 입은 새색시를 바라보며 나는 문득 아까 본 소녀 생각을 하였다. 소녀는 그의 누이나 조카딸이리라-.

『너 아주머니께 절해라.』

누가 나더러도 절을 하라 한다. 새색시는 종근 형의 색시였던 것이다. 저녁이 지난 뒤에 아버지는 처음 말씀대로 나만 그 곳에 남겨 두고 문안 집으로 들어가셨다. 그때까지 집을 나와 외방에서 자 본 일이 한 번도 없는 내라 아버지를 따라 들어갈 생각도 간절했으나 어린 마음에도 그 곳에 있으면 내일은 아까 그 소녀를 마음대로 만날 수 있으리라 싶어 나는 쉽사리 아버지 말씀을 승낙하고 무슨 모험이나 하러 나서는 것 같은 호기심에 가슴을 뛰이며 잠이 들었다. 이튿날은 새벽부터 손님들이 오기 시작하였다.

  손님이래야 대개는 안 손님이요, 거의 다 일갓집 마님 아씨들이라 내가 아는 할머니 아주머니도 여러 분 계셨다. 그러는 중에 기다리던 어머니가 오시더니,

『잘잤니. 세수는 했니. 집에 오구 싶지 않데. 무얼 먹었니.』

  하시며 나를 보고 반색을 하신다. 나는 소녀 생각도 무엇도 다 집어치우고 어머니만 반가워 어머니 옆을 떨어지지 않으리라 하였다.

  어머니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그 동안에 어디서 그렇게 모였는지 대청에는 노랑 저고리에 남치마를 질질 끄는 새댁들이 득시글득시글 하였다. 그들이 떠드는 품이란 어저께의 비가 아니었다. 새색시들은 예의도 잊어 버리고

「그것 이리 주게.」

「이것 저리 두세요.」

하고 고함고함 치며 야단들이다. 그들은 오래 농 속에 갇혔다가 처음으로 놓여 나온 참새 떼처럼 무슨 이야기를 쏘근쏘근 하기도 하다가 킬 하며 웃기도 하다가 서로 허리를 쿡쿡 찌르며 장난도 하다가 어떤 이는 만들던 음식을 집어 재빠르게 입으로 집어넣고 우물우물 씹어 먹기도 하였다. 방 안고 마루도 잔치 손님으로 가득 차 어디가 편하게 앉을 구석도 없었다. 거기다가 일시도 입을 다물고 잠자코 있는 이가 없다. 여인네가 모이면 시끄럽게 떠드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나는 정신이 얼떨떨해 견디다 못해서 늦은 아침을 간신히 얻어먹자 곧 그 사람 고장을 빠져 나와 안 뒷곁으로 갔다.

 

5

 

  안 뒷곁에는 또 마당이 있고 마당에 연해서 바로 뒷동산이다. 집 뒤 산 중턱을 잘라 기와 담을 넓게 돌려 싸 놓고 복숭아나무 살구나무 오얏나무 앵두나무 등 갖은 과일 나무며 수양버들 동청 개나리 등속을 터가 좁도록 심어 놓은 안이 뒷동산이었다. 동산 기슭에는 단청 칠 벗겨진 사당채가 있었다. 나는 한참이나 사당채를 구경하다가 동산 맨 위로 올라가 보리라 생각하고 과일 나무 사이 좁은 길을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그때였다. 누가,

『애, 애.』

  하고 뒤에서 불렀다. 돌아다보니 노랑 저고리에 잇 다홍치마를 입은 어제 그 소녀가 막 뒷방 모퉁이를 돌아 나 있는 곳으로 급히 오는 것이었다. 나는 몹시 반가웠으나,

『왜?』 대답만 하고 그 자리를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소녀는 나 있는 곳으로 올라 오더니,

『우리 저리 올라가 놀까.』

동산 위를 가리키며 내 얼굴을 들여다본다.

『응.』

  하고 내가 고개를 끄덕이니까 그는 내 손을 붙들고 동산을 같이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너 이름이 무어지?』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묻는다.

『김시근이.』

『어디 사니?』

『계동.』

『계동이 어디냐?』 『 여기서 아주 멀단다. 」

  이야기하면서 나는 무엇인지 모르게 포근포근한 행복을 느꼈다. 소녀하고 어디까지라도 그렇게 손을 붙들고 걸어가고 싶었다. 그리고 보니 나도 소녀의 이름이 알고 싶어진다.

『넌 이름이 무어냐?』

『내 이름?』 하고 소녀는 어린애답지 않게 그런 것을 묻는 나를 의외로 생각했던가 방긋 웃고서,

『을순이란다.』

하고 대답한다. 나는 소녀에 대해 좀더 알고 싶었다.

『너 이 집 새 아주머니 동생이냐?』

『아니. 새 애기씨는 우리 작은 아씨란다.』

  나는 그 뜻을 알 수 없어,

『작은 아씨?』

하고 재쳐 물었다.

『지금은 새 애기씨지만-』

  그래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더 묻지 않았다. 이것도 나중에 안 것이지만 을순이는 종근형의 새색시가 시집 올 때 데리고 온 교전비(轎前婢)였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우리는 맨 꼭대기 담 밑까지 왔다. 담 밑은 편편한 잔디밭이었다.

『우리 여기서 놀아, 응.』

하고 을순이는 나를 잔디밭에 앉히고 저도 옆에 와 앉았다. 내려다보니 그 큰 집 안채 사랑채들이 큰 고래등같이 눈 아래 엎드리고 그 너머로 어제 저녁 때 내가 황홀해 내다보던 강물과 흰 모래밭, 탁 트인 경치가 한눈에 보인다. 나는 을순이가 내 손을 조몰락거리는 것이 어째 부끄러워,

『강물은 왜 저렇게 퍼럴까?』

강물은 가리키며 물어 보았다.

『강물이 그럼 퍼렇지 무어.』

하더니 을순이는 내 옆으로 바싹 다가앉아 내 얼굴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너 몇 살이지?』

『일곱 살.』

『누님 있니?』

『응.』

『누님은 몇 살이냐?』

『열다섯 살.』

『예쁘지, 예쁘게 생겼지?』

나는 그때까지 누님을 예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으나 남한테 밉게 생겼다고 하기도 싫어서

「응」

  하고 대답하였다.

『언니는?』

『언니두 하나 있어.』

『몇 살이냐?』

『열두 살.』

『잘 생겼니, 이렇게 너 같이.』

「웅」

하고 대답하려는데 을순이는 별안간 두 손으로 내 양편 볼을 꼭 끼고 바르르 떤다. 을순이의 그런 행동은 나에게도 어쩐지 몸이 자지러지게 기뻤으나 한편으로는 별안간 무서운 생각이 났다. 어째 을순이가 달려들어 때리고 꼬집고 할 것 같았다.

『싫어. 애 난 싫어.』

나는 고개를 흔들며 손으로 내 볼을 낀 을순의 손을 떼려 하였으나 을순이는 방긋방긋 웃으며 놓으려 하지 않는다.

『싫어, 애 단 싫어.』

나는 아까보다도 더 고개를 내저으며 우는 얼굴이 되었다. 그제서야 을순이는 손을 놓으며,

『아냐, 아냐, 못난이 같으니. 네가 예쁘다고 그랬지 무어.』

하더니 잠깐 있다가,

『우리 놀았다구 아무 보구두 말 말어 응.』

하고 내 얼굴을 들여다본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비밀을 지킬 것을 약속하였다. 잠깐 있다가 을순이는 무엇을 생각한 듯이, 『아이구, 찾으실 텐데.』 하고 벌떡 일어나며,

『우리 이따 또 놀아.』

  해 놓고 동산 길을 뛰어내려갔다. 을순이 내려가는 뒷모양을 보며 나는 몹시 섭섭했다. 내가 고개를 흔들었기 때문에 내려간 것 같아 후회도 되었다. 이번에 을순이가 또 그렇게 하거든 가만히 있으리라고도 생각하였다. 그러나 곧 나는 이런 생각 저런 생각 다 잊어버리고 동산을 뛰기 시작하였다.

 

6

 

  그 후 나는 창랑정에 며칠 더 있는 동안 을순이와 아주 친해져서 틈만 있으면 같이 뒷동산에 올라가 놀았다. 바구니를 들고 냉이를 캐기도 하고 흙을 헤치고 메를 캐 먹기도 하는 재미는 그때까지 도회의 한복판을 떠나 본 일이 없던 나에게는 처음 경험하는 신기한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하루는 내가 창랑정을 생각할 때 빼놀 수 없는 인상 깊은 사건이 또 하나 일어났다. 어느날 저녁 때 나는 또 메 캐러 가자는 을순의 말을 따라 뒷동산에를 올라 갔다. 나무 꼬챙이를 들고 이곳저곳 물신물신한 흙을 파헤치고 손가락으로 뒤적뒤적하면 오직오직 부러지는 메가 나온다. 겉에 묻은 흙을 털고 입에 넣고 잘강잘강 씹으면 흙 냄새에 섞여 달크므레한 물이 나오는 맛이란 일 전에 둘씩하는 왜떡이나 눈깔사탕에 비할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다른 질긴 풀뿌리도 잘못 알고 씹어 보다가는 써서 튀튀하고 뱉기도 했지만 차차로 나도 메와 다른 풀뿌리를 쉽사리 분간하게 되었다. 을순이는 어느 결에 그렇게 캐는지

  금방금방으로 한 움큼씩 캐 가지고 와서는 말짱하게 흙을 털어 나더러 먹으라고 준다. 나중에는 두었다 집에 가서 먹으라고 조끼 호주머니가 뿌듯하도록 넣어 주기까지 하였다. 해가 거의 거의 넘어갈 무렵이었다. 을순이는 저편에서 메를 캐고 나는 나대로 흙을 파헤치고 있는데 무엇인지 나무 꼬챙이 끝에 딱딱하게 걸리는 것이 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알고 그 옆을 또 찔렀더니 거기서도 무엇인지 또 걸리는 것이 있었다. 궁금해 흙을 이리저리 파헤쳤더니 무슨 나무 색은 것 같은 것이 나오고 그것을 또 헤치니까 뿌연 무슨 쇠 같은 것이 보인다.

『애, 이거 뭐냐.』 나는 곧 을순이를 불렀다.

『뭐?』

  하며 을순이가 쫓아온다. 을순이는 엎드려 좌우를 더 파헤치며 흙을 털어 가며 들여다보더니 별안간,

『칼이다, 칼이다!』

  하고 소리를 지르며 일어났다. 그것은 내가 보기에도 확실히 칼이었다. 우리는 땅 속에 가로 묻힌 긴 칼 한 중턱을 파낸 것이었다. 을순이는,

『애, 가만 있어. 내 호미 가지구 올게.』

해 놓고 동산을 뛰어내려갔다. 을순이와 내가 한참이나 힘을 들여 파낸 것은 내 키보다도 더 길고 내 힘으로는 쳐들기도 무거운 큰 칼이었다.

  썩은 칼집은 군데군데 붙어 있을 뿐 파내는 통에 다 떨어져 갔으나 알맹이는 흙을 대강 떨고 보니 등이며 날이 엊그제 새로 지은 것 같이 아직도 생생하였다. 칼자루와 손잡이에는 이상한 조각이 가득하고 찬란한 순금 장식이 눈이 어리게 빛나고 있다.

『애-』

  나는 감격해 소리치며 전신의 힘을 모아 칼을 번쩍 들어 저물어 가는 하늘에 휘둘러보았다. 저녁 햇빛을 받아 칼끝이 번쩍번쩍 한다.

『애, 그러지 말어. 그러지 말어.』

말리는 을순이를 젖히고 나는 또 한 번 칼을 들어 힘껏 휘둘러 보았다.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장검을 비껴 찬 장수가 된 것 같이 장쾌하던 그때의 느낌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 칼이 얼마나한 보검이었는지 그 후에 그 칼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나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상당히 명검이었던 것은 몇 핸지 몇 십 년인지를 땅 속에 파묻혀 칼집이 다 썩었으면서도 날에는 대단한 녹도 슬지 않았던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날 밤 서강대신이 칼을 앞에 놓고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며 감개무량해 하던 그 얼굴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서강대신은,

  『허긴 이 집은 옛날에 정대장이 살던 집이니까.』

  하고 혼잣말 하듯 중얼거리며 무슨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정대장이 누군지 어째서 그런 칼을 땅 속에 묻어 감추었던 것인지 그것도 지금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그 칼에는 반드시 깊은 비밀과 숨은 이야기가 있었을 것은 그날 밤에 서강대신의 표정으로도 판단 할 수 있다. 창랑정의 기억은 대개 여태까지 기록해 온 것에 그친다. 그러나 그 뿐이라면 또 그다지 창랑정이 내 머리를 왕래하지 않았을 것이요, 소설의 형식을 빌어 일부러 쓰게까지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이란 일상 현재 눈앞에 있는 것보다도 지나간 것, 없어진 것에 이상히 애착을 느끼는 법이다. 창랑정은 지금은 흔적도 없이 없어졌다. 없어졌기 때문에 창랑정은 더 한층 내 향수를 자아내는 것이다. 창랑정의 후일담은 그 자신 한 편의 장편소설이 되겠으므로 이곳에 쓰지 않거니와 간단히 뼈만 추려 말하면 내가 다녀오던 해로 정경부인이 돌아가고 그 후 오륙 년이 지나 서강대신이 구십이 가까운 나이로 마저 돌아가고 그 소상이 지나기도 전에 그 며느님 종근의 할머니도 또 돌아가셨다. 사람만 이렇게 없어진 것이 아니라 이를테면 수 백년 바람 비 겪던 늙은 거목이 매운 겨울을 치르고 난 어느 봄, 소리도 없이 새싹을 돋지 못하듯이 수 십년 영화를 누리던 서강대신의 집안은 나날이 변하는 세상 풍파에 밀려 불과 몇 해 동안에 여지없이 망해 없어지고 만 것이다.

 

7

 

  창랑정의 몰락을 재촉한 것은 나의 형벌 되는 종근의 난봉이었다. 어른들이 다음다음 돌아가시자 그때까지 들어앉아 한문책만 읽고 있던 종근형이 별안간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고 기생오입을 시작하였다. 서강대신 대상 때에는 벌써 집터까지 남의 손으로 넘어가 창랑정은 텅 비인 껍데기 뿐 이었다. 그때 여러 해만에 아버지를 따라 정든 고향을 찾아들 듯이 다시 창랑정을 나간 나는 너무나 심한 그 변화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이 득시글득시글 하던 옛날의 모습은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고 집은 무너지는 대로, 마당의 잡초는 나는 대로, 거기다가 그 큰집에 그 날 모인 사람들이라고는 불과 십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을순이와 놀던 동산에 볼만한 나무 한 주 없고 남치마 입은 새댁들이 득시글거리던 대청에서는 까만 생쥐 같이 초라한 형수가 늙은 어멈 하나를 데리고 제수를 차리고 있었다. 저이가 그 달덩이 같이 보이던 형수인가, 나는 내 눈을 의심할 지경이었다. 그날 밤 서강대신이 거처하던 큰사랑에는 나의 아버지를 중심으로 일여덟 분이 둘러앉아 보슬비에 젖은 것 같은 얕은 음성으로 가지가지 회고담을 하고 계셨다. 그때는 나도 나이 열 여섯이라 어른들 말씀을 대강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임진란에 창랑정이 진터가 되었었다는 이야기로부터 대원군 시절에 선교사를 학살한 것 때문에 블란서 해군제독 〈로오즈〉장군이 〈프리모게〉이하 군함 세 척을 거느리고 강화도로부터 한강을 쳐 올라와 조정을 빨끈 뒤집히게 하며 여러 날을 정박하던 곳이 바로 창랑정 마당 앞이었다는 이야기, 그때에 조정에서 가장 맹렬하게 「양이배척」을 주장하던 이는 다른 이가 아니라 선전관으로 계시던 서강대신 바로 그분이었다는 이야기들을 밤이 이슥토록 하고 계셨다. 굴건제복을 입은 몸을 갑갑한 듯이 가끔 굼실거리며 용렬스레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 있는 서강대신의 증손자 종근을 바라보며 나는 감개무량하게 아버지 말씀을 들었다. 아버지의 말씀은 가만가만 잔물 흐르는 듯 하는데 밤은 깊어서 만뢰가 고요하다. 언뜻 눈을 들어 아랫목 젯상을 보니 황초에 켜 놓은 누런 불길이 바람도 없는데 흔들흔들 흔들리어 길게 천정으로 늘어 났다가는 도로 짧게 오므라진다. 그 후 다시 거의 이십 년, 나의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나는 내 길을 걸어오는 동안에 창랑정은 아주 흔적도 없이 없어지고 말았다. 종근형의 식구가 서울 살림을 다 파헤치고 시골 일가 촌중으로 낙향해 간지도 이미 오래다. 그동안 나는 창랑정을 잊지는 않았어도 별로 그렇게 심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올 봄 들어서며 웬 일인지 연속해 세 번이나 창랑정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는 반드시 나는 도로 일곱 살의 소년이며 창랑정 앞 하늘에는 노을이 뜨고 큰사랑에는 서강대신의 은실 같은 수염과 거물거리는 황촛불이 있으며 아버지는 단장을 들어 창랑정을 가리키시고 뒷동산에서는 나와 을순이가 저녁 햇빛을 받고 노는 것이다.

  세번째 꿈을 꾸었을 때 아침에 일어나니 나는 어젯밤 꿈이 하도 역력해 그리운 마음을 억제할 수 없었다. 생각해 보니 멀지 않은 곳에 있으면서도 서강대신의 제삿날 밤 이후 거의 이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는 한 번도 창랑정에 가 본 일이 없는 것이다. 마침 공일이요 거기다가 시절도 바로 삼월이라 나는 점심을 먹은 후 산보 겸 카메라를 메고 집을 나섰다. 처음 타보는 당인리행 기동차를 타고 서강에서 내려 나는 옛날 기억을 더듬어 창랑정을 찾아가려 하였다.

  그러나 이상스레도 그 산이 어느 산 이든가, 그 집이 어느 집 이든가, 꿈속에서는 그렇게 똑똑하던 곳이 실지로 가보니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겨우 근사해 보이는 곳을 찾기는 하였으나 집 뒤 산이던 곳은 발간 북덕이요 그 밑 창랑정이 있던 듯이 생각되는 곳에는 낯 모르는 큰 공장이 있어 하늘을 찌를 듯한 굴뚝으로 검은 연기를 토하고 있었다. 너무나 심한 변화에 실망한 채 나는 한참이나 공장 앞마당 석탄재 쌓인 위를 거닐며 꿈속의 기억을 되풀이하여 보려고 하였다. 마당 앞 낭떠러지 밑 푸른 강물은 옛날과 마찬가지로 출렁거리고 있다. 그러나 음산하게 찌푸린 하늘에서는 봄이라 해도 오슬오슬 쌀쌀한 바람이 불어 내려올 뿐 끊임없이 왈가닥거리고 돌아가는 기계 소리는 애써 옛 기억을 더듬으려는 내 머리를 여지없이 혼란시킨다. 창랑정은 추억의 나라, 구름과 안개에 싸인 꿈의 저편에만 있을 수 있는 존재였던가? 나른한 추억에 잠겼던 내 정신은 차차로 굳센 현실 앞에 잠 깨 온다. 문득 강 건너 모래밭에서 요란한 프로펠러 소리가 들린다. 건너다보니 까맣게 먼 저편에 단엽 쌍발동기 최신식 여객기가 지금 하늘로 날아오르려고 여의도 비행장을 활주 중이다. 보고 있는 동안에 여객기는 땅을 떠나 오십미터 백미터 이백미터 오백미터 천미터 처참한 폭음을 내며 떠 올라갔다. 강을 넘고 산을 넘고 국경을 넘어 단숨에 대륙의 하늘을 무찌르려는 전금속제(全金屬製) 최신식 여객기다.